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gapore
완벽했던 선택, 싱가포르

지난 겨울은 내게 여러 가지로 힘든 시기였다. 이럴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였다. 막상 떠나려고 생각하니 여러 가지가 발목을 잡았다. 남편은? 어린 아들은? 그러나 다행히도 남편과 어린 아들은 내 마음을 알았는지 선뜻 허락을 해주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많은 배려도 아끼지 않았다. 꿈이 현실이 되는 건 정말 순식간이었다.

결혼 9년차. 가족이 아닌 친구와의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남편과 아들의 눈높이가 아닌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볼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됐다. 그래서 여행지 선택에 신중을 기했다. 여자들이 좋아할 도시, 밤늦게까지 다녀도 안전한 도시, 오감을 만족시킬 도시, 다양한 문화가 어우러져 있는 도시 등 고려해야 할 사항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러나 답은 하나였다. 그래 싱가포르다..

준비만으로도 즐거워  여행의 즐거움 중 반은 준비에 있다고들 한다. 나 역시 그런 즐거움을 충분히 누렸다. 여행지가 정해지자 가이드 북을 탐독하고 블로그 서핑을 통해 정보를 모으고, 여행 동호회에 가입해 궁금증을 풀며 약 한 달간의 준비 기간이 흘렀다. 어느 때보다도 준비를 많이 했던 것 같다. 사실 친구를 부추겨 가는 여행이라 약간의 책임감이 따랐기 때문이다. “나만 믿으라.”며 호언장담을 했으니 서로가 만족하는 여행이 되길 진심으로 바랐다.
이번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은 태양이 가득한 따스한 곳에서 겨우내 움츠렸던 몸과 마음을 쫙 펴고 오는 것.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뽀송뽀송해진 기분으로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그리고 가장 보고 싶은 것은 이슬람 사원인 술탄 모스크였다. 많은 곳을 여행했다고 생각했는데 모스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 그만큼 치우친 여행을 했던 것 같다. 어느 블로그에서 술탄 모스크의 사진을 보는 순간 정말 그 앞에 서고 싶었다. 직접 눈으로 보고 이색적인 분위기를 몸소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모두 즐기는 ‘자유’를 찾고 싶었다. 무엇을 특별히 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소박한 휴식을 원했을 뿐.
결혼 후 지금까지의 여행은 아들의 눈높이에 맞춘다고 동물원, 바닷가, 테마파크에서 시간을 보냈었다. 여행 가서도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갖기란 쉽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만은 달랐다. 특별한 걸 사지는 않더라도 쇼핑도 실컷 하고 아이 뒤치다꺼리에 신경 쓰지 않고 내가 하고픈 것만 할 시간을 가졌다.
물론 친구와 하는 여행이라 여러 가지 일정을 맞추고 의견도 조정해야 했지만 마음이 잘 맞는 친구라 그런지 서로가 생각했던 일정이 비슷했다. 친한 친구와 여행가면 의가 상한다고들 했지만 그런 통속을 깨고 너무나 편하게 다녀왔다. 혼자 갔으면 완벽한 자유가 주어졌을지 몰라도 많이 쓸쓸했을 것 같다. 완벽한 자유는 혼자라고 더 많이 주어지는 것은 아닌가 보다. 여행 일정 내내 나는 충분히 자유로웠으니까.

완벽한 선택, 싱가포르  기나긴 기다림 끝에 2월말 드디어 여행을 떠났다. 일정은 우리가 꼭 보고 싶은 곳으로만 정했다. 싱가포르 여행을 간다고 하자 지인들은 “어디는 꼭 가봐라.” “뭐는 꼭 먹어봐라.” “어떤 것은 꼭 해라.” 등 싱가포르 하면 필수로 따라 붙는 항목들을 추천해 주었다. 추천은 고마웠지만 우리만의 여행을 하기로 마음 먹었기에 나만의 색으로 이번 여행을 물들일 작정이었다.
창이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느껴지는 후끈함이 신기하게도 좋았다. 사람이 어찌 이리도 간사하단 말인가! 추위에 지쳐 있었다고는 하나 내가 여름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아무튼 도착하는 순간부터 싱가포르가 맘에 들기 시작했다.
첫 일정은 센토사에서 시작했다. 마침 소나기가 내려 걱정도 했지만 호텔 체크인을 하고 길을 나서는 순간 비는 말끔히 그치고 기온이 내려가 상쾌했다. 모든 게 이 여행을 도와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센토사는 여행자에게 많은 즐거움을 주는 곳이다. 모노레일도 맘껏 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센토사 내에 있는 비치 트레인, 버스도 무제한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다. 실로소 비치로 가기 위해 비치트레인 뒷좌석에 앉았다. 시원스레 달리는 두 칸짜리 비치트레인에서 비 온 뒤 불어오는 시원한 바닷바람에 절로 행복이 묻어 나왔다. 그때 처음 ‘행복하다’라는 말이 스스럼 없이 입 밖으로 나왔다. 참 신기했다. 아무것도 아닌 바람에게서도 행복을 느끼게 되다니. 난 이미 행복을 느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실로소 비치에서 저녁을 배불리 먹고 팔라완 비치에서 현수교를 건너 아시아 대륙 최남단으로 향했다. 어두워서 오래 머물진 못했지만 아시아 대륙 최남단에 와있다는 게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싱가포르의 상징인 거대한 멀라이언 동상보다는 뒤편에 위치해 있는 멀라이언 워크에 색색의 예쁜 타일로 만들어진 곳이 더 인상적이었다. 유럽 여행을 할 때 가보지 못해 후회했던 스페인의 구엘 공원이 연상되어 다소 위안이 되었다. 원래 유명한 곳은 사진이나 영상 매체로 너무 많이 접해서인지 막상 보면 큰 감흥이 없다. 그래 이거였지 정도로 기념사진을 찍게 될 뿐 기억 속에 오래 남는 곳은 의외의 장소에서 찾게 된다. 센토사에서도 역시 그랬다. 유명한 상징물보다는 공간에서 연출되는 작은 길과 계단, 나무 등 의외로 사소한 것에서 감탄을 연발했으니 말이다.
첫날 일정의 마지막은 클락키에서 보냈다. 워낙 입소문이 많이 난 곳이라 궁금했었는데 과연 듣던 대로였다. 우선 공기부터 달랐다. 시원스레 불어오는 바람, 삼삼오오 앉아서 얘기를 나누는 연인들, 작은 바에 앉아 그 날의 여행을 되새기는 여행자들, 리버 보트에서 은은히 흘러나오는 붉은 불빛, 노천 식당에서 쏟아져 나오는 웃음소리 이 모든 게 하나 되어 나를 흥분케 했다. 여행자들에겐 흘러가는 한순간 조차 아까워, 하나라도 더 보고 느끼고 싶은 마음에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카메라에 담고 눈과 맘에 담으려고 애썼다. 이렇게 하루가 마무리되어 갔다.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배터리를 가득 충천해 내일을 기약했다.

하나되는 곳, 싱가포르 싱가포르에서는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다. 그렇게도 가보기를 소원했던 이슬람 사원, 술탄 모스크도 보았고, 인도 거리에서는 힌두교 사원, 차이나타운에서는 중국식 사원도 보았다. 물론 교회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가 지역을 따지지 않고 자리하고 있었다. 힌두교 사원이 인도 거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차이나타운에도 큰 힌두교 사원이, 인도 거리에 이슬람 사원이 이질감 없이 한 데 어우러져 있었다. 배척이 아닌 서로 포용과 관용의 자세로 서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싱가포르에는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사는 만큼 음식 문화도 다양했다. 원하는 것은 뭐든지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국 음식은 물론 인도, 말레이, 인도네시아, 중국, 일본 등 없는 것 없이 다 있었다. 종류가 너무 다양해 ‘뭘 먹어야 하나?’ 행복한 고민도 했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즐길 수 있는 싱가포르의 칠리크랩을 맛보고 싶었지만 친구가 내키지 않아해 돌아서야만 했다. 대신 싱가포르의 명물인 야쿤카야 토스트를 맛봤다. 달걀 반숙에 카야잼을 바른 3개의 토스트는 커피나 홍차를 곁들이면 한 끼 식사로 손색이 없었다. 그리고 길거리 음식인 ‘올드창기’ 또한 빠뜨릴 수 없는 대표 간식이다. 저렴한 가격에 맛있는 튀김 요리를 다양하게 맛볼 수 있어서 인기가 많은 것 같았다. 가장 좋아하는 새우 튀김을 맛보니 정말 고소하고 바삭해 나의 ‘최고의 간식’ 리스트에 합류시켜도 될 정도였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맛보기 어려운 신선한 망고를 원 없이 먹고 돌아왔다. 내 생애 최고의 망고 맛은 싱가포르 부기스 시장에서 맛보았다. 열기를 식혀주고 갈증을 달래주는 데는 라임주스가 딱이었다. 달지도 않고 야자 열매처럼 밍밍하지도 않아 더위를 식혀주는데 이만한 게 없었다. 가지고 오지 못한 게 아쉬울 정도였으니 말이다.
싱가포르에선 다양한 책과 음반을 만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구할 수 없는 음반들이 많아 나를 갈등하게 만들었다. 생각 같아선 다 사오고 싶지만 한정된 예산 안에서 써야 하니 몇 개만 선택해야 했다. 난 인도와 쿠바 음반을 구입했고, 친구는 사진 찍는 데 유용한 서적을 한 권 구입했다.
싱가포르는 세계가 한 곳에 모인 살아있는 박물관 같은 도시였다. 온갖 물건이 여기에 모여 있었다. 그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리라. 덕분에 이곳에서는 사람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히잡을 두르고 다니는 여성들, 인도 복장을 한 도어 맨, 상술이 좋은 중국 상인들, 친절하게 말을 건네준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현지 아주머니, 흥겨운 음악에 맞춰 남의 눈 의식하지 않고 춤을 추던 아가씨, 어린 아이를 혼자 데리고 나와 다정하게 먹여주던 금발머리 아저씨, 서점에서 만난 아들 또래의 귀여운 소녀 등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피부색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지만 만국 공통어인 미소가 있어 어색하지 않았다.
여행을 한다는 건 나를 깨고 하나씩 알아가고 이해하고 너그러워진다는 것이 아닐까?  우리나라에서도 외국인을 심심치 않게 만나게 된다. 그들의 언어에 관심을 갖고 문화를 이해하고 미소로 인사를 나눈다면 친구가 되는 건 시간 문제일 것 같다. 내가 먼저 한 발 다가서면 의외로 쉬워진다. 싱가포르에서는 이 모든 게 가능한 도시였다.
짧은 여행을 마치면서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되었다. 이번 여행을 적극 지지해준 가족에게 감사했고 나와 동행해준 친구에게 감사했고 건강이 허락됨을 감사했다. 여행은 돈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많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무엇보다도 주변에 대한 관심, 알고자하는 열망이 이 세상 곳곳으로 나를 이끄는 것 같다. 돌이켜 보니 바삐 움직였던 곳보다 잠시라도 앉아서 머물렀던 곳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내 인생에서 한 박자 쉬는 쉼표, 여행이 훗날 가장 또렷이 기억되지 않을까. 지금처럼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차근차근 세상을 알아가고 싶다. 다음엔 어떤 모양의 쉼표를 찍어볼까. (박영주 대전 동구 용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