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ring in Jeju Island
제주와 그녀와 올레 이야기

꼭 10년 만이었다. 제주를 다시 찾은 것은. 여전히 푸른 바다에 청명한 공기, 그리고 유채의 노란 물결. 아무 것도 변한 게 없는 듯싶었다. 하지만, 시간의 원근이 멈춘 듯한 제주가 멈춘 것은 아니었다. 단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조금씩 움직이고 있을 뿐. 바람이 불 때마다 벚나무는 꽃잎을 떨어냈고, 유채꽃 옆에서는 꿀벌이 위협적으로 붕붕 소리를 내며 날고 있었다. 그런 제주에서 나고 자라, 다시 제주로 돌아온 양의숙 씨와 하루를 함께하기로 했다. 정체한 듯 꿈틀대는 제주의 봄날 하루를 온전히.

모 아니면 도. 이거 아니면 저거라는 식의 흑백논리는 그리 환영받지 못 하지만, 가끔은 그렇게 꼭 맞아 떨어지는 이분법이 필요할 때가 있다. 양의숙 씨는 그렇게 나누는 것이 업이었다. 그것도 좀 극단적으로, 진짜 아니면 가짜. 우리나라 최초의, 그리고 유일하게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TV 프로그램의 감정위원이라는 타이틀이 그녀를 수식했던 지난 13년여 동안, 그녀는 많은 것을 분류했다. 이 소반은 이제 60여년 된 가구, 박쥐 문양이 장식된 저 손때 묻은 반닫이는 300년도 더 묵은 진품. 이런 식이다. 우리가 흔히 골동품이라 부르는, 고미술품의 가치를 재조명해 그 진가를 밝히는 것이 그녀의 몫이었다. 누군가 오랜 시간 애지중지 해왔을 그 ‘골동품’은 그녀의 눈빛과 판단에 따라 한 순간에 정말 골동품으로, 혹은 가짜로 신분이 결정되었다.
13년의 세월은 그리 짧지 않았다. 프로그램 제작진과 진행자는 바뀌었어도 13년간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는 사람은 양의숙 씨 하나뿐이었다. 물론, 그 세월이 지탱된 것은 이분법에 대한 정확한 기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고미술품 전문 화랑 ‘예나르’의 대표로 일하며 시대와 장르를 초월한 많은 진품과 가짜들을 그녀의 안목과 손길을 거쳐 보냈다. 대학원에서 목공예를 전공하며, 제주도 반닫이를 중심으로 목공예 장식 변천사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던 때만 해도 짐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인연이 닿은 고미술품을 평생 곁에 두고, 또 보고 살아가게 될 줄은. 그리고 그 인연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떠나온 고향, 제주도와의 인연 역시 굳건하게 지탱시켜 주리란 것을.

Scene # 1 저지예술마을  그녀는 다시 제주로 돌아왔다. 뭍의 대학으로 진학한 후 아예 발길을 끊었던 것도 아니고, 생활의 기반이자 터전인 서울을 완전히 등졌다는 얘기는 더욱 아니다. 제주도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한국의 최고 휴양지이지만 제주에서도 산간 오지로 꼽혔던 한림읍 저지리에 편히 쉬다 갈 수 있는 터를 마련했다는 소리다.
봄을 지나 제법 여름 흉내를 내는 햇살이 따뜻하던 오후였다. 온통 초록빛이 가득한 들판과 강렬한 소똥 냄새가 공기를 뒤덮던 목장지대를 지나 차바퀴가 구를 때 마다 먼지가 함께 날릴 때 쯤, 저지리 예술마을에 닿았다. 파주 헤이리나 서울의 대학로를 잇는 제주도의 문화특구로 키워보고자 제주시에서 지원하는 문화예술인촌이다. 제주도에서 나고 소녀시절을 보낸 양의숙 씨는 이미 마을이 건설되던 초반에 일찌감치 입촌했고, 김흥수 화백, 박서보 선생, 가수 양희은 씨, 국악인 안숙선 씨, 방송작가 최완규 씨 등이 마을에 터를 잡았다. 사람과 도심을 피해 저지리로 날아온 이들은 제주의 숲에 안착했고, 컨테이너 박스처럼 네모반듯하게 지어진 화이트의 단층 건물과 열대림 속 통나무집을 본 딴 2층짜리 나무집 등 다양한 형태의 집들이 숲 속에 군데군데 숨어 있었다.
저지리에 머무는 시간만큼은 그녀는 편하다했다. 거의 매주 방송 스케줄이 잡혀 있고, 출장감정차 여러 지방을 방문해야 하며 이런저런 미팅 스케줄에 휴대폰은 잠시도 쉬지 않고 울려대지만 저지에서 맞는 아침은 유난히 개운하다 했다. 이 섬에서 태어났고, 유년의 추억이 깃든 곳이 또 이 섬이지만 그게 이유의 다는 아닌 듯싶었다. 평생을 우리 고미술품과 함께 했고, 손때 묻고 애착가는 작품들을 모아 작은 미술관을 열어보면 어떨까 싶던 참에 저지예술마을과 연이 닿았다. 마을에 유일하게 한 채 서 있는 한옥이 그녀의 공간이다. 용암이 흘러내려 움푹 팬 땅에 키 낮은 나무와 덩굴식물이 어우러지는 곶자왈 지대가 한옥 앞마당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뜰로 통하는 문을 열어 두면 제법 바람이 설렁대는 한옥 내부에는 여백이 풍부하다. 문외한인 기자의 눈에도 반질반질 고운 손때가 앉은 작은 반닫이 하나가 방 한편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아이들을 키울 때 기저귀를 보관하던 용도로 쓴 가구라는데, 가로로 넓은 반원형의 손잡이 아래에 박쥐 문양의 주물로 장식된 것이 제주 반닫이의 특징이라 했던가. 돌과 흙이 8대 2의 비율을 이루는 곶자왈 지역인 저지리 일대는 토양이 척박해선지 나무가 강하고 옹골차게 자란다. 이런 나무로 만들어진 제주 반닫이가 그 특별한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당연한 일. 진짜 고미술품을 가려낼 줄 아는 특별한 능력도 이 반닫이와의 인연으로 시작된 셈이니, 그녀에게는 그저 값비싼 골동품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갓 쪄낸 제주 오메기떡을 내온 양의숙 씨가 몇 십 년은 족히 묵었음직한 작은 소반을 펼쳤다. 인터뷰든 취재중이든 직접 쪄낸 떡을 대접받기는 처음이다. 찰진 오메기떡을 씹고 있으려니, 별채의 처마 끝에서부터 제주의 봄바람이 불어왔다.

Scene # 2 올레길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던 오후, 올레길에 올랐다. ‘산티아노 가는 길’을 통과한 서명숙 씨가 닦은 한국의 카미노이다. 수많은 고민과 부담, 일상의 무게를 덜고 싶은 이들이 찾는다는 그 순례길을 소개하는 다큐와 책자를 보며, 굳이 저 길을 걸을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을 했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의 시골마을까지 가는 길이 우리가 사는 인생과 그리 다를 바 없다 싶어서. 끝이 없을 듯 지루하게 이어지는 800킬로미터의 길 위에서는 일상과 비슷한 일들이 일어난다.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고, 누군가와는 끝까지 함께 걷기도 한다. 내가 먼저 출발했지만 뒤따르던 이가 먼저 도착할 수도, 앞서가던 누군가가 쉬는 동안 내가 뛰어 그의 앞을 지나칠 수도 있다.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그 길도, 어느 순간엔가 몇 일간의 격차를 두고 결국 종착점에 다다르게 된다는 것 역시 그리 다르지 않다.
한국판 카미노인 올레길은 제주도 외곽을 에둘러 길을 내어, 걸어서 제주 일주가 가능하면 비로소 완성된다. 아직 열 두 코스가 완성되었을 뿐이지만 이미 많은 이들이 이 길을 걷고 있다. 양의숙 씨와 취재팀이 도착한 곳은 7번 코스와 8번 코스가 교차되는 월평포구 인근. 서울과는 확연히 식생이 다른 들판에서 자라나는 들풀에도 반갑게 반응하는 그녀는 이 길과 잘 어울렸다. 10년을 넘는 시간동안 변함없이 TV속 화면을 지켜왔지만 올레의 코스가 교차하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들판에서 더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그녀를 보며 올레의 또 다른 가능성을 생각했다. 마음의 짐을 벗기 위해 산티아고로 향하는 사람들이 올레를 걷는다면, 희망에의 시너지까지 얻지 않을까 싶은. 산티아고의 종착지가 막다른 지점이라면, 둥근 제주를 연결하는 올레의 종착지는 동시에 그 출발점이기도 하니까. 되돌아갈 수도, 또 얼마든지 같은 코스의 반복이 가능한 원의 시작이다.
떠나갔지만 돌아와도 어색하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의 시작이 가능한 제주와 그녀의 관계처럼, ‘올레’를 구성하는 그 길은 둥글게 이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