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소년 J의 1일

문학을 사랑하는 J는 친구들이 자신에게 붙여준 ‘문학소년’이란 애칭을 참 좋아했다. 하지만 올해 대학에 입학한 J는 ‘소년’이란 단어를 애칭으로 사용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물론 J는 믿고 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더 깊은 문학적 소양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어린 시절의 그 순수했던 감정은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J는 ‘문학소년’으로서의 마지막 여행을 시작했다. 짧지만 무척이나 풍요롭고 따뜻했던 J의 문학여행, 그 하루.

08:30 성북동 길상사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길상사 앞에 선 J는 백석 시인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조용히 읊조렸다. J가 길상사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얼마 전 친구를 통해서였다. “이동순 교수라는 사람이 해금 이후 처음 백석에 대한 책을 냈는데, 얼마 후 한 단정하고 기품 있는 음성의 할머니에게 전화를 받았대. 그 할머니는 자신이 처녀 시절 백석과 뜨거운 사랑을 나눴던 사람이라고 소개를 하면서 그들의 영화 같은 사랑 이야기를 들려줬다고 해. 그렇게 백석 시인의 유일한 사랑이었던 여인, ‘김영한’의 존재가 밝혀졌어. 고등학교 교사였던 백석과 기생이었던 김영한은 3년 간 뜨거운 사랑을 나눴지만 집안의 반대로 결실을 맺지는 못했다네. 그래서 백석은 만주로 사랑의 도피를 떠나자고 제안한거지. 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앞길을 막고 있다고 생각한 여인은 그를 따라 나서지 못한거야. 그렇게 탄생한 걸작이 바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야. 먼저 떠난 백석이 그 여인을 그리며 지은 거지. 불행하게도 그들은 다시 만나지 못했어. 얼마 후, 백석이 황해도 고향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분단이 되었거든. 그렇게 그들의 사랑은 안타까운 막을 내려야 했던거야.” 요정에서 열린 회식자리에서 김영한을 처음 만난 백석은 이렇게 속삭였다고 한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의 이별은 없어요.” 그 말을 지키고 싶었을까, 라고 J는 생각했다. 죽기 전까지 그녀는 백석 시인 이외의 남자를 만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생의 단 하나뿐인 사랑을 해온 김영한은 이후 서울의 3대 요정 중 하나인 대원각의 주인이 되었는데, 죽기 전 당시 시가 천억 원의 가치를 지니고 있던 그 요정 부지와 건물 모두를 절에 시주했다. 그곳에 세워진 절이 바로 김영한의 불명, 길상화를 따라 만든 길상사다. J는 그들의 사랑 이야기를 곱씹으며 절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그녀의 유골이 뿌려졌다는 너른 마당과 기념비. 그곳에서 J는 김영한이 시주할 당시, ‘돈이 아깝지 않냐’는 질문에 했다는 대답을 가만히 떠올렸다. “1000억이 그 사람의 시 한 줄만도 못해.” 그리고 생각했다. 나도 그들과 같이 운명적인 사랑을 하고 싶다고. 로맨틱한 상상에 빠진 J는 서울 시내 절에서 보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던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과 조용히 기도를 올리는 불자들 사이를 한참 동안 거닐었다. 올곧게 백석만을 사랑했던 김영한과 그의 평생의 사랑, 백석을 떠올리면서. 그의 시를 낭송하면서.
위치 성북구 성북 2동 323번지, 진학서점 옆
문의 02-3672-5945 www.kilsangsa.or.kr

10:00 성북동 심우장
길상사를 나온 J는 근처에 위치한 심우장을 찾았다. 심우장은 만해 한용운 선생님이 마지막 여생을 보낸 유택. 좁은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尋牛莊’이라고 쓰인 작은 대문-유택 옆 가옥에 사람이 살고 있지만 이곳을 찾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대부분 대문을 열어놓는다. 문이 닫혀 있을 때는 초인종을 누르면 문을 열어준다-이 보였다.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흘러내렸지만 그게 무슨 대수일까, 라고 J는 생각했다. 곧 만해 선생님의 유택을 직접 둘러보게 될테니 말이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 간결하고 정갈한 한옥 한 채가 눈에 띈다. 작은 방 두 칸과 부엌이 집의 전부. ‘만해 선생님의 일생과도 같은 소박한 집’이라고 J는 생각했다. 집은 일반적인 남향이 아닌 북향으로 지어져 있었다. 만해 선생이 남향으로 집을 지으면 조선 총독부 건물을 바라보게 된다고 이렇게 집응ㄹ 지었다는 것이다. 만해 선생님이 입적한 후에는 외동딸인 한영숙 씨가 이 집에 계속 살았지만, 집 맞은편에 일본 대사관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꼴보기 싫다’며 이사를 갔다고. 그래서 현재는 만해 선생님의 생전 흔적들만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맞고 있다. J는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안타까운 마음을 누르며 방에 들어섰다. 방에 들어가기 전에는 조용히 합장을 했다. 불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승려였던 만해 선생님을 존경하는 의미에서였다. 방 안에 들어가니 ‘磨杵絶葦(마저절위)’라고 쓰인 친필 액자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절구공이를 갈아 바늘을 만들었다’는, 쉬지 말고 정진하라는 뜻이란다. ‘공부하는 집’이라는 뜻을 가졌다는 집 이름과도 무척 잘 어울린다고 J는 생각했다. 벽에 걸려 있는 심우장의 내력과 ‘님의 침묵’ 등을 읽으면서 부엌으로 발길을 돌렸다. J는 만해 선생님이  감옥에서 고초를 겪고 있는 독립군들을 생각해 추운 겨울에도 불을 때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부엌 아궁이를 바라보면서 끼니는 제대로 때우셨을까, 하고 J는 생각했다.
만해 한용운 선생님은 광복이 되기 바로 직전인 1944년, 이곳 심우장에서 눈을 감았다. 마당 한 쪽에는 그가 생전에 심었다는 향나무 한 그루가 여전히 튼튼하게 자라고 있었다. J는 ‘저 향나무가 우리를 대신해 만해 선생님이 그토록 바랐던 조국의 광복 소식을 알려주었으리라’ 믿으면서 대문을 나섰다.
위치 성북구 성북2동 동사무소 근처

11:30 평창동 영인문학관
더운 날씨에 입맛을 잃은 J는 편의점에서 산 샌드위치로 점심을 해결했다. 이후 J가 찾은 곳은 그가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인 영인문학관. 특히, 주기적으로 열리는 작가 강연회는 J가 빼놓지 않고 찾는 행사 중 하나다. 얼마 전 이곳에서 고은 시인을 만난 후에는 며칠 간 잠도 잘 자지 못할 정도로 흥분했었다. 이렇게 여러 번 다녀갔지만 이곳을 찾을 때마다 J는 그의 문학적 감수성이 무척이나 풍요로워지는 것을 느끼곤 한다. 영인문학관은 이어령 교수와 그의 부인인 강인숙 교수가 오랜 세월동안 모아온 문인들의 육필 원고나 소장품 등을 전시하는 곳. 현재 강인숙 교수가 직접 이 문학관을 관리하고 있는데, 여름 동안의 짧은 기간만 제외하고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문인들의 물품을 공유할 수 있도록 문학관을 개방하고 있다. 4~5월과 9~10월에는 두 차례의 전시회도 연다. 문학관에 도착하자마자 J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기대하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J는 무척 행복해진 얼굴로 잠시 문학관의 정원을 바라보며 땀을 식혔다. 더위에서 해방된 J는 이천 원의 학생 입장료를 내고 전시실 입구로 들어가면서 ‘문인들의 육향이 묻어나는 초고와 육필원고전’을 발견했다. 책 속에는 수많은 작가들의 친필 원고들과 소장품들이 가득했다. 학생에게 만 원은 적은 돈이 아니었지만, J는 책을 구입했다. 작가를 꿈꾸는 J에게 이런 책은 돈보다 훨씬 더 큰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지하와 1층에 자리 잡은 전시실 중 J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소설가 김동리 선생님과 시인 김상옥 선생님의 거처 안 물품들을 옮겨다 놓은 ‘작가의 방’이다. 방 내부에는 친필 원고들과 작품 활동을 하며 사용했던 필기도구, 생전에 쓰던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J는 잠시 방 앞에 서서 그들이 글을 쓰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발길을 돌린 J는 전시실 내부를 조용히 돌아보았다. 벌써 몇 번씩이나 보아 온 물건들이지만 한국 문학사를 이끌어 온 작가들의 원고나 물품, 수집했던 소장품들을 만나는 것은 언제나 J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한다. 박두진 시인이 직접 쓴 ‘해’ 서화 앞에서는 10여 분을 머물렀다. J가 무척 좋아하는 시이기 때문이다. 김남조 시인의 육필 원고집과 ‘목숨’ 초판본, 박완서 선생님이 신혼 초에 쓰셨다던 정갈한 무늬의 커피 잔도 J가 좋아하는 물품 중 하나다. 이곳에 머무른 지 어느덧 두 시간 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문학 세상에 빠져있던 J는 9월 5일부터 열릴 ‘30년대 소설의 추억, 김동리 최정희 전’ 때 다시 찾아오겠다고 생각하며 다음 목적지를 향해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위치 종로구 평창동 올림피아 호텔 맞은편
시간 AM 10:30~PM 5:00, 전시기간 중 월요일 휴관, 전시기간 외 토, 일요일 휴관
문의 02-379-3182 www.youngin.org

14:00 홍지동 이광수 별장터
J는 ‘춘원 이광수 별장터’가 있는 홍지동으로 발길을 옮겼다. 사실 J는 친일행적 때문에 그를 그다지 존경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설 ‘무정’ 등 그의 작품이 한국 근대 문학에 끼친 영향은 무시할 수 없는 일. 그래서 J는 그곳으로 향했다. 가파른 골목길을 오르기 시작했는데, 한참을 걸어도 별장터는 찾지 못한 채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 J는 다시 골목길을 내려오다 만난 한 아주머니에게 위치를 물었는데 아주머니는 웃으시면서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이라고 알려주셨다. 집 입구에는 ‘춘원 이광수 별장터’ 간판이 서 있었다. 아주머니는 이곳을 보러 오는 사람을 막지 않는다며 마음껏 구경하라고 문을 열어주셨다. 이곳이 ‘별장터’라고 불리는 이유는 당시의 가옥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이 30여 년 전, 다 허물어진 한옥을 사서 새로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나마 형태가 비슷한 한옥이 들어서 무척 다행이라고 J는 생각했다. 가옥은 없지만 당시 춘원이 심었던 나무와 두 개의 우물은 아직 마당에 남아 있었다. 집을 등지고 서니 저 멀리로 북한산이 보였다. 이렇게 좋은 경치를 보며 그는 문학사에 획을 그을 만한 작품들을 남긴 것일까, 하고 J는 생각했다. 마당에 남아 있는 우물을 잠시 내려다 본 후 아주머니가 내미신 방명록에 이름을 남겼다. 위치 홍지동 상명대학교 근처

16:00 예장동 문학의 집 서울
J가 오늘 여정의 마지막으로 선택한 곳은 남산 자락에 위치한 ‘문학의 집 서울’이다. 문학의 집 서울은 현재도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들이 모여 운영하는 문화 공간이다. 한 달에 두 번, 격주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전시회나 작가 강연회가 열린다. 또, 백일장이나 시낭송회, 시화전 등도 끊임없이 개최된다. 작가나 유족, 일반 시민 회원들이 함께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데 1년에 3, 4권씩 그들의 신작을 담은 책을 내기도 하고 외부로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J는 사실 시낭송회에 꼭 한 번 와보고 싶었지만, 오늘은 준비되어 있는 행사가 없어 무척 아쉬웠다. 하지만 오늘은 위치도 알아보고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책 읽는 방’도 둘러볼 겸 찾아가 보기로 결정했다. 책 읽는 방은 초등학생과 그 가족들을 위한 공간으로, 작가들이 엄선한 책들이 빼곡히 진열되어 있다. J는 진열된 책들을 천천히 둘러보면서 책을 좋아하는 조카를 데리고 꼭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시원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J는 5시 즈음 발길을 돌렸다. 5시면 문학의 집이 문을 닫기 때문. J는 아쉬운 마음을 가득 안고 8월 17일부터 열릴 ‘문인 자화상 전시회’ 때 다시 오겠다고 다짐하며 오늘의 문학여행을 마무리했다. 다음에는 서울 근교로 문학여행을 떠나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위치 중구 예장동 적십자사 근처
시간 AM 10:00~PM 5:00
문의 02-778-1026 www.imhs.co.kr

J가 문학여행 중 만난 사람
영인문학관 강인숙 관장
J는 영인문학관을 둘러보던 중 운 좋게 강인숙 관장님을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강 관장님은 “제주도에서 올라오는 손님도 있고, 거제도에서 오는 손님도 있어요. 두 시간 씩 머물다 가는 사람들도 있죠. 비가 오는 날은 지하철역까지 데려다 주면서 이야기도 나누고 그래요”라며 편안하게 웃어 주셨다. 사실 개인적으로 문학관을 운영하는 것이 국내 현실상 쉽지 않다는 것을 J는 알고 있다. 강인숙 관장님은 그 답을 ‘문학에 대한 사랑’이라고 들려주었다. 문학에 대한 사랑 하나로, 퇴직금 등 개인 자금을 쏟아 부어 9년 동안이나 문학관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J는 후에 자신도 저렇게 문학을 사랑하고, 문학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강 관장님은 개인적으로 세상에 하나씩 밖에 없는, 문인 · 화가들이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린 부채들을 무척 좋아하신다며 다음에 전시회를 할 때 꼭 와보라고 추천해 주셨다. J는 꼭 그러겠노라 약속하며 다음번 만남을 기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