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am

좌충우돌 패밀리의 첫 번째 가족여행
성격이 제 각기여서 한데 뭉치기 어려운 우리 가족이 드디어 올해 ‘가족 여행’이란 것을 다녀왔다. 순탄한 여행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나고 보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처음엔 태국 카오산 거리를 동경하며 꼼꼼히 일정을 짰지만 예약해둔 항공이 결항되는 바람에 두 번째로 선택한 곳이 바로 괌이었다.

김포공항에서 환승한 공항행 열차는 약 30분 후, 세계 공항 대회에서 당당히 3위를 기록한 인천공항에 우리 가족을 떨어뜨려 주었다. 일 년에 두세 번 올까 말까한 인천 공항이건만 내 집처럼 반갑고 편안하다.

드디어, 가족여행을 떠났다
가족 다섯에 사위 1명. 도합 6명이 여행을 가기 위해 필요한 돈은 7백만 원이 넘었다. 석 달 치 월급을 훌쩍 넘기는 어마어마한 금액이건만 이중 오백이 넘는 돈을 모친인 김 여사께서 떡하니 내 놓으셨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도 당신의 환갑여행을 위해 들어두었던 적금을 깨셨다는 김 여사의 가족애에 지금도 가슴이 뭉클하다.
4시간을 날아 괌 아가나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2시 경. 온 세상 사람들의 피곤함이 나에게 몰려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눈꺼풀이 자꾸 감겼다. 얼굴엔 기름이 번들번들, 머리카락은 굵은 웨이브를 말아 올린 것처럼 뭉쳐있는 상태로, 별 다섯 개짜리 호텔로비에서 펄쩍펄쩍 뛰어 다니기까지 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그 순간 정신 줄을 살짝 놨던 게 분명하다.
우리가 3일 동안 묵게 될 방은 5층이었다. 나(미래소녀)와 서방(호빵맨)은 549호. 동생(고릴라)과 아빠(원조 배사장)은 550호. 엄마(김 여사)와 언니(배사장)는 551호. 모두 별 문제없이 입실했는데, 나만 문을 열지 못하고 끙끙댔다. 이상하다 싶어 문짝과 실랑이를 벌이는데, 갑자기 스르륵 문이 열렸다.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는데 방 안에서 “당신은 누구?”란 표정으로 외국인이 빠끔 고개를 내민다. 이런. 남의 방문 앞에서 또 혼자 ‘생쇼’를 했구나. 나 때문에 잠에서 깬 아줌마 앞에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정말이지 혼쭐이 났다.

뜨거운 남태평양의 태양
다음날 아침 괌 정부 관광청에서 배포한 가이드북을 보고 예약한 ‘마린팩’에 참여하기 위해 코코스 라군에 위치한 비키니 아일랜드로 향했다. 비키니 해변으로 가던 중 우마탁 마을을 지나 석회암으로 만들어진 고풍스런 솔래다드 요새에 잠시 들렀다. 괌 섬에 접근하는 선박들을 감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이곳은, 19세기 초 4개의 요새 중 본래의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
예전에 팔라우에서 1도 화상을 입은 적이 있어서, 예방책으로 래쉬카드를 준비했건만, 햇빛을 반사하지 않고 100% 흡수해 버리는 바람에 나와 호빵맨은 찜통에 찐 감자처럼 푹푹 익어가고 있었다.
솔래다드 요새를 뒤로 하고 최종 목적지인 비키니 해변에 도착했다. 스노클링, 카누, 바나나보트, 제트스키, 돌고래 워칭, 바비큐 점심이 포함된 마린팩은 다소 실망스러웠지만 스노클링을 처음 해보신 ‘원조 배사장’께선 지칠 줄 모르는 뱃심으로 바다 속을 휘젓고 돌아다니셨다.
우리는 제트 스키를 탔는데, 태국 파타야에서 탔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스릴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파타야에선 안전원이 운전을 했지만 이곳에선 내가 직접 핸들을 잡았기 때문이다. 당기는 대로 속도가 나고, 핸들을 돌리는 대로 휙휙 잘도 움직이니 신이 날 수밖에.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운전이라면 질색하는 호빵맨을 뒤에 태우고 액셀러레이터를 당겼다. 물귀신이 될 뻔했던 위기의 순간도 있었지만 눈썹을 휘날리며 질주하던 쾌감은 잊을 수가 없다.
오후엔 돌고래 스핀을 보기로 되어 있었지만 돌고래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아 허탕을 치고 돌아왔다. 물이 싫어 다른 것은 하나도 하지 않고 오로지 돌고래만 기다린 김 여사의 얼굴엔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호텔로 돌아와 잠깐 수영을 하고, 저녁을 먹으러 시내의 중국식당에 갔다. 김여사께선 몸매유지를 위해 저녁을 거르셨고, 육중한 체격을 유지해야 하는 원조 배사장께선 소고기를 외쳐대셨다. 결국 면요리, 새우, 고기, 치킨, 오징어 등 다양한 음식을 뻑적지근하게 주문했다. 배고픔에 눈이 멀어 정신없이 퍼 먹는 동안 체면 좀 차리고 먹어라, 어쩜 음식 앞에선 이성이 날아가 버리냐는 둥 사방에서 잔소리가 쏟아져 나왔지만, 나는 꿋꿋하게 젓가락질을 했다. 저녁 식사 후 든든한 배를 받쳐 들고 간식을 사러 마트에 갔다. 한국 마트에서는 19,800원에 십 원 하나 할인 되지 않는 칠레산 깔리나가 그곳에선 9,800원이었다. 한 박스 쯤 사오고 싶었지만 여행 내내 술만 퍼마시게 될까봐 1병만 사기로 했다. 이미 캄캄해진 외진 밤거리에서 누가 통째로 잡아가 새우잡이 배에 넘기진 않을까 싶어 우리 가족 6명은 똘똘 뭉쳐 호텔까지 뛰듯 걸었다. 551호에 작은 탁자를 놓고 둘러앉아 그날의 피로를 한잔 술로 달랜 후,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를 자장가 삼아 여행의 추억을 되새기며 잠이 들었다.

과거로의 시간 여행
아침으로 ‘낫또’를 무려 3개나 해치운 후, 미리 예약해 둔 렌트카를 빌려 슬픈 연인의 전설을 담고 있는 ‘사랑의 절벽’을 찾아 갔다. 스페인 통치 시절 스페인 장교와 강제로 결혼할 처지에 놓인 차모로 여인은 그녀가 이미 사랑하고 있던 차모로 남자와 도망을 치다 사랑의 절벽에 이르게 됐는데, 더 이상 갈 곳이 없던 연인은 서로의 머리카락을 묶고 100미터 높이의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고 한다.
더워를 타시는 원조 배사장과 김여사께 아이스크림을 사 드리고, 남부지역으로 향했다. 정말이지 도로 표지판의 불친절함은 신경을 건드린다. 여행 준비와 장소 선택은 미리 해 두었지만 정확한 위치까지는 알 도리가 없던 나는 외국에서의 운전이 처음인 고릴라군의 예민해진 신경을 살피며 애꿎은 지도와 안내책자만 뒤적였다. 남부지역에서 제일 처음 만난 것은 ‘메리조 종탑’이었다. 남부 방향으로 1번 도로를 타고 가다보면 길 한편에 외로이 서 있는데 ‘캄파나얀 말레소’라고도 불리는 이 탑은 1910년 크리스토발 데 카날스 신부에 의해 세워졌다고 한다. 나무로 만들어진 종탑 꼭대기에 들어있는 종은 지금도 소리를 낼 수 있다고 한다.
이어 1680년부터 개발이 시작됐다는 이나라한 마을에 들렀다. 이 마을 최고의 명소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해수수영장이다.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땀이 흘러내려 당장이라도 물속으로 뛰어들고 싶었지만 날카로운 현무암들이 산재해 있어 꾹 참아야 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요코이 동굴이었다. 태평양 전쟁 때 당시 일본군 병장이었던 요코이가 정글에 숨어들어 대나무 숲 아래 굴을 파고 도피 생활을 했던 곳인데, 그는 1972년 괌 주민에 의해 발견되기까지 이곳에서 무려 28년이나 살았다고 한다.
해는 뉘엿뉘엿 져서 사방에 어둠이 찾아왔다. 피시 아이 민속 디너쇼를 보기위해 레스토랑으로 이동했다. 메뉴는 해산물 뷔페였는데, 우리 식구가 앉은 테이블만 유독 태풍이 훑고 지나간 듯한 풍경을 연출했다. 식사를 마치고 약 1시간 뒤에 민속 쇼가 시작되었다. 현지 쇼걸의 밸리 춤에 홀딱 반한 나는 그 유연성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슬금슬금 엉덩이를 돌려가며 따라해 보았으나 그녀들에 비해 둔탁한 나의 허리는 끝내 두 바퀴이상 돌아가지 않았다. 허리를 부여잡고 ‘와우, 언니 대단해요!’ 탄성을 연발하며 슬픈 눈망울로 그들의 향연을 지켜보았다.

여행은 늘 그렇듯
마지막 날은 휴식 겸 쇼핑을 위한 날로 가족 모두 시내에 위치한 갤러리아 DFC 면세점에 들렸다. 1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명품병’에 걸린 미래소녀는 생일날 받은 축하금을 고이 모아 신상 선글라스를 구입했다. 원조 배사장께선 탐탁잖아 하셨지만, 호빵맨은 그래도 그 많은 명품 중에 유독 선글라스에만 관심이 있어 하는데 감사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더랬다. 여행 끝자락이다 보니 남은 공금이 얼마 되지 않아 점심은 맥도날드 햄버거로 해결했다. 명품 선글라스를 쓰고 몇 천 원짜리 햄버거를 먹는 기분이 참 묘했다.
갤러리아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셔틀 버스를 타고 호텔로 돌아와 선셋 크루즈를 하기 위해 현지 여행사 픽업 서비스를 기다리던 중 갑자기 비가 억수같이 내리기 시작했다. 흔히 볼 수 있는 스콜 현상이라곤 하지만 특별한 이벤트를 기대한 우리에겐 반갑지 않은 손님이었다. 과연 선셋을 볼 수 있을까. 의구심을 품고 출발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쨍하니 햇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비가 내린 후라서 예쁜 무지개를 덤으로 볼 수 있었지만, 아쉽게도 타는 듯 붉은 석양은 볼 수 없었다. 마지막 댄스 타임. 배사장님께선 특유의 쇼맨십으로 좌중을 웃겨주셨고, 우리 부부는 신혼 여행인양 속여 키스타임 후 공짜 칵테일을 마셨다. 싱어와 쇼걸들을 따라 흥겹게 춤을 추는 엄마를 보니 짠한 무언가가 마음을 흔들었다.
저녁인데도 후텁지근한 날씨는 계속되어 호텔로 돌아와 저녁 수영을 즐겼다. 물이 무서워 피하던 엄마도 그 며칠 동안 수영장의 매력에 빠지셨는지 함께 물장구를 즐기셨다. 성큼 어둠이 찾아와 더 이상 수영은 할 수 없었지만, 별 다섯 개짜리 호텔 수영장에서 바다와 하늘을 보며 낭만적인 시간을 보내는 동안만큼은 백만장자가 부럽지 않았다.
새벽 비행기를 타자마자 쓰러져 자다가 조식을 준다는소리에 귀가 번쩍 뜨여 일어났다. 꾸역꾸역 녹차 죽을 텅 빈 위 속에 쑤셔 넣고 나니 비로소 실감이 났다. 여행이 끝났구나. 협동심은 다소 부족하지만 개성만큼은 누구보다 뚜렷한 우리 가족의 첫 번째 여행은 이렇게 끝이 났다. 여전히 여행의 진한 여운에 사로잡혀있는 지금, 벌써부터 두 번째 가족 여행이 기다려진다. (박선영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