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ZEALAND
무모한, 그러나 낭만적인. 캠퍼밴 신혼여행

“뭐? 첫날밤을 캠핑카에서 보내겠다고?” “안 그래도 신혼여행 가서 부부싸움 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꼭 그렇게 힘들게 가야만 하냐?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봐.” 신혼여행으로 캠핑카를 빌려 뉴질랜드를 돌아다니겠다고 하니 주위 사람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하지만 그건 정말이지 기우에 불과했다.

밤낮으로 일에 시달리는 직장인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누릴 수 있는 황금 같은 시간, 신혼여행. 그 달콤한 허니문을 아름다운 해변에 누워 종업원들이 가져다주는 음식을 넙죽넙죽 받아먹으며 편안하게 지낼 수도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나이 들어서도 할 수 있는 그런 여행을 이 젊은 나이에 굳이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멈추고 싶을 때 멈출 수 있는 것이 여행의 낭만이 아니던가. 문제는, 결혼은 더 이상 나 혼자가 아니라 둘이라는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라는 것. 독단적인 결정을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돈은 돈대로 깨질 수도 있는 무모한(?) 나의 제안을 배 여사(나의 아내)는 흔쾌히 동의해 주었다. 결혼식을 마친 우리는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행 비행기에 올랐다.

너무도 뜨거웠던(?) 캠퍼밴에서의 첫날밤
우리의 캠퍼밴 여행은 첫 날이 마지막 날이 될 뻔 했다. 운전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중앙선을 넘어가(뉴질랜드는 우리나라와 반대로 차량이 좌측통행을 한다) 맞은 편 차량의 운전사와 서로 마주보고 놀란 토끼눈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그저 한숨 한 번 쉬고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첫 시작에 불과했다. 장을 보기 위해 들른 슈퍼마켓에 지갑을 두고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슈퍼마켓을 떠난 지 한 시간이 지난 뒤. 신용카드와 현금이 다 들어있었던 터라 얼굴이 노랗게 돼서는 다시 먼 길을 부랴부랴 돌아가야 했다. 다행히 문 닫기 직전에 도착해 사무실에 보관되어 있던 지갑을 되찾을 수 있었다. 게다가 돈 한 푼 없어지지 않고, 신용카드도 그대로여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만약 사무실 문이 닫은 상태였더라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난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홀리데이파크(뉴질랜드에서는 오토캠핑장을 이렇게 부른다)에 도착해 첫날밤을 지내게 되었다. 초가을 날씨였지만 밤에는 기온이 뚝 떨어져서 히터 없인 잠을 잘 수가 없는데 도무지 히터가 켜지지 않는 것이다. 캠퍼밴을 인수받을 때 이것저것 설명을 들었지만, 난생 처음 타보는지라 작동법에 익숙하지 않아 그저 속만 타들어갔다. 캠퍼밴 센터에 급히 연락을 해 보아도 돌아오는 것은 너무 늦어서 올 수 없다는 말 뿐. 결국 우리는 히터 켜는 것을 포기하고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잠들 수밖에 없었다. 서로 꼭 부둥켜안고 잠을 청해야했던, 정말이지 뜨거운(?) 밤이었다. 하지만, 함께 겪는 위기는 둘 사이를 더 돈독하게 만드는 법일까. 이런저런 해프닝에도 우리 둘은 한 번도 다투지 않고 서로 다독여가며 캠퍼밴 생활에 적응하게 되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결혼생활의 첫 기틀을 다지게 된 좋은 시간이었던 것 같다.

둘만의 레스토랑, 캠퍼밴
캠퍼밴으로 돌아다닌 곳은 주로 뉴질랜드의 남섬이다. 신혼여행 기간이 10일이었기 때문에 좀 욕심을 내면 남섬을 한 바퀴 다 돌 수도 있었지만, 우리는 많은 곳을 돌아다니기보다 한 곳이라도 깊고 여유롭게 즐겨보고 싶었다. 캠퍼밴의 특징을 십분 활용해 마음에 드는 곳이 보이면 무작정 차를 세워놓고 사진을 찍기도 했고, 배가 고프면 한적한 길가에 차를 세우고 소풍 같은 식사를 하기도 했다. 좋은 풍광을 구경하는 재미도 좋았지만, 여행의 또 다른 묘미는 역시 ‘맛’이다. 식당에서 음식을 사먹기보다는 가급적 직접 만들어 먹고자 했는데,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사다가 캠퍼밴에서 요리해 먹는 재미는 정말 쏠쏠했다. 신혼여행을 왔다는 느낌보다는, 마치 MT를 온 기분이랄까. 한국에서는 비싸서 엄두도 못내는 최고급 소고기 스테이크는 매일 저녁 식탁에 올랐고, 골드키위는 질리는 줄도 모르고 매일 열 개 이상씩 먹곤 했다. 두둑하게 저녁을 먹고 뉴질랜드 특산품인 마누카꿀차를 한 잔 마시면서 흐뭇한 기분을 느꼈던 순간은 그 어느 것과도 바꾸기 싫었다. 캠퍼밴은 이동차량이자, 침실이자, 우리 둘만의 오붓한 레스토랑이었다.

‘水’의 나라, 뉴질랜드 남섬
남섬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바로 ‘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곳곳에 펼쳐지는 끝이 보이지 않는 데카포, 푸카키, 와나카 등의 호수들은 바다와는 또 다른 광활함을 느끼게 해 주었고, 이끼 하나 없이 깨끗한 물은 끝없는 감탄을 자아냈다. 특히, 햇빛 아래서 반짝이던 밀키블루(우윳빛깔이 감도는 파란색) 색의 호수는 아직도 눈에 선하다. 퀸스타운의 호숫가에는 자갈로 이뤄진 백사장이 있는데다가 잔잔한 파도도 일어서 마치 해변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이어지는 물의 또 다른 모습은 바로 빙하. 마운트쿡 아래의 거대한 빙하계곡과 타스만호수에 둥둥 떠다니는 거대한 얼음 덩어리들과의 조우는 신비스러움 그 자체였다. 냉장고의 얼음처럼 빙하 역시 그저 물이 냉각된 것에 불과했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만질 때는 마치 천년의 시간이 손끝에서 느껴지는 듯 했다.
너무도 잔잔해서 마치 거울처럼 산과 하늘의 구름을 그대로 비춰주는 미러레이크를 지나면 물의 절정과 마주하게 된다. 바로 밀포드사운드다. 세계 10대 트레킹 코스로도 유명한 이곳에는 피오르드 해안을 따라 깎아지른 듯한 절벽들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는데, 그 절벽을 따라 흘러내리는 폭포는 사람의 시선을 압도하기에 손색이 없다. 워낙 높은 곳에서 내려오다 보니 바람을 타고 슬로우 모션처럼 흩어지는 폭포수는 ‘정말 이곳이 인간의 세계가 맞나’하는 생각까지 들게 했다. 머리를 들고 폭포를 구경하느라 목이 뻣뻣해질 즈음 나타난 것은 바로 돌고래들. 배 주위에서 지느러미와 등을 살짝살짝 내보이는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녀석들 덕분에 폭포를 구경하느라 뻣뻣해진 목을 편안히 쉴 수 있었다.
뉴질랜드라고 하면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물 위로 떨어지는 번지점프다. 남섬에는 번지점프가 시작된 곳으로 유명한 가와루 다리가 있는데, 내가 택한 곳은 네비스하이와이어였다. 두 계곡 사이를 케이블로 이어서 점프대를 설치한 이곳의 높이는 무려 143미터. 마음을 단단히 먹고 오르긴 했지만, 발아래 실같이 보이는 계곡물을 바라보니 눈앞이 어질어질해지고 두 다리는 망부석처럼 굳어버렸다. 하지만 안 뛰어도 환불은 안 해준다는 말을 듣고 퍼뜩 본전생각이 들었다. 두 눈을 꼭 감고 뛰어내렸다.
“으아아아아아아!” 중력을 따라 아래로 직강하를 하면서 귓전을 때리는 바람 소리와 함께 나의 비명소리도 절로 터져 나왔다. 멀리서 지켜본 배 여사는 내 비명소리가 그 누구보다 컸다고 전했다. 요즘도 그 때 찍은 동영상을 보면 둘이 함께 배꼽을 잡고 킥킥댄다.

캠퍼밴 덕에 만난 소중한 인연
캠퍼밴을 타고 돌아다니다보면 히치하이킹을 하는 여행객을 많이 볼 수 있다. 생각 같아서는 보이는 대로 다 태워주고 싶었지만 아내와 동행하다보니 선뜻 차를 세우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러다 더니든 시내를 벗어날 때쯤 혼자서 손을 흔드는 아가씨와 조우하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힐러리. 캐나다에서 여행 온 그녀는 무일푼으로 뉴질랜드를 6개월째 여행 중이라고 했다. 길가나 한적한 숲에 가지고 다니는 텐트를 치고 숙박한다는데, 21살의 어린 여자가 어찌도 그리 용감한지. 어쩌면 이곳이 범죄 안전국인 뉴질랜드니까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힐려리는 한글에 관심이 많아서 나에게 한국말을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수첩에 꼼꼼히 적어둔 뒤 어설픈 발음으로 따라하곤 했다. 영어가 어설퍼 살짝 주눅 들어있던 배 여사와 힐러리를 연결해 준 것은 바로 사진. 서로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깔깔대고 웃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언어라는 장벽은 여행객들 사이에서는 별 거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짧은 시간이나마 깊은 정이 들었던 힐러리는 헤어질 때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며 전복 껍질(첫 출발을 의미한다고 한다)로 직접 만든 목걸이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었다.
세계는 넓고 구경할 것은 많다지만, 다시 한 번 신혼여행과 같은 시간이 주어진대도 우리 부부는 똑같이 뉴질랜드 캠퍼밴 여행을 택할 것 같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로든 달려갈 수 있고, 쉬고 싶을 때 어디서든 쉴 수 있는 둘만의 자유가 바로 캠퍼밴 여행의 낭만이기 때문에. 황찬국 강원도 춘천시 근화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