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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정취에 한 번, 호젓한 풍광에 두 번 취하다

새벽녘 고즈넉한 호숫가에 앉아 뽀얗게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바라다본다. 그 몽롱함이 채 가시기도 전 이번에는 수덕사의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진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살던 추사고택의 아늑함 역시 이방인의 마음을 한없이 풍요롭게 한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 썼던 내포 땅. 바로 지금의 충청남도 예산이다.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리는 기분은 언제나 짜릿하다. 그야말로 바다를 바라보며 달릴 수 있는 드라이브 길이 아닌가? 나도 모르게 자꾸 충청도로의 여행을 계획하는 까닭도 어쩌면 바닷길을 달리는 듯한 기분 좋은 착각을 가져다주는 서해안고속도로의 매력 때문일지 모르겠다. 7.3킬로미터의 웅장하고 멋스러운 서해대교를 건너면서 액셀레이터를 지그시 밟아 본다. 처음 베리타스를 만났을 때 주차장의 다른 차보다 한 뼘은 툭 튀어나와 있는, 동급 모델 중 최대 길이를 자랑하는 큰 덩치에 다소 걱정했는데, 이는 기우였다. 호쾌하게 앞으로 나가는 느낌이 부드러우면서도 가뿐하다. 잠시 운전대를 맡기고 널찍한 뒷좌석에 앉는 호사도 누려본다. 어느새 쌀쌀한 바람이 부는 겨울이 되었지만 아직 채 떨어지지 않은 나뭇잎이 그곳으로 떠나는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고찰에 스며든 세월의 흔적을 찾아
수덕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양쪽으로 늘어선 식당과 상가를 지나니 가파른 계단이 시작되기 전 수덕사 일주문이 눈에 들어온다. 계단에는 낙엽으로 변한 단풍이 소복이 쌓여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바스락’하며 기분 좋은 소리를 낸다. 금강문과 사천왕이 지키고 있는 사천왕문을 지나, 약수터에서 물을 한모금 마시고 다시 계단을 오르면 2층 누각인 황하정루가 나타난다. 황하정루의 1층은 박물관으로, 2층은 전통찻집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황하정루의 중앙통로를 따라 오르면 비로소 낡은 단청 아래 법고각과 범종각이 자리한 넓은 마당과 함께 삼층석탑을 거느린 수덕사 대웅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수덕사는 백제 위덕왕(554~559년) 때 창건한 고찰로 1,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다. 수덕사의 압권은 단연 위엄이 느껴지는 모습의 대웅전으로, 고려 충렬왕 34년인 1308년에 세워져 올해로 꼭 700년을 맞이했다. 영주의 부석사 무량수전, 안동의 봉정사 극락전과 더불어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손꼽히는 대웅전은 1937년 해체 수리 당시에 나온 묵서명(墨書銘)에 의하여 그 나이를 정확히 알게 되었는데 건립연대가 확실해 다른 건물의 건립연대를 추정하는 기준이 되며 형태미가 뛰어나 국보 제49호로 지정, 한국 목조건축의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정면에서 바라보는 대웅전이 오랜 역사가 묻어나는 고풍스럽고 위엄 있는 모습이라면 측면에서 바라본 대웅전은 단아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큰 사찰들의 대웅전은 대개 팔작지붕의 형태를 띠는 데 비해 수덕사의 대웅전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데 특히 건물의 하중을 분산시키는 부재인 소꼬리 모양의 우미량(牛眉樑)은 구조적인 기능뿐 아니라 곡선의 미를 느끼게 한다. 느티나무로 만든, 가운데가 볼록한 배흘림 기둥의 결을 쓰다듬어 보라. 그대로 살아 있는 나무의 결이 전해주는 700년 세월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대웅전 내부에는 보물 1263호로 지정된 쾌불탱화가 보관되어 있다.
수덕사를 내려와 처음 들어선 일주문에 다다르면 오른쪽으로 수덕여관을 알리는 화살표가 보인다. 수덕여관은 고암 이응로 화백이 1944년부터 1959년까지 머물며 작품활동을 하던 곳. 고암이 프랑스로 떠난 후에는 그의 본부인인 박귀희 씨가 여관과 식당으로 운영했는데 2001년에 그녀가 세상을 뜬 후 아무도 돌보지 않은 채로 방치되다가 수덕사가 이곳을 사들이고 충청남도가 복원사업을 시작, 작년 8월 새롭게 문을 열었다.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말끔하게 고쳐진 모습에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었지만  내부에 전시된 고암이 쓰던 집기와 풍경화, 그가 새겨놓았다는 뒤뜰 바위의 추상문자가 아쉬움을 달래 준다.

선조들의 손길과 정신이 담긴 고건축의 세계
“수덕사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에 기둥 위에만 공포를 얹는 주심포 맞배지붕을 하고 있습니다.”
수덕사 문화해설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이때만 해도 이 말의 반만 이해했을 뿐이었다. 나의 무지로 놓칠 뻔한 귀한 설명을 온전히 이해한 건 고건축박물관에서였다. 수덕사에서 5분 거리에 자리한 고건축박물관은 인간문화재 대목장 제74호인 고건축의 장인 전흥수 선생이 사재 100억 원을 들여 1998년에 개관한 박물관. 사찰, 서원 등 우리나라의 국보·보물급 고건축 문화재를 10분의 1, 5분의 1로 축소한 건물 모형과 범종, 기와 같은 고건축 부자재, 고건축을 짓는데 필요한 공구 등 옛 건축문화자료 200여점을 한 자리에 모아두고 있어 고건축의 역사와 건축에 관한 지식,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선조의 손길과 정신을 만날 수 있다.
제1전시관에 들어서자 역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국보 1호 숭례문이다. 화려한 단청을 자랑하는 이 꼬마 숭례문은 화재로 소실된 숭례문의 유일한 모형으로, 얼마 전에는 숭례문 복원을 위한 자료로 사용하기 위해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전되기도 했었다고. 이 밖에 2개의 전시관에는 국보 18호 부석사 무량수전, 국보 49호 수덕사 대웅전, 국보 51호 강릉 객사문, 보물 143호 개심사 대웅전, 보물 819호 덕수궁 중화전 등 조선시대 건축물 25채와 고려시대 건축물 5채, 그리고 북한 금강산에 있는 정양사 약사전과 중국 남선사대전, 불광사대전 등 총 33채의 건물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숭례문을 제외한 모든 고건축은 기와와 벽, 단청을 생략한 목조 얼개로만 복원되어 있어 고건축의 구조와 아름다움을 면밀히 살펴볼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 건축물마다 대들보, 서까래, 공포, 도리, 막새 등 부자재의 명칭과 이름을 일일이 달아 놓아 고건축 구조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처음에는 명칭이 익숙하지 않아 헷갈리지만 두 개의 전시관을 돌아보며 30여 개에 달하는 고건축을 찬찬히 살펴보다 보면 어느새 각 건축물의 시대별 특징을 비교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 그리고 고건축에 재미를 느낄수록 그 안에 담긴 가치와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야외 전시관에는 강릉 객사문과 전통 팔각정 양식이 복원되어 있고 영상실에서는 고건축박물관 건립 의의와 이곳에 전시된 고건축을 화면으로 만나볼 수 있다.

고즈넉하고 여유로운 예산에서의 하루
수덕사의 오랜 역사를 만나고 고건축의 면모를 살펴보았다면 이번에는 추사고택에 서려 있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삶을 엿볼 차례다. 신암면 용궁리에 위치한 추사고택은 조선후기의 학자이자 서화가, 금석학자인 추사 김정희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곳으로 양반 살림집의 전형을 볼 수 있다. 사랑채, 안채, 그리고 뒤쪽의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는 추사고택은 예상과 달리 의외로 소박한 모습이지만 그 속에 서린 강직한 유교정신과 양반집의 고고함이 느껴진다.
안에 들어서면 추사의 글씨가 가득한 ‘주련(柱聯)’이 고택의 42개 기둥에 걸려 있다. 주련이란 기둥에 장식으로 그림이나 글씨를 써놓은 판으로, 비록 재현품이긴 하나 주옥같은 글귀들이 마음을 흔든다. 그중에서 특히 눈여겨볼 것은 안채 정면의 기둥에 걸려 있는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이라는 주련 글씨. ‘가장 좋은 반찬은 두부와 오이, 나물이요, 가장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들의 모임이라.’라는 뜻으로 71세의 추사가 깨달은 인생의 소박한 철학을 느끼게 한다. 사랑채에는 추사의 대표적인 작품인 ‘세한도(국보 제180호)’의 복사본이 걸려 있다.
추사고택 주변에는 추사 선생의 묘와 추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과 증조모 화순옹주의 합장 묘, 화순옹주의 열녀정문이 자리하는데 그중에서도 추사고택에서 월성위묘 방향으로 500미터쯤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백송은 이곳을 찾은 이들의 시선을 끈다. 수령 200년의 백송은 이름 그대로 흰 소나무로, 추사 선생이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에 갔다가 씨를 가져와 심은 것이라고. 천연기념물 제106호로 지정되어 있다.
예산여행의 마무리는 호젓한 호숫가로의 산책이 어떨까? 내포의 젖줄이라 불리는 예당저수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저수지로 무한천과 신양천에서 흘러들어오는 풍부한 먹이로 전국 최고의 붕어 낚시터로 소문난 곳이다. 붕어 외에도 잉어, 뱀장어, 미꾸라지 등 민물고기 낚시를 사시사철 즐길 수 있어 주말이면 낚시꾼으로 가득하다. 이곳은 일제 강점기 때 조선농지개발 사업의 하나로 세워졌다가 1964년에 다시 축조했는데 그 면적이 9.9제곱킬로미터로 여의도의 3.7배에 달한다고 한다.
바다와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드넓은 저수지와 저수지를 감싼 산세, 호수 주변의 나무, 그리고 물 위에 떠 있는 좌대에 앉아 고기잡이에 한창인 강태공들이 만들어내는 한 폭의 그림을 한눈에 보려면 예당저수지 북쪽 가장자리에 조성된 예당관광지의 팔각정이 제격이다. 절벽 위에 자리한 팔각정은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며 주변으로는 국내 유수 조각가들의 작품이 전시된 예당호조각공원과 야외음악당, 어린이 놀이터, 잔디광장 등이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늦은 오후, 만약 하루의 여유가 더 있다면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1.5킬로미터 길이의 산책로를 따라 저수지 주변을 거닐어보자. 해가 질 무렵에는 바다와는 또 다른 일몰의 장관을, 고요한 새벽녘에는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환상적인 풍경을 자연으로부터 선물 받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Travel Info
가는 길 경부·호남 고속도로를 이용할 경우 천안 IC에서 빠져 21번 국도를 타고 온양온천과 도고온천을 지나면 예산에 도착한다. 서해안고속도로를 이용할 경우에는 해미 IC로 나와 45번 국도를 타고 예산방면으로 가면 된다. 
잠잘 곳  팬션 ‘예당 반올림’은 예당저수지를 바라보는 작은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어 자연의 풍요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아침에는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호숫가의 전경을, 저녁에는 쏟아지는 별빛 아래 고요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이곳은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팬션 단지의 부대시설과 깔끔한 객실 인테리어가 호숫가에 마련된 작은 별장에 온 듯한 편안함을 선사한다. 객실은 복층형의 커플룸과 가족룸, 2층 단독별장 형태의 스위트룸 등 총 6개로 복층형 객실에는 온돌방과 침실대용 매트리스가 마련된 다락방이, 단독별장에는 1층과 2층에 각각 침실룸이 마련되어 있다. 또한 모든 객실에 취사시설과 TV, 냉장고, 에어컨, 식탁 등이 갖춰져 있으며 각 객실의 테라스에는 피크닉 테이블이 있어 아침저녁으로 따뜻한 차 한잔과 함께 호숫가의 정취를 느끼기에 좋다. 바비큐 파티를 열 수 있는 야외 테라스와 봄이면 화사함을 느낄 수 있는 배나무 과수원, 직접 가꾸는 채소밭, 그림 속에나 나올듯한 예쁜 목조 그네도 빠트릴 수 없는 이곳의 자랑. 가격은 비수기 주중에는 10만 원부터 21만 원, 주말과 공휴일 전날에는 12만 원부터 24만 원, 성수기에는 13만 원부터 25만 원까지다.
주소 충청남도 예산군 응봉면 신리 205-1번지
문의 041-333-3009, www.e-yed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