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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기운으로 깨어나는 문인의 고장

도시들은 품고 있다. 문인이 그 땅에 대해 쓰고 노래한 아름다운 역사를. 그래서 우리는 문인의 고장을 찾아 떠난다. 구절구절 눈물과 웃음으로 한평생 우리에게 감정을 선물하고 떠난 그들의 자취를 향해.

춘천의 김유정, 김유정의 봄

청년은 병약했고, 감수성은 보드라웠다. 일찍 사별한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린 소년이었던 김유정이 청년이 되도록 자라나기까지 마음 한편에 사무치는 그리움의 대상으로 자리 잡았고, 그 결핍의 공간은 그리 길지 않았던 그의 생애에 문학에의 꽃을 피운 토양이 되었다.
김유정을 처음 접한 경로는 거의 비슷했을 게다. 교과서나 국어 참고집에 실렸던 그의 단편소설 ‘동백꽃’과 ‘봄봄’ 등을 통해서 김유정을 알게 된 중학생이었던 기자의 눈에 비친 그는 나이와 상관없이 동심이 살아 있거나, 아이가 많은 다복한 가정의 아버지였겠거니 했다. 근대소설임에도, 1990년대의 청소년이 읽기에 전혀 어색하지 않던 보송보송한 글은 퍽 가깝게 다가왔다. 애꿎은 닭에게 고추장을 먹여가면서까지 신경전을 벌이다 결국은 알싸하고 향긋한 동백꽃 사이로 쓰러진 계집아이와 사내아이의 이야기에 괜스레 가슴이 콩닥거렸다.

“요담부터 또 그래 봐라. 내 자꾸 못살게 굴 테니.” “그래그래, 인젠 안 그럴 테야!” “닭 죽은 건 염려 마라. 내 안 이를 테니.” 그리고 뭣에 떠다 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푹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너 말 마라?” “그래!”

산은 낮고, 들은 평온하며 푸른 소양호에서 흘러내리는 소양강이 마을을 에둘러 흐르던 춘천에서 태어난 김유정은 여섯 살이던 해에 서울로 떠나지만 곧 부모님을 잃고 스물두 살 되던 해에 다시 춘천으로 돌아온다. 소설을 통해 연결되는 그의 이미지는 연애에 고수일 것 같지만, 일생 두 여인을 짝사랑만 하다 결국 독신으로 생을 마감했고, 부모님과 이성에 대한 결핍은 고향마을에서 소설을 쓰며 위로받았다. 그래서인지 ‘동백꽃’, ‘봄봄’, ‘금 따는 콩밭’ 등 그의 대부분 작품들은 모두 그의 고향, 실레마을이 배경이 된다.
김유정 생가 옆에 들어선 김유정문학촌에 들어서면 금병산자락에 안긴 낮은 마을이 한눈에 담긴다. 산아래 잣나무숲 뒤쪽은 ‘동백꽃’의 배경이 되었고, 숲으로 들어서면 실존인물이었던 ‘봄봄’의 봉필이 영감이 살았던 마름집이 있다. 청년은 가고 없지만, 그가 심은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세월을 안으며 자리를 지키고 있고, ‘산골 나그네’의 들병이가 남편을 숨겨두었던 물레방앗간 터까지 고스란히 남겨진 실레 마을에는 곳곳에서 김유정의 숨결이 느껴진다.

김유정. 본관은 청풍. 주로 자신의 생활이나 주변 인물을 소재로 한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1935년 소설 ‘소낙비’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노다지’가 중외일보에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데뷔한 후 ‘봄봄’, ‘금 따는 콩밭’, ‘동백꽃’, ‘따라지’ 등 29세로 요절할 때까지 30편에 가까운 작품을 발표했다.

김유정문학촌
29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김유정은 고향 춘천 실레마을을 소재로 농촌과 농촌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곰살맞게 풀어내며 농민 문학을 이끈 대표적인 작가 중 한 명이다. 문학촌에는 그의 작품 배경이 되었던 실레 마을 곳곳에 대한 안내와 더불어 그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풍부한 전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문의 033-261-4650 www.kimyoujeong.org

조정래, 벌교에 태백산맥을 담다

벌교가 다시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여행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 방송된 이후부터다. 잘 알려지지 않은 지방의 소도시를 찾아 떠나 여행을 떠나면 방송된 프로그램을 보고 다시 그곳을 찾는 젊은이들과 가족들의 발걸음이 뒤를 메워 각 지방자치가 쌍수를 들고 반긴다는 그 프로그램이다. 걸어서 한 시간 남짓이면 동네의 양끝을 걸어서 왕래할 수 있는 조용한 시골마을에서 벌교의 특산물 꼬막을 채취하는 모습과 음식 솜씨 좋고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내온다는 인심까지 후한 전라도 한정식의 표본 꼬막정식까지 훑듯이 보여준 프로그램 덕에, 벌교는 이제 전라도를 찾는 이들의 새 행선지가 되었다.
하지만, 벌교는 그 훨씬 이전부터도 우리에게는 소설 ‘태백산맥’의 배경이자, 동시에 저자 조정래의 공간이었다. 대학 2학년 여름방학을 보내며 뭔가 기억될 만한 일을 하자 싶어 처음 선택한 일이 태백산맥 1권을 손에 쥔 것이었다. 여순사건이 일어났던 1948년의 늦가을 벌교 포구를 배경으로 시작되어, 한국전쟁이 지나가고 빨치산 토벌작전마저 끝나가던 1953년 늦은 가을까지의 이야기를 엮은 소설 ‘태백산맥’은 ‘아리랑’, ‘한강’ 등과 함께 조정래와 동의어로 취급되는 이름이자 현대 장편 문학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한 자리에 진득하게 오래 앉아 무얼 못 하는 성마름에도, 쉴 새 없이 전권을 읽어치우고 ‘조정래는 천재다.’ 싶었다. 1983년 ‘현대문학’에 제1부가 실리는 것을 시작으로, 3부까지 연재가 이어지며 1989년에 10권으로 장장 원고지 1만 6,500매에 걸쳐 시리즈가 완성되기까지 등장하는 수많은 등장인물과 민족의 아킬레스건으로 남아 있는 한국 전쟁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대한 스케일에 그저 혀를 내둘렀을 따름이다.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시절을 벌교에서 보낸 조정래가 묘사한 벌교의 풍광과 꼬막에 대한 이야기 사이로 생생한 전라도 사투리가 맛깔 ‘태백산맥’은 자칫 지루하게 이어질 수 있는 분량과 소재에도 외면당하기는커녕, 출간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200쇄를 기록하고, 700만 부 이상이 판매되며 문학사의 한 획을 긋고 있다.

태백산맥문학관
소설의 주요 무대인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 자리한 태백산맥문학관은 2008년 11월에 개관했다. 벌교역에서 10분 거리. 소설 속 정하섭이 아름다운 무녀 소화를 만나러 가던 길, 제석산 끝 자락에 선 문학관은 작가의 육필원고와 증여 작품 등 총 144건, 623점의 전시물품을 보관한 국내 최대 규모의 작품 전시관이다. 작가가 직접 그린 벌교읍내와 지리산 약도, 꼼꼼하게 적은 취재 수첩, 메모 등이 전시되어 소설의 탄생 과정과 출간 이후 상황을 살펴볼 수 있고, 보성군에서는 태백산맥 문학관을 시작으로 소설 속 현 부잣집과 소화의 집, 주릿재와 철다리, 중도 방죽과 테마 공원으로 이어지는 문학 벨트를 건립할 계획이다.
문의 061-858-2992 tbsm.boseong.go.kr

원주의 숨결, 박경리

벌써 1년이다. 박경리 선생이 영면에 들었을 때 좀 더 우리 곁에 있었으면, 하고 바랐는데 그러고도 또 세월이 흘렀다. 원고지 분량만 3만 매가 넘고, 상상력으로 탄생시킨 인물이 600여 명이나 등장하는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그녀의 작품이 우리 문학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김약국과 서희와 파시, 그리고 시장과 전장을 모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작품을 전혀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라 해도 박경리라는 이름의 문학적 가치는 가늠할 수 있을 터.
원주는 오롯이 박경리 선생을 만나러 가는 곳이다. 그녀가 태어난 통영과 오랜 기간 살았던 정릉, 그리고 토지의 무대가 된 하동 등에 이 작가의 흔적이 있지만 그 긴 생과 토지라는 대하소설의 마지막을 함께 한 장소는 원주다. 이곳에는 박경리 토지문학공원, 토지문화관이 있어 문인들이 많이 찾는다. 특히 단구동은 그녀가 서울을 떠나 정착한 곳이다. 김지하 시인과 결혼한 딸이 원주로 이주한 이후 그녀도 가까운 곳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작가는 1980년부터 이곳에서 토지 4부와 5부를 집필했다. 혼자서 지내는 동안 원주의 산천을 벗삼으며 집 근처의 텃밭을 일구었다. 취미가 아니라 농부로 농사지은 것이었다(원래는 ‘소일거리로 삼았다’고 쓰려 했으나 송호근 교수와의 대담을 읽고 그의 표현을 빌렸다. 박경리 선생의 생활은 정말 농부 같았다고 한다). 이 집이 지금은 토지문학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박경리 선생이 18년 동안 살면서 토지를 완성하고 생활한 모든 흔적을 볼 수 있다. 집안의 벽시계는 언제나 새벽 2시를 가리킨다. 토지의 긴 여정을 끝낸 기념적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묘하게도 그녀가 우리 곁을 떠난 것도 오후 2시였다.

토지문화관의 주요 행사
1 창작실 지원사업 문인과 예술인을 대상으로 창작공간을 지원한다. 선정된 작가는 짧게는 한 달, 길게는 네 달의 기간 동안 토지문화관의 창작실에서 머물면서 집필 활동을 할 수 있다.
2 문학강연회 3월부터 10월까지 정기적으로 문학강연회를 개최하고 있어 여러 작가들과 만나 문학적인 토론을 할 수 있다.
3 해외 작가 레지던스 프로그램 외국의 문인이나 예술가들을 초청해 한국의 예술가들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있다.
문의 033-762-1382 www.tojicul.or.kr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박경리 선생의 마지막 시, ‘옛날의 그 집’ 중  

전주는 최명희로 인해 성숙해졌다

몇 년 전, 거기에 최명희 문학관이 있는 줄도 모른 채 전주에 갔었다. 그저 맛있는 비빔밥 한 그릇 먹겠다는 계획이었다. 한옥마을 뒤쪽으로 시간이 멈춰버린 골목길을 돌고 돌다가 우연히 문학관과 마주쳤다. 껄렁대던 여행자는 일순 말이 없어졌다. 최명희 작가의 ‘혼불’ 앞에 느닷없이 숙연해진 탓이었다. 그렇게 몇일을 보냈다. 별 다른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문학과 함께한 여행은 지금까지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최명희 작가는 전주 출생이다. 학창시절을 모두 전주에서 보냈으며 그 유명한 혼불의 집필도 이곳에서 했다. 일생이 전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때문에 혼불 뿐 아니라 ‘쓰러지는 빛’이나 ‘제망매가’ 등 그녀의 여러 단편 소설에서도 전주의 구석구석을 짚어볼 수 있다. 작품들에는 부끄럼 타는 소녀의 조심스러움과 최명희 특유의 또박또박한 어조가 잘 살아있다. 특히 순 한글로 풀어낸 묘사들이 돋보이는데(‘아름다운 모국어’라는 말을 자주 한 것처럼) 이는 지금까지 여러 문인들에게 자극을 주고 있다. 부디, 전주를 가려거든 몇 작품을 골라 읽고 한 걸음에 한 구절씩 음미해 보길 바란다.
98년 12월,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녀의 나이는 51세였다. 수십 년간 메모해 놓은 작가의 소재록에는 앞으로 써야 할 글감들이 130여 가지나 되었다고 한다. 최명희는 ‘아름다운 세상, 잘 살고 간다’는 유언을 남겼다. 전주는 자신을 ‘꽃심을 지닌 땅’이라 불러준 작가를 위해 큰 장례를 진행하고, 전주시 덕진동 건지산 자락 배롱나무가 아름다운 동산에 그녀를 위한 영원의 자리를 마련했다. 그리고 혼불기념사업회와 함께 지난 2000년, 묘 근처에 혼불문학공원을 조성했다. 

행사마저 문학적인 최명희 문학관
최명희 문학관은 한옥마을 뒷길 최명희 생가터 근처에 위치한다. 장성수 관장은 이곳을 ‘시민 밀착형 문학관’이라 소개한다. 전북대 교수이기도 한 관장이 직접 진행하는 소설읽기 모임부터 문학워크숍, 백일장, 그리고 최명희 서체 따라하기 등의 행사들이 전주 시민과 방문객을 위해 마련되기 때문이다. 방문 시 내부를 둘러보기 전 정갈한 마음으로 글씨를 쓰자. ‘나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고 말한 것처럼 최명희는 손 끝에 마음을 모으고 한 마디 한 마디 파나가며 혼불을 썼다. 문학관은 이곳을 찾아오는 시민들이 그 마음을 느끼게 하기 위해 입구에 글씨 따라 쓰기 책상을 만들어 놓았다.
문의 063-284-0570 www.jjhee.com

사랑하는 이여, 아직은 돌아오지 말라. 내 이 가슴에 약이 덜 차 아직 이 봄이 약(藥)
봄이 아이어든. 천지에 난만한 꽃 피어나 독하게도 휘황하여 아득한 어질머리 일으킬지라도.  
- 산문 ‘소살소살 돌아온 봄의 밤 강물이여’ 중

진해에 피는 열무꽃, 김달진

언제나 봄이 되면 꽃놀이를 가고 싶어 들썩거리는 내 마음은 진해를 향했다. 그곳에는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하늘도, 발과 마주하는 땅도 하얗게 덮어버리는 벚꽃이 가득했다.  그러나 진해에 살고 있는 것은 벚꽃만이 아니다. 진해를 아름답게 만드는 계절은 봄만이 아니다. 진해에는 열무꽃도 살고 있고, 월하 김달진 선생을 기억하는 문화제가 열리는 가을도 있다.
김달진 선생은 진해에서 태어났다. 그의 삶에 있어 진해는 온 몸에 찰싹 들러붙어 떼려고 해도 도저히 뗄 수 없는 그런 질긴 인연을 가진 곳이다. 김달진 선생은 1907년 2월 4일, 지금의 진해시 소사동인 경남 창원군 웅동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며 항일 민족 기독교학교인 ‘계광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그는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가 고등 교육을 받았는데, 몇 년 후 신병 문제로 다시 진해로 되돌아온다. 이것이 그의 첫 번째 귀향이었다. 그 후 다시 한 번 서울로 올라가 ‘경신중학’을 다녔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두 번째 귀향을 한다. 일본인 영어교사 추방운동을 벌이다 퇴학당한 것이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모교에서 후배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7년 후, 다시 고향을 떠나게 된다. 학교가 민족항일 교육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에 의해 폐교되었기 때문이다.
민족의 현실과 절망, 좌절의 끝자락에 서 있던 어느 밤, 그는 찢어진 벽지 사이에 선명하게 보이는 불(佛) 자를 발견하고 스님이 되기로 마음먹는다. 그렇게 그는 다시 고향을 떠나 산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의 항일정신은 그를 평범한 불자로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불자가 된 후 사찰을 돌아다니며 강론에 전념했고 그럴 때마다 ‘시국에 대해 불온한’ 발언을 계속한 것이다. 결국 그는 만주로의 탈출을 감행하게 된다. 그를 감시하던 일경을 눈 속에 처박아버리는 사건이 벌어진 직후였다. 이렇게 그는 다섯 번째로 고향을 떠났다. 그가 다시 진해로 돌아오게 된 것은 광복 이후. 진해에서 다시 교직 생활을 시작하면서다. 이렇듯 그와 질긴 인연을 가진 곳이기에 진해에는 그의 흔적이 많다. 생가도 있고, 문학관도 있고, 시비도 있다. 그를 기리는 문학제도 있고, 문학상도 있다. 그는 어쩌면, 이승을 떠난 지금도 진해를 그리워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고향을 그리며 써내려간 시, 열무꽃에서처럼 말이다.
“가끔 바람이 오면 / 뒤우란 열무우 꽃밭 위에는 / 나비들이 꽃잎처럼 날리고 있었다. / 중략 / 어둔 지붕 위에 / 하얀 박꽃이 / 별빛 아래 떠오르면, / 모깃불 연기 이는 돌담을 돌아 / 아낙네들은 앞개울로 앞개울로 몰려가고 있었다. 먼 고향 사람 사람 얼굴들이여 / 내 고향은 남방 천리. /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생각이여.” 

생가와 문학관이 한 곳에, 김달진 문학관
김달진 문학관은 진해시 웅동 소사리 마을에 복원된 그의 생가 바로 옆에 위치한다. 이곳에서는 그의 여러 육필 원고와 동상, 사진 자료 등을 만나볼 수 있다. 전화나 홈페이지를 통해 사전 관람 예약을 하면 문학관 학예사의 상세 안내와 함께 그의 생애를 돌아보는 기회를 얻을 수도 있으니 잊지 말자.

김달진 문학제, 문학상
1996년부터 매해 가을이 되면 그의 고향 진해에서 김달진 문학제가 개최된다. 기념식과 동화구연, 백일장 등의 행사와 생가· 문학관 방문 등이 진행되며 김달진 문학상을 제정해 그 해를 빛낸 문인들에게 상을 수여하고 있다.
문의 055-547-2623 www.daljin.or.kr

머리맡에 귀뜨래미 울어 예고
어둔 창경 밖 먼-ㄴ 하늘 끝으로
별 하나 떨어져 흘러간 밤.

찬 베개 우에 여읜 가슴 어루만지며
흘러간 내 나이 되풀이해 오이어보면
늦가을 청혼(請婚) 못물 속으로

가만히 떠오르는 흰 연꽃처럼 
피어나는 향수가 슬프고나
향수가 슬프고나.
- 만주에서 고향을 그리며 쓴 시, ‘향수’ 중

만해와 ‘님의 침묵’의 산실, 백담사   

백두대간의 중심이자 미시령, 대청봉, 한계령에서 내려와 소양강, 북한강으로 이어지는 계곡이 발달한 내설악은 설악산의 수려한 경관으로 이름난 곳이다. 그곳에는 우리가 사랑하는 민족 시인, 만해 한용운이 다시 태어난 곳이자 그의 시 ‘님의 침묵’이 탄생한 백담사가 자리하고 있다.
만해는 본래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으나 어린 나이에 가출해 스무 살의 나이에 설악산 백담사에서 계를 받는다(受戒 - 석가의 가르침을 받는 자가 지켜야 할 계율에 대한 서약). 세계 일주를 꿈꾸다가 다시 입산한 곳도 백담사다. 만해 백담사의 부속 암자인 오세암에서 치열한 참선수행을 하여 깨달음을 얻어 ‘오도송’을 남겼고, 1925년에는 ‘님의 침묵’과 ‘십현담 주해’의 원고를 탈고했다. 만해의 문학과 혼이 담긴 이곳에는 만해가 불교 개혁의 가치를 들어 집필한 ‘조선 불교 유신론’, ‘불교 대전’의 원전이 보관되어 있으며, 만해 기념관을 건립해 만해의 생전 유물과 옥중 투쟁 자료를 정리 보관하고 있다.
지난 2003년에는 민족 운동가이자 한국 문학사의 대표적 시인으로 암흑시대에 겨레의 가슴에 영원히 꺼지지 않을 민족혼을 불어 넣었던 만해 한용운의 정신을 되살리는 공간, 또 문학적 상상을 위한 집필과 휴식, 토론의 공간인 만해 마을이 건립되었다. 만해마을은 이제 우리나라의 문인들과 문학도, 그리고 한국 문학을 사랑하는 전국민의 것이 되었다. 만해를 찾고 문학을 찾는 사람이 있는 한, 민족혼이 살아있는 만해의 문학과 우리의 문학은 영원할 것이다.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아지트, 만해마을
만해마을은 문학을 사랑하고 만해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쉼터 같은 곳이다. 연대와 주제별로 만해의 저서, 유품, 만해의 일대기를 사진과 함께 전시한 만해 문학 박물관, 문인의 집필이나 강연을 위한 공간 문인의 집, 만해 선생의 문학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청소년들의 문화 공간인 만해 학교와, 사색과 명상의 시간을 가지면서 자연과 대화하고 또 자아를 찾는 님의 침묵 산책로 등이 있다. 특히, 2004년에 문을 연 문인 창작 집필실은 문인이라면 누구나 신청할 수 있는 곳인데 문예진흥원에서 숙식비 전액을 지원한다. 최장 4개월을 머물 수 있는 이곳의 고즈넉한 분위기에서 문인들은 창작이나 집필에 몰두하거나 격의 없이 토론을 벌이기도 한다.
한편, 우리 시대 문학을 대표하는 문인들을 초청해 문학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만해 문학 아카데미’를 마련하고 있다. 시인 고은, 소설가 정지아, 소설가 은희경 등의 문인들이 매월 한 번씩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한다.
문의 033-462-2303 www.manhae.net

독자(讀者)에게
독자여, 나는 시인으로 여러분의 앞에 보이는 것을 부끄러합니다.여러분이 나의 시를 읽을 때에, 나를 슬퍼하고
스스로 슬퍼할 줄을 압니다. 나는 나의 시를 독자의 자손에게까지 읽히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때에는 나의 시를 읽는 것이 늦은 봄의 꽃수풀에 앉아서 마른 국화를 비벼서 코에 대이는 것과 같을는지 모르겠습니다. 밤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설악산의 무거운 그림자는 엷어 갑니다. 새벽종을 기다리면서 붓을 던집니다.  〈乙丑 8월 29일 밤 끝〉
- 한용운 시집, ‘님의 침묵’ 중

봉평, 메밀꽃 피는 이효석의 고장

늦여름부터 초가을로 접어들 무렵이면, 봉평 산골은 메밀꽃으로 가득 찬다. 지금이야 메밀묵이나 메밀떡을 별식 삼아 먹지만, 사실 메밀은 감자나 고구마 같은 구황작물이다. 밭이 아니라 산비탈 같은 토질이 척박한 땅에 뿌려만 두어도 쉽게 쑥쑥 자라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메밀꽃의 뒤에는 농한기에 주린 배를 쥐었던 농민들의 삶이 배어 있다.
봉평장을 마치고 대화 장터로 건너가는, 달 밝은 밤의 메밀밭 풍경이 손에 잡힐 듯 그려져 있는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는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장돌뱅이와, 마법이 일어날 것 같은 달밤의 봉평이 잘 그려져 있다. 현재의 봉평은 소설 속의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만큼 발전했지만, 이효석의 문학 정신이 담겨있는 문학관과 가산공원은 아직 남아 있다. 가산공원에서 개울 다리를 건너면 물레방앗간도 재현해 놓았는데, ‘그냥 개울가에서 훌훌 옷을 벗어도 좋을 것을 달이 너무 밝아’ 물레방아에 들어간 허생원과 성씨 처녀가 마주친 장소다. 그리고 허생원은 이곳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단 한 번의 인연을 맺는다.
이효석은 1907년 봉평면 창동리 남안동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한성사범학교를 나와 진부면장과 봉평면장을 지낸 인텔리. 이효석 역시 8살 때부터 집에서 백 리 떨어진 평창읍에서 유학을 시작했다. 유학시절 이효석은 집에 돌아가기 위해 방학이나 주말마다 봉평으로 향하는 백리 길을 밟았는데, 이것이 어린 효석의 마음에 큰 흔적을 남겼다. 서울에서 경성고보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영문과에 입학한 그는 다양한 신문과 잡지에 여러 가명을 사용하며 투고해 술값을 마련했다. 소설을 통해서는 짐작하기 어렵지만, 그는 일본인 빵집의 잘 구운 빵 한 조각을 위해 십리 길을 걷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커피 마시기를 즐기던 ‘모던 보이’였다고 한다. 

이효석 문학관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에 위치하고 있다. 월요일과 1월 1일, 설과 추석에는 휴관한다. 이용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문의 33-330-2700 www.hyoseok.org

이효석 문화제
2009년 9월 4일부터 14일까지 열흘간 봉평에서는 ‘소설처럼 아름다운 메밀꽃밭’이라는 주제로 11일간 이효석 문화제가 열린다. 이 자리에서는 문학나눔 콘서트와 메밀로 만든 각종 음식을 판매하는 장터도 열려 한껏 축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메인 이벤트인, 이효석의 업적을 기리는 ‘이효석문학상’의 시상식도 진행된다. 9회였던 2008년 9회 이효석문학상은 김애란의 ‘칼자국’이 선정되었다.
문의 033-335-2323 www.hyoseok.com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팔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 이효석 소설, ‘메밀꽃 필 무렵’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