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ite Story in Taebaek

하얀 겨울 여행, 태백

도시가 내뿜는 색은 회색 건물을 닮아 흐리멍덩하다. 아무리 창가에 하얀 김이 서려도 회색빛을 벗어나지 못한다. 도시가 인공색소와 네온사인을 필요로 하는 이유다. 하지만 정작 그 안에 살고 있는 도시인의 마음은 공허하다. 그래서 가끔 복잡한 생각의 꼭지를 잠그고, 순백의 세계로 떠날 필요가 있다.

글 김지은 기자 사진 홍기화 기자 취재협조 태백시 www.taebaek.go.kr 리에또 www.lieto.co.kr

올겨울 벌써 두 번이나 독감에 걸렸다. 그것도 2주 간격으로. 한번 앓으면 면역이 생겨 당분간은 해당사항이 없을 줄 알았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참고자료 하나 없는 나만의 오론이었다. 태백여행을 떠나기 전날, 뼈마디에 스민 냉기를 거둬 주르륵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생각했다. ‘서울도 이렇게 추운데 강원도는 오죽할까.’ 생각이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 머릿속 회로는 대략이랬다. 태백->태백산->높다->눈이 많이 오겠지->춥겠다->독감. 사실 너무 유치해서 여기까지는 말 안 하려고 했지만, 나에게 독감은 너무 무서웠고 결국 해골바가지로 마무리되었다. 이렇듯 몸보다 온도가 상승한 두개골의 ‘카오스’를 헤매며 차라리 빨리 태백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물의 지저분한 때를 순식간에 덮어버리는 그 순백의 세상처럼 내 심신도 깨끗하게 치유되기를 바라면서.

순수의 결정체를 기억하라

차를 타고 굽이굽이 이어지는 산길을 달려 높이 올라갔다. 코를 잡고 숨을 내쉬며 두 귀의 먹먹함을 여러 번 해소하고 나서야 태백이 모습을 드러냈다. 해발 700미터에 있는 도시의 향기는 비가 내린 다음 날의 새벽공기처럼 알싸했다. 대도시의 먼지를 빨아들이지 않으려고 무의식적으로 얕게 숨을 쉬던 폐가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들여 마셨다. 구부정한 어깨가 쭉 펴졌고 어딘가 늘 꾹꾹 쑤시던 머리도 박하 향처럼 화~해졌다.

저 멀리 산기슭에서 1미터 정도 높이의 얼음덩어리가 눈에 띄었다. 언뜻 얼음조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인적이 드문 곳이었고 무엇보다 도구를 이용한 날카로운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언젠가 본 적 있는, 겨울에 얼어붙은 분수의 모양과 흡사했다. 솟구치는 물이 점점 얼어 그 모양대로 몸집을 불리다가 땅까지 연결된 모습. 사실 태백의 땅속은 물로 가득하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샘이 솟는데, 겨울이면 간혹 이러한 자연의 조각품이 탄생하기도 하는 것이다.

태백에 샘솟는 여러 갈래의 물줄기 중에는 한강의 발원지, 검룡소도 있다. 금대봉 기슭에 있는 이곳에 가려면 숲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20분 정도 걸어야 한다. 막 들어선 산책로는 누군가 미리 밟아놓은 자국을 따라 만질만질하게 다져져 있다. 하지만 그 길을 조금만 이탈해도 발목까지 눈 속에 푹 잠긴다. 습기를 머금어서인지 마치 라텍스처럼 쫀쫀하고 푹신해 보이는 눈 침대에 잠시 몸을 뉘어보기로 했다. 그러자 자연 전구에 불과했던 햇살이 이불처럼 온몸을 덮어주고, 바람 공기청정기가 숲의 향기를 가득 실어다 주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몸과 마음이 힐링되는 기분이 들었다.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한 오솔길 주변에는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겨울나무가 친절하게 자신의 이름표를 목에 걸고 서 있었다. 피나무, 고로쇠나무, 복자기, 산뽕나무 등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마침내 도착한 검룡소의 크기는 생각보다 작았다. 하지만 석회암 암반을 뚫고 나온 지하수가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멍에서 끊임없이 솟아 세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20여 미터의 완만한 미끄럼틀을 형성한 푸른 이끼와 자갈, 돌, 나뭇잎 등이 숨을 죽이고 물의 행진을 지켜보고 있었다. 불과 몇십 미터 지나지 않아 꽤 불어난 물은 개울이 되었다. 그 후 골지천을 지나 조양강으로, 또다시 동강, 충주호, 남한강, 북한강을 흘러 10일 후면 한강에 다다를 것이다. 514킬로미터의 대장정을 마친 물은 다시 정수과정을 거쳐 우리의 생명수가 된다. 하지만 검룡소에서 솟아난 최초의 상태처럼 맑을 수는 없을게다. 졸졸졸 경쾌한 소리를 내며 흐르는 냇가를 잠시 서성였다. 지금 바라보는 순수의 결정체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서.

고대 자연이 빚은 예술품

태백에는 한강뿐만 아니라 낙동강의 발원지도 있다. 하루에 5톤 정도의 어마어마한 양의 물이 솟아나는 황지연못이다. 이 물은 태백의 계곡을 만나 연화산으로 흘러가는데, 황지천과 철암천이 만나는 곳에서 신비로운 경관을 연출한다. 병풍처럼 우뚝 솟은 기암괴석을 뚫고 그 물이 유유히 흘러가는 것이다. 기암괴석 한쪽에는 천천(穿川)이라는 글씨가 적혀있는데, ‘산을 뚫은 물길’이라는 뜻으로 현재 구문소라 불리는 이곳의 옛 이름이다. 지대가 낮은 곳으로 유연하게 흐르기만 하는 줄 알았던 물의 새로운 발견이다. 이러한 현상이 가능했던 건 뚫린 기암괴석이 물에 녹는 성질을 지닌 석회암이기 때문이다. 구문소 일대의 자연은 전기고생대에 형성된 것으로, 소금흔, 석고흔, 방해석 등의 지층이 널려있고 당시 살았던 생물의 화석이 발견되기도 해 자연 학습장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그런데 막상 구문소에 도착하니 기암괴석에 뚫린 구멍이 하나가 아니었다. 구문소 옆에 자동차가 지나다니는 도로구멍이 하나 더 있었다. 그 구멍 위에는 우혈모기(禹穴牟奇)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적혀있었다. 이곳은 일본 식민지 시절 석탄을 쉽게 운반하기 위해 일본인이 뚫어놓은 길로, 적혀있는 글자에 대해 이해하려면 구문소 생성 과정에 얽힌 전설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옛날에 온 세상이 물바다가 되었을 때 태백산 아래에 있는 마을인 황지와 장성 일대도 물에 잠겼다. 그때 중국 삼성오제의 한 사람이며 단군으로부터 치산치수를 배웠다는 하우씨가 나타나 이곳 바위를 칼로 찌르자 커다란 구멍이 뚫리며 물이 빠져나가 모두 살았다는 내용이다. 우혈모기란 ‘우임금이 뚫어놓은 구문소와 기이하게 닮았다’는 뜻으로 일본인이 억지로 의미를 부여해 놓은 것이다. 실제로 눈앞에 나란히 펼쳐진 두 개의 구멍을 바라보니 마치 장인정신이 깃든 예술품과 어색하게 닮은 모조품을 함께 전시해 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구문소가 전자에 해당한다.

검은색의 재발견

색이 하얗다고 모두 깨끗한 건 아니다. 반대로 검다고 해서 다 지저분한 것도 아니다. 눈이 하얗게 쌓인 태백의 지하에는 투명한 물길만큼이나 신성한 여러 갈래의 검은 길들이 나 있다. 광산촌이 호황을 누리던 시절 형성된 석탄 로드다. 소위 생각하는 석탄의 이미지는 그야말로 깨끗함과는 거리가 멀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태백의 상장동 주민에게는 그렇지 않다. 탄광에서 일하는 가족 걱정에 한시도 마음 편할 날 없게 한 대상이기도 하지만, 자식을 학교 보내고 생계를 꾸리게 해준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다. 상장동은 과거 함태 광산업소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다. 여전히 태백의 중심가이지만 새롭게 들어선 아파트 등으로 인구가 이동하며 사실상 죽어가던 마을이었다. 그러던 차에 이 마을 출신인 허강일 화백이 마을 벽 곳곳에 그림을 그려 넣기 시작했고, 새로운 활기가 피어났다.

벽화는 화백의 어린 시절 추억과 이곳저곳에서 수집한 탄광촌 특유의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그려졌다. 태백시민과 여러 단체의 재능기부를 받아 2년여의 작업 끝에 작년 초 완성되었다. 벽화마다 스토리에 대한 소개 푯말이 세워져 있는데 하나씩 읽으며 천천히 걷다 보면 마치 북적거리고 부유했던 과거의 탄광촌에 놀러 온 듯한 기분이 든다. 수많은 벽화 중 단연 눈에 띄는 건 만 원짜리 지폐를 입에 문 하얀 강아지 만복이다. 만복이는 광산촌이 최대 호황을 누리던 시절을 상징하는 강아지로, 개도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닐 정도로 부유했던 당시의 경제상황을 말해준다. 만복이의 캐릭터는 공모전을 통해 구체화하였는데, 만 원짜리 지폐가 처음 나온 시기가 1973년인 걸 고려하면 아마도 호황의 막바지에 태어난 강아지로 추정된다.

만복이의 그림 앞에서 서성이고 있을 때, 마침 마을의 한 노인이 벽화 앞을 지나갔다. “나도 30년 전에는 광부였어. 탄광 안에서 서로 아옹다옹 싸우기도 많이 했지만 그때가 좋았지.” 백발노인은 그 시절이 떠오른 듯 몇 개 안남은 이빨을 훤히 드러내며 웃었다. 사실 나 역시 태백에 오기 전까지 탄광에 품고 있던 이미지가 그리 밝은 것만은 아니었다. 벽화 속 광부의 손에 들린 병 속의 액체가 괴로운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마시는 술일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 액체는 석탄가루 때문에 호흡이 곤란해지면 주변에 뿌려 먼지를 가라앉히는 빙초산이었다. 탄광의 광부가 언제나 쥐와 함께 있는 모습이 비위생적이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광산이 무너질 때 그 쥐를 따라가면 밖으로 나갈 수 있기 때문에 광부들은 일부러 쥐에게 음식을 나눠 주고, 곁에 둔 것이었다. 스토리가 엉망진창인 드라마를 비하하는 막장이라는 단어가 실은 갱도의 막다른 곳을 의미하며, 부정적인 이미지와 달리 건강한 땀과 신성한 노동을 상징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얀색이 사실은 먼지일 수 있듯이, 검은색도 순수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