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kyo
서반장의 도쿄여행

이외수의 생존법 ‘하악하악’의 첫 페이지를 열면 이런 문구가 나온다. ‘자기가 마음대로 돈을 그려서 무제한으로 쓸 수 있는 시대가 온다면 그대가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은?’ 나는 1번도 여행, 2번도 여행, 3번도 여행이다.
일에 쫓기는 직장인으로 살다 보니 여행을 한번 떠나는 것도 쉽지 않다. 하지만 부족한 시간을 쪼개 떠나는 여행은 비교적 시간이 여유롭고 자유로운 학생 때와는 달리 달콤한 무언가가 있다. 일년을 살면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꼽으라면 바로 휴가 기간이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이번 휴가도 가장 행복한 시간이 될 수 있을까?
이번에는 가깝고도 먼 나라인 일본으로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일본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곳에 대한 호기심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높아지는 유가와 환율 때문에 여행 경비에 대한 고민도 꽤나 많이 했다. 대략 예산을 뽑아보니 애지중지하는 자전거에 최고급 바퀴를 달아줄 수 있는 정도의 비용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만화의 나라이고, 자전거의 천국인 일본에 대한 궁금증을 더 이상 막을 수 없어 약간의 걱정과 호기심을 안고 도쿄 여행을 시작했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JAL 항공기에 올라서자마자 일본어의 물결이 넘실댄다. 여기저기서 들리기 시작하는 일본어에 지난 3개월간 열심히 갈고 닦은 일본어 실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귀를 쫑긋 세웠다. 역시나 모두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간간히 아는 단어들이 귀에 쏙쏙 들어오니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사실 이때부터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던 것 같다. 짧은 비행 시간에도 불구하고, 왠지 아주 먼 나라에 도달한 느낌이 든다.
나리타 공항에 도착한 것은 오전 11시 45분. 도착하자마자 리무진 버스표를 사면서 본격적으로 그동안 갈고 닦은 일본어 실력 테스트에 나섰다. 버스표 판매원의 질문에 짧은 한마디를 대답하고 나니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사실 공부를 하면서도 과연 일본에 가서 한마디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감격적인 일본어 실습을 마치고 자신감을 충전해 공항을 나섰다. 한자로 도배된 리무진 버스가 도착하고, 버스로 90분여를 달려 드디어 신주쿠에 도착했다. 일본의 첫 인상은 한마디로 작고, 깨끗하고, 조용했다. 차도 작고, 길도 좁고, 주변은 항상 청소를 한 듯 깨끗하다. 게다가 지하철이고 기차고, 버스 안이며 심지어 거리까지 숨소리를 내는 것조차 조심해야 할 정도로 조용하다. 잔뜩 찌푸린 회색 하늘 아래 건물이 늘어선 스산한 도시를 지나는 사이 시간은 어느덧 오후가 되었다.

상상 이상의 즐거움, 료칸 체험
길지 않은 비행 시간이었지만 나리타공항에 내리자마자 리무진 버스를 타고, 또 JR 오타큐선으로 두 시간 정도를 이동하니 조금은 지치기 시작했다. 몸과 마음이 지쳐갈 무렵 하코네 유모타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가지고 간 초코바로 끼니를 대충 때우고 또 다시 버스를 타고 굽이굽이 높은 산을 올랐다. 오후 5시쯤이나 돼서야 첫 번째 숙박 장소인 료칸에 도착한 것이다. 소문대로 료칸의 안주인인 오카미상이 뛰어나와 인사를 하고, 짐도 받아줬다. 개인 온천이 딸린 료칸에 짐을 풀고 잽싸게 유카타로 갈아입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내게 료칸 종업원이 ‘카와이~’라는 칭찬을 해줘 어깨를 으쓱하며, 본격적인 도쿄 즐기기를 시작했다.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에 입구부터 감탄을 금치 못하고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것은 당연한 일. 더구나 배고픈 여행자의 허기를 채워주는 따뜻한 차와 떡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연신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저녁 6시부터 그 유명한 료칸식 식사가 시작되었다. 소식(小食)한다고 알려진 일본의 전통식사는 예상 외로 푸짐하고 든든했다. 료칸에서 제공된 음식은 입에 맞을까 하는 걱정이 무색할 만큼 맛있었다. 두툼한 스시와 쇠고기 샤브샤브, 생선구이와 사케는 달콤했고 작은 소품처럼 예쁜 음식이 많았다. 배를 든든히 채우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온천욕을 시작했다. 개인 온천이 마련된 방에서 아주 느긋하고 즐겁게, 온천에 몸을 담그고 여행하느라 지친 몸의 피로를 풀어주었다. 온천수가 수도꼭지 틀어 놓은 듯 하루 종일 계속 나오는데 뜨끈뜨끈한 게 일반 목욕탕의 뜨거운 물과는 차원이 달랐다. 온천에 몸을 너무 오래 담갔는지, 말랑말랑해진 기분으로 저녁 9시도 되지 않아 달콤한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정말 피곤했나보다. 평소에는 꿈도 꿀 수 없을 정도로 이른 아침 5시 20분에 잠에서 깼는데, 어찌나 개운하고 기분 좋던지. 아~ 이곳이 천국이구나!

작은 것도 아름답게
이번 일본여행의 콘셉트는 두 가지였다. 도쿄의 패션과 자전거.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된 둘째 날, 우리 부부는 목적지인 도쿄에 입성했다. 신주쿠 도큐 핸즈는 쇼핑 첫날의 내 가슴에 불을 질렀다. 천장에 빽빽이 걸린 자전거가 마음을 설레게 했다. ‘찜’ 했던 물건을 잔뜩 벼르고 별러 드디어 시부야 도큐 핸즈에서 구입한 것이다. 클래식 그 자체인 구형 머리보호대와 -그것도 프랑스 국기 컬러, 라지 사이즈- 사이클링 캡도 장만했다. 수많은 종류의 메신저 백과 자전거 의류를 또 한번 목격했을 때는 그동안 강림했던 ‘지름신’을 돌려 보내려 인내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꼭 고급 브랜드가 아니더라도 저렴하고 예쁜 물건들이 많아 친구들에게 줄 선물은 물론 그동안 갖고 싶지만 구입을 별러 왔던 물건을 잔뜩 들고 나왔다. 우리 부부 옆에 있던 건장한 백인 아저씨들은 연신 “굿~!”을 외치며 여행용품들을 마구 사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우리 부부도 이 곳에서 친구들의 선물도 사고 평소 갖고 싶었던 가방도 샀다.
처음에는 걷는 것이 힘들게 느껴졌던 하라주쿠 거리에 정이 드는 것인지 이제 힘들기 보다는 좋게만 느껴진다.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명품 숍이 길 양편에 줄지어 있고, 울창한 나무가 거리에 그늘을 드리워놓아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시원하고 상쾌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이 사는 모양새는 비슷한 것 같다. ‘왜색이 짙어졌다’는 어른들의 지적처럼 우리 패션이 일본의 그것을 많이 따라 갔기 때문일까. 외모만 봐서는 이곳이 서울인지 도쿄인지 구분이 전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옷차림만 패션이라는 생각을 접어두면, 다른 점도 꽤 많다. 작고 예쁜 자동차들, 작고 예쁜 집들, 특히 좁은 도로와 공간에서 자기의 공간을 지키면서 다른 사람의 공간을 침범하는 것을 조심스러워하고, 서로 존중하는 모습들. 그들의 모습을 보니 약간의 아이러니를 느끼기는 했지만 자신의 공간을 누리며, 공공장소에서 조용함을 지키는 일본인들이 조금씩 이해가 되어갔다.
도쿄의 거리를 걷다가 공사장 주변에서 원뿔 모양의 표지판을 발견했다. 밝은 형광색으로 꾸며놓은 그것은 패션 소품으로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문득 일본의 힘은 그 원뿔 표지판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작고 눈길이 잘 가지도 않는 조그마한 소품마저 아름답지 않은 것을 참지 못하는 것. 그 작은 발견이 오늘날 디자인 강국 일본을 만들었다는 부러움과 그 감각을 따라잡고 싶다는 목표의식이 생겼다. 아마도 이번 여행에서 얻은 가장 큰 교훈이었다. 3박 4일간의 도쿄 여행.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현실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내내 아쉽기만 했다. 다시 한번 이곳을 찾을 훗날을 기약해 보며, 굿바이 도쿄. (서은선 경기 안양 동안 관양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