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UROKAWA
‘구로가와’라고 들어봤니?

“혹시 ‘구로가와’라고 들어봤니? 일본 사람들이 꽤나 좋아하는 온천마을이라는데.” “아니, 구로가와가 어딘데?” 3년 전쯤, 우연한 기회에 구로가와라는 지명에 대해 처음 듣게 되었다. 그 뒤로 주변 지인들을 통해 구로가와에서 온천을 즐기고 온 이야기를 듣기도 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중에 한 번쯤 가봐야겠다고. ‘온천마을이라. 나쁘지 않겠어.’ 그렇게 짧은 구로가와 여행이 시작되었다.

구로가와(?川?泉)는 후쿠오카에서 약 130킬로미터 떨어진 큐슈 북부 내륙에 위치한 작은 온천마을이다. 지명의 한자를 보면서 혹시 ‘이 온천을 발견했을 때가 한밤중 아니었을까, 그래서 냇가가 다 검댕이로 보인 것은 아닐까’라는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었다. 아무튼 구로가와는 일본 내에서도 인기 있는 온천 마을 중 하나로 손꼽히며 ‘2.4킬로미터 구간에 있는 29개의 온천 료칸 중 24개가 가지고 있는 노천온천이 자랑거리’라고 소개되는 곳이다.

전통 냄새 물씬 풍기는 온천으로 가는 길
후쿠오카 공항에 내려 하카타역 교통센터에 도착, 하루에 두 번 있는 고속버스를 탔다. 미리 예약해 놓은 덕분에 가장 앞자리에 앉았다. 구로가와에 도착하니 이메일로 부탁해 놓은 픽업서비스 덕분에 료칸의 봉고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봉고차를 타고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우리가 묵을 료칸산가에 도착했다. 아주머니는 정원과 온천의 이곳저곳을 소개해주며 우리가 이틀간 묵을 다다미방으로 안내했다. 전통 냄새가 물씬 풍겼다. 사진으로만 보던 다다미방을 만나니 긴장이 좀 풀린다. 후다닥 짐을 풀고 료칸의 정원을 좀 걸었다. 그리고는 노천 가족탕을 이용하기 위해 로비에 예약을 하러 갔다. 보통 료칸마다 남탕(이름은 혼탕이라고 되어 있다)과 여탕의 공동노천탕과 가족이 이용할 수 있는 노천탕 등을 운영하고 있고, 가족탕의 경우는 예약제로 30분에서 1시간 정도를 사용할 수 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저녁 식사시간이다. 다다미방에 직접 차려준 가이세키 요리는 눈도 즐겁고 오감을 꽤나 자극한다. 짭짜름한 일본식 간장소스 덕분에 물을 자주 마시긴 했지만. 산가의 저녁 가이세키 요리는 우리가 묵은 이틀 동안 다른 재료와 메뉴로 제공되었는데 외국인 입맛에 맞도록 퓨전 형태로 준비한다는 소문대로 대체로 입맛에 잘 맞았다. 노천온천 후 다다미방에서 먹는 일본식 저녁식사의 호사는 꽤 큰 즐거움이 아닐 수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일본 아주머니가 잠자리를 준비해 주셨다. 퇴실하며 넙죽 큰절을 하는 아주머니를 향해 우리도 함께 인사를 꾸벅 나눴다. 잠자기 전, 다시 한 번 온천에 몸을 담갔다.

새소리와 바람소리를 들으며 아침 노천온천을
일어나자마자 다시 온천으로 향했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아무도 없다. 20대 후반의 일본 청년과 마른 체형의 할아버지가 5분 간격으로 등장하기 전까지는 새소리도 즐겁고 바람소리도 시원한 노천 온천에서 혼자서 온천을 즐길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많은 노천 온천이 있지만 일본 전통 료칸에서 하룻밤을 자고, 쌀쌀한 5월의 산바람이 불어오는 이른 아침에 따뜻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온천에 몸을 담그고 있자니 이런 저런 걱정들은 모두 사라지는 것 같다. 무척 편안하고 여유로운 아침이다. 아침을 먹기 전의 노천 온천은 정신적인 포만감을 안겨주었다.
아침에는 각 방별로 식사 시간을 예약하고, 테이블별로 준비해 놓은 식사를 대접한다. 아침이기 때문에 저녁의 가이세키 요리만큼 배부른 음식들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정갈하고 담백한 일식 아침식사였다. 아침을 먹고 나서는 커피 한 잔을 마신 뒤 산길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도로변을 산책했다. 아름드리 나무들과 함께 걷다 보니 꽤 깊숙한 숲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다. 간헐적으로 차들이 지나가긴 하지만 산책을 방해받을 정도는 아니다. 가드레일엔 오래된 이끼들이 자라고 있고, 작은 뱀과 다람쥐, 여러 종류의 새와 식물들도 만날 수 있었다. 산 속에 틀어박혀 있는 구로가와라는 온천 마을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본격적인 온천마을 탐방에 나서다
본격적으로 온천을 즐기기 위해 료칸에서 판매하는 마패를 구입했다. 이 마패의 이름은 노토데카타. 구로가와 관광료칸조합에서 판매하는 이 마패의 가격은 1,200엔인데 료칸 회원의 온천 3군데를 하루 동안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다. 온천 한 곳의 이용료가 500엔이니 300엔이 절약되는 셈이다. 일본 전통 복장인 유카타를 입고 온천 탐방에 나섰다(나중에 보니 몇몇 노인 분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평상복 차림이라 조금 창피하기도 했다). 산가 료칸은 다른 온천에 갈 때에도 봉고차를 제공해 준다. 하지만 우리는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를 걷기로 결정했다.
가장 처음 간 곳은 구로가와소. 마패에 붙어 있는 세 개의 온천표시 스티커 중 하나를 떼어내고 료칸 고유의 스탬프를 찍었다. 이 온천은 남녀 각각 노천탕을 소개받아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구로가와소 역시 온천마을 중심지에서 꽤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아직 아침시간이라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었다. 10여 분이 지나니 한 두 명의 입욕객이 들어왔다. 모두 일본인. 난 눈치껏 몇 장의 사진도 찍었다. 구로가와소의 노천온천에는 우리나라의 목욕탕처럼 생긴 실내탕을 지나가면 아담한 노천탕이 있었다. 그곳을 지나 숲길을 따라 잠시 걸으니 꽤 넓고 나무에 둘러싸인 노천탕이 등장했다. 마치 아지트 같은 느낌이다.
소화를 좀 시키고 두 번째로 찾은 온천은 신메이칸. 신메이칸은 큰 규모의 건물과 냇가를 따라 온천이 자리 잡고 있는데, 특히 동굴온천으로 유명하다. 동굴온천은 다른 온천에 비해 물 온도도 좀 뜨겁고, 동굴의 특성상 한증막 같은 답답함 때문에 오래 있기는 힘들었다(내가 들어갔을 때 일본 청년 한 명은 이런 환경 속에서도 포켓용 책을 읽고 있었다. 대단한 남자다). ‘그래, 난 역시 노천온천이 더 맞는 것 같아’라고 생각하며 탈의실로 들어섰다. 그런데 순간, 옷을 갈아입고 있는 아주머니 한 분을 만났다. 전통적으로 ‘혼탕’이었던 곳은 거의 다 남탕화가 되었지만 간혹 부부가 혼탕을 찾기도 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아주머니에게만 좋은 일(?)을 시키는 것 같아 잠시 온천욕을 보류하고 15분을 기다렸다. 신메이칸의 노천탕은 성분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갈색을 띠었다. 나무로 듬성듬성 가려져 있긴 하지만 멀리 냇가 건너편 사람들의 움직임이 다 보인다. 물론 관광객들도 이쪽 편이 보일 것이다. 그래도, 신경 쓰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일본 젊은이들은 수건만 대충 두르고 동굴탕과 노천탕을 왕복하면서 온천을 즐기고 있다. 하긴, 옷을 갈아입고 다시 가려면 번거롭긴 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선택한 곳은 산가에서 추천해준 야마미즈키 온천이다. 봉고차를 타고 산길을 굽이굽이 올라 야마미즈키 온천에 도착했다. 깔끔한 입구로 들어서자 유카타를 입은 젊은 여직원들이 환한 얼굴로 우리를 반긴다. 이 온천의 백미는 가장 자연적인 노천온천이라는 것. 넓기도 하지만 시냇가가 바로 옆에 있어서 풍광도 무척 좋다. 그래서인지 다른 곳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온천을 즐기고 있었다. 외국인(아, 나도 외국인이었지)도 다른 곳에 비해 많았다. 나체로 온천 안에 앉아 있는 모습들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워 보여 사람들도 자연의 일부인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구로가와에서의 마지막 밤이 깊어갔다. 숙소로 돌아와서는 어제와는 또 다른 메뉴로 준비된 가이세키 요리로 저녁을 먹었다. 이제는 밤 산책에 나설 시간. 멀리까지는 가지 못했지만 정원과 료칸 인근에 나가 깨끗한 밤 공기를 만끽했다. 공기도 좋고, 달빛도 좋고, 나무 냄새도 좋았다. 잠자기 전, 또 한 번의 마지막 노천온천을 즐겼다.
여행에서의 일상은 지나고 나면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간다. 하지만 구로가와의 자연과 노천 온천, 료칸과 일본 전통 요리를 통해 온천마을에 대한 깊은 인상을 받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다시 한 번 구로가와를 찾으면, 떠나면서 내가 건넸던 인사 ‘See you later’라는 말을 지키는 게 될 것이다. 우리 수현이가 좀 더 커서 대여섯 살이 되면 다시 구로가와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아마 그때는, 이번 여행의 기억이 새록새록 다시 피어오를 것이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또 다시 여행을 꿈꿔본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가끔 말할 것이다. “혹시, 구로가와라고 들어봤니?” (장현웅 서울 강동구 길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