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의 여유, 이응노 미술관 Daejeon

가을과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는 책, 그리고 거기에 또 하나 덧붙이자면 바로 미술관이 아닐까. 하늘이 농익어가는 11월, 나는 미술관으로 향한다. 글, 사진 지수현 (대전/충남 통신원)

“나에게있어서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고암 이응노 화백은 말씀하셨다. 나에게도 이런 절실함이 있었던가. 하늘이 높고 구름의 형태가 예사롭지 않은 어느 가을날. 조금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미술관으로 향해본다. 내게 숨겨진 그 절실함을 찾으리라는 풍요로운 희망과 함께.
절묘하게도 이응노 미술관을 취재하던 날, ‘고암, 먹빛의 여정’ 행사의 오픈식이 있었다.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시의원, 그리고 이번 특별전에서 고암 이응노 화백에게서 직접 선물로 받은 작품 몇 점을 기증하신 한 어르신의 말씀도 이어졌다. 이응노 화백을 기리고자 건립된 미술관의 분위기가 다소 숙연했다. 본 적 없는 위대한 화백에의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미술관을 돌아보는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1924년 청죽이라는 작품으로 등단한 20대의 고암 이응노는 사군자, 특히 죽에 뛰어나 죽사라는 호를 받고 자연 산수 등을 화폭에 담았다. 1957년 미국 뉴욕 월드 하우스 갤러리에 출품한 그의 작품은 록펠러 재단에 의해 구입되어 뉴욕현대미술관에 기증되었다. 이를 계기로 수많은 한국회화 작품들이 외국에 처음 소개되기도 했다. 1960년대에는 파리에 정착하여 본격적인 세계적 화가의 길을 걸었는데 그 후부터 그의 문자추상 작품들이 빛을 발한다. 한글의 자모와 한자의 추상적 특징을 발견하여 이를 재구성하고 다양하게 조합하여 새로운 차원의 작품으로 탄생하는 문자추상. 보통의 회화와는 다른 느낌을 주는 문자 추상 작품들. 처음 미술관에 와서 작품을 보던 날이 생각난다. 암호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단순한 기호 같기도 한 작품들은 적잖이 나에겐 충격이었다. 단순한 회화와는 뚜렷이 구별되는 묘한 매력이 숨어 있었다. 이응노 화백은 이 문자들을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천천히 생각해 볼 일이다. 늘 정체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는 변화가 이어지는 그의 작품들은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그의 입지를 다지는 데 한몫을 하게 된다.
1980년대 이전이 문자추상의 시대라고 한다면 1980년대 이후는 사람을 그리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번 특별전의 테마에 속한 ‘고암, 사람을 그리다’에서처럼 한지 위에 먹빛으로 그린 사람들 몇십 명, 몇백 명이 모여 군상이라는 작품을 이룬다. 시청각 자료에 의하면 ‘환희의 동작, 수백, 수천 명 거대한 아우성’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실제 군상을 접할 때는 뭔가 아우성이 들리는 듯하다. 소리 없는 아우성. 그들은 뭔가를 주장하는 것 같았고 표현하는 것도 같았으며 혹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림 속 군중 속에 내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전통 회화에 기반을 두면서 동서양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표현했다는 미술계의 평은 분명히 틀린 말이 아니다. 한국의 정서를 한지 위에 담은 거대한 산수화와 오묘한 문자추상화, 사람들을 그린 군상 등은 한가지 색이라 표현하기엔 모자람이 많기 때문이다.
늦가을에 맞이하는 예술 작품. 고인이 된 화가의 그림과 그 그림을 보는 사람들. 그 사이에는 시간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존재하리라. 포근한 가을 햇살과 뜨거운 열정이 숨어 있는 위대한 화백의 작품이 가슴 속에 조용히 녹아든다. 저절로 여물어가는 가을처럼.

how to get there
대중교통 107번 버스 또는
지하철 이용, 대전정부청사 하차
승용차 유성 IC-대전정부청사
방면-만년4거리-평송청소년
수련원-대전시립미술관
문의 042-602-3270 ungnolee-museum.daejeo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