가을의 도시 영주The Shadow of the Wind

곳곳에서 가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고, 조용한 이곳을 걷다보면 오랜 세월동안 드리워진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게다가 붉게 잘 익은 달콤한 사과와 꾸미지 않은 맛의 음식들까지 만날 수 있는 영주는 가을과 가장 잘 어울리는 도시다.

차창에 기댄 채 풍경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 그에 취하는 것만 같다. 이마를 맞댄 유리에서 딱 체온만큼의 따스함을 느낄 무렵, 차는 영주에 들어서고 있다. 차에서 내렸을 때 어디선가 부는 바람이 귀밑머리를 날리고 지나간다. 바람에 감도는 찬 기운에 몸을 떤다.

가을의 담백한 맛
푸르게 뻗은 하늘을 올려다보니 완연한 가을이 성큼 다가온 모양이다. 햇살은 따끔거리지 않고 달짝지근하다. 영주를 둘러싼 소백산은 웅장하기보다는 포근한 느낌이 들고, 한껏 가을을 머금고 있다. 조금씩 변해가는 나뭇잎들의 색이나 서늘한 공기만큼 가을을 느낄 수 있는 또 하나는 슬슬 고프다는 신호를 보내는 내 배다. 아무래도, 하늘이 높고 말과 함께 나 역시 살찌는 천고아비(天高我肥)의 계절이지 싶다.
영주 순흥면 읍내리에 자리하고 있는 전통 묵집의 메뉴는 오천 원짜리 묵밥 한 그릇이다. 구수한 멸치국물과 손수 만든 담백한 묵국에 밥을 말아 한 입 먹어보니 입 안에 감기는 담백한 맛이 반갑다. 채를 썬 묵과 김치, 김가루와 깨까지 얹어낸 묵밥과 동동주 한 잔까지 먹고 나서 부엌을 들여다보니 손수 메밀을 갈아 끓이고 있다. 아궁이 옆에 앉은 주인아저씨는 계속 아궁이를 살피며 묵을 젓는다. 저런 정성이 들어갔으니 특별한 조미료 없이도 담백한 맛을 낼 수 있는 것 같다.
든든한 배를 안고 소수서원을 향한다. 수백 년은 묵었음직한 적송나무들이 소수서원에 들어서는 길을 지키고 있다. 풍기군수였던 주세봉 선생이 세운 최초의 사액서원(국가로부터 특별히 공인된 서원)으로, 명종 5년인 1550년에 세워진 곳이다. 소수서원 옆으로 흐르는 죽계천 건너편에는 서원에서 공부하던 선비들이 머리를 식히고 풍류를 즐기던 취한대(翠寒臺)라는 정자가 있는데, 그 옆에 붉은색으로 공경할 경(敬)자가 씌여진 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세조가 단종에게 왕위를 빼앗은 후, 단종 복위 운동을 하던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그들이 처형당하면서 흘린 피가 죽계천을 핏빛으로 물들일 정도로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그 때문인지 서원에서 공부하던 선비들이 자꾸만 귀신을 보았다. 주세붕이 바위에 ‘경’자를 새기고 위혼제를 지낸 것도 이 귀신들을 달래기 위해서였고, 효과가 있었는지 그 이후에는 귀신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의 믿음과 신념을 위해, 혹은 그와 관계없이 무고하게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니 맑은 물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그 순간에도 지금 내 머리칼을 날리는 바람이 불었을까, 고요하게만 보이는 주변 어딘가에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묻어있었던 것은 아닐까.
소수서원이 유명한 것은 최초의 사액서원이라는 이유와 함께, 천 원짜리 지폐의 주인공 이황 선생 덕분이다. 사액서원으로 만든 것도 당시 군수였던 이황이 왕에게 주청을 올렸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서원이 조선시대 엘리트 격인 유생들만 다닐 수 있는 곳이었는데, 이황은 배움은 신분도, 돈도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며 많은 문하생을 두었다. 그 중에는 이 서원에 심부름을 다니던 무쇠장이 배순이라는 천민을 제자로 삼아 가르쳤는데, 이 배순의 초상과 이황의 흉상, 명종이 친필로 하사한 소수서원의 간판 등을 소수서원 옆에 있는 소수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소수박물관은 2004년 9월 개관한 국내 유일의 유교박물관으로, 영주지역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에서 서원 창건까지 다양한 역사 사료가 잘 보관되어있다.
소수박물관을 나서면 탁 트인 기와촌이 펼쳐져 있다.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옛 양반과 서민들의 역사를 재현해놓은 선비촌이다. 선비들이 공부했던 모습을 재연해 놓은 강학당, 선비들이 살았던 중류주택의 전형인 김상진 가옥과 경부 북부지방의 전형적인 ㅁ자 구조 가옥 해우당 고택, 저잣거리 등이 고스란히 지어져 있다. 이곳에서는 우리 가락이나 다도, 서당 교육 체험, 떡메치기 및 인절미 시식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으며, 원하는 사람은 직접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고택체험 역시 마련되어 있으니, 직접 방문해서 하룻밤을 묵으며 옛 선비들의 삶을 느껴보기를 권한다.

애달픈 짝사랑이 만든 부석사
부석사를 향하는 길은 녹록지 않다. 매표소에서 부석사까지 이어진 숲길을 통과해서 일주문을 지나 사천왕문까지, 십오 분 정도가 소요되는 긴 언덕을 올라가야 한다. 하지만 이 길이 길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주변에 늘어선 가로수들의 아름다운 풍경과 올라갈수록 조금씩 달라지는 풍경을 볼 수 있는 ‘눈맛’이 있기 때문이리라. 이 눈맛은 부석사에 들어선 후에도 느낄 수 있는데, 부드럽고 탄력있는 곡선미의 배흘림 기둥과 우아한 용마루를 자랑하는 무량수전과 부석사를 울타리처럼 아늑하게 감싸고 있는 소백산 덕분이다.
소백산 앞에 위치한 무량수전은 고려 현종 7년에 지어진 건물로 창건연대가 확인된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곳이다. 기와 지붕 추녀의 곡선과 기둥이 주는 조화는 지금 보아도 미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감탄을 자아낼 정도인데, 복잡한 도시의 흉물스러운 간판과 개성 없이 네모나기만 한 건물들 속에서 지친 눈이 편안해지는 것 같다. 무량수전 안으로 들어서니 소조여래좌상이 보인다. 보통 좌우에 보살상이 자리잡고 있는 다른 사찰들과는 달리 본존불 하나만 있는 모습이 독특하면서도 위압감이 느껴진다. 이 거대한 좌상은 흙으로 만들어서 금을 덧칠했다고 하는데,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이 바라보는 각도마다 다른 표정을 자아낸다.
부석사의 상징인 부석은 실제로 바늘크기만큼 떠 있다고 한다. 실제 이름도 뜰 부자에 돌 석자를 사용하는 이 돌에는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와 당나라 처녀 선묘간의 애틋한 전설이 깃들어있다. 699년 불법을 닦기 위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 의상이 묵었던 집 주인의 딸이 선묘였는데, 그를 본 순간부터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10년간 애달픈 짝사랑이 계속되었고, 결국 선묘는 그가 떠날 때 자신이 용이 되어 지켜주겠다며 바다에 몸을 던진다. 그리고 그녀는 계속 의상의 주변을 맴돌다가 의상이 다른 종파의 반발로 부석사를 짓지 못할 때 커다란 바위로 변해 절을 짓게 해 도왔다고 한다. 부석사의 부석은 그녀가 변한 것인 셈이다. 이 부석은 두 개의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사이가 바늘만큼 떠 있다. 옆에는 부석이라고 한자로 새겨져 있는데, 독특하게도 돌 석자에 점이 하나 찍혀 있다. 점이 없으면 돌이 날아갈까봐 붙들어 두려는 의미라고 한다. 이끼가 끼어있는 육중한 돌이 정말 날아갈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에 점을 지워보고 싶다.

바람이 머무는 영주
부석사에서 10킬로미터 채 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죽령옛길은 2.5킬로미터 정도로, 충청도와 경상도의 경계 즈음에 위치하고 있다. 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는 안개가 끼어 있었던 옛길을 반쯤 내려가자, 그제서야 온전한 모습을 드러낸다. 문경새재, 추풍령과 함께 영남의 관문인 이 길은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와 신라가 대치해서 격전을 벌인 곳이었고, 그 후 보부상들이 팔아야 할 물건을 지고 걸었던 상업교통의 요지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입신양명의 꿈을 품은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 떠나던 길이기도 했다. 고갯길가에는 이제는 사라졌지만 한때는 주막이었고 집터였던 흔적들이 조금씩 남아 있는데, 한때 번화했던 이곳의 이야기는 내 팔을 휘감고 지나는 바람만이 알고 있으리라. 경사가 심하지 않아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 반이면 충분히 지날 수 있는데, 발 아래에 밟히는 나뭇가지 소리만 들릴 뿐, 사람이 별로 많지 않아 고요하다. 눈앞을 가로막고 있던 산들이 조금씩 고개를 수그리는 길 끄트머리 근처에는 과수원들이 늘어서 있는데, 인심 좋은 과수원 주인이 사과를 한 알 내민다. 빠알간 사과를 한 입 베어무니 여름내 햇빛에 달구어진 달콤함이 입 안을 채운다. 전국적으로 알아준다는 영주 사과는 모양도 맛도 일품이다.
영주의 특산물은 사과 외에도 다양하지만, 특히 인삼이 유명하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풍기에는 인삼시장이 자리하고 있는데, 시가보다 훨씬 싼 가격으로 좋은 품질의 인삼을 살 수 있다. 게다가 인심도 좋아서, 인삼이 들어간 건빵이나 차 같은 것을 덤으로 얹어주기도 한다. 한번쯤 들러서 여름내 지친 몸을 보신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게다가, 이 시장에서는 저울을 설치해두어 직접 근수를 달아볼 수도 있다. 근수가 10그램이라도 차이가 나면 시장 상가 내에서 모자란 양의 두 배만큼 보상해준다니 더욱 믿음이 간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영주역에서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무섬마을이다. 공식 명칭은 ‘수도리 전통마을’이지만 이곳 사람들은 무섬마을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 곳을 보는 순간 알 수 있는데, 굽이굽이 펼쳐진 강이 마을을 끌어안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동안 아끼고 보존해서 만든 곳이라 더욱 애정이 생기는데, 마을 내에서 무엇을 파는 등의 상행위를 하지 않아 더욱 그런 것 같다. 초가 지붕 위에는 흥부놀부 그림책에서나 보았던 박이 탐스럽게 자라 있고, 돌담길 아래에 소담하게 피어있는 들꽃이 수줍다. 이곳에는 민속자료 92호와 93호로 지정된 만죽재를 비롯한 많은 가옥들이 민속자료와 문화재자료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이 마을을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나무로 만든 의자를 늘어놓은 외나무 다리다. 소박하지만 튼튼하게 생긴 다리는 폭이 좁아서 균형을 잡지 않고 가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위태롭다. 마음을 가다듬고 천천히 건너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신경 쓰지 않았던 물 아래가 보인다. 물의 흐름을 따라 바닥에 생긴 모래의 흔적과 물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햇살의 모습을 보니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영주를 등지고 돌아가는 길, 아쉬운 마음이 든다.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품고 있는 이 도시는 한 번 돌아보는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 같아서다. 이 가을이 가기 전, 한 번 더 천천히 돌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