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ity Of Flower, Gong Ju

꽃의 도시 공주

공주는 예상치 못한 꽃밭이었다. 백제문화의 산 증인 무령왕릉에서 만난 연꽃, 마곡사의 솔바람 길에 빼곡한 소나무들 사이를 메운 진달래, 공산성과 신원사의 풍경 한 편을 채운 벚꽃무리까지. 공주라는 이름만큼이나 고운 꽃밭을 거닐었다.

글 이소윤 기자 사진 이재계 기자 취재협조 공주시 www.gongju.go.kr 리에또 www.lieto.co.kr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향한다. 뻥 뚫린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는 기분이 내리막길을 내달리듯 마냥 미끈하다. 흔히들 처한 현실보다 나은 현실을 찾거나 무언가로부터 도망갈 때 택하는 방향이 남쪽 아니던가. 마감에 허덕이느라 맑은 하늘은커녕 그 흔한 벚꽃나무도 유심히 들여다보지 못했던 현실과 멀어지니, 이내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잠시나마 유유자적 피신을 하는 느낌이었달까. 이런 본인의 감상과는 하늘과 땅 차이인 생사가 걸린 이유로 같은 여정을 떠났던 나라가 있다. 삼국시대에 화려한 문화를 피워낸 백제. 모든 나라들이 탐내던 한강유역의 한성을 수도로 500년도 넘게 나라를 유지했지만 강경한 고구려의 남진정책으로 이내 한성 땅에서 밀려나고 만다. 전쟁의 상처로 절뚝거리던 그들을 품어준 곳이 공주였다. 천년도 훨씬 전이지만 여전히 발길 닿는 곳마다 그들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있다. 이와 함께 손님들을 반기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꽃이다. 사방팔방 만개한 공주의 꽃들 사이를 거닐다보니 얼굴엔 이내 웃음꽃이 만개하더라.

연꽃이 넘실거리는 왕릉으로, 다시 한 번 수학여행

학창시절, 국사는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 아니었다. 수업시간이 즐거워도 시험점수는 황당하기만 했기에 그리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경주하면 신라’이듯 ‘공주라면 백제’인 곳으로 떠날 채비를 하면서 내심 불안했다. 역사 젬병이 과연 공주를 온전히 느끼고 올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 것이다. 하지만 역시나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꽉 찬 지식보단 활짝 열린 마음이라는 것을 여실히 깨닫고 돌아왔다. 책으로 읽고 말로 듣는 것이 아니라 직접 두발로 거닐며 온몸으로 느낀 배움은 벼락치기로 한 공부보다 오래 기억되는 법. 들르는 곳마다 절로 궁금해지는 백제이야기는 겨울밤 할머니가 들려주시는 옛날이야기만큼이나 흥미로웠다. 어릴 적 멋모르고 떠났던 수학여행과 지금의 수학여행이 얼마나 다른지 경험하는 일도 무척 새롭다.

백제는 한성시대, 웅진시대, 사비시대로 크게 나뉘는데 이는 수도가 어디였느냐를 기준으로 한다. 공주의 옛 지명인 웅진에서 백제가 머문 63년은 웅진시대이다. 사실 623년이라는 백제 역사에서 63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 땅에 이토록 풍성한 문화재와 유물이 남아있는 이유가 뭘까. 짧은 여행을 마치고 조심스레 해본 짐작이 있다. 정말 피곤할 때 딱 삼십분의 낮잠이 절실히 필요하듯, 가장 힘들고 절박하던 백제를 다시 부흥할 수 있도록 재충전시킨 땅이 이곳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공주는 고구려 군과의 전쟁을 피하는 것이 가장 시급했던 백제에게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공주에서 터를 다진 백제는 이 땅에서만 다섯 번 왕권이 교체됐다. 그 중 백제를 다시 일으킨 왕으로 인정받는 25대 무령왕은 사후에도 공주를 보살피는 듯하다. 공주가 백제의 수도로 이토록 유명해진 첫 번째 이유가 무령왕릉이기 때문이다. 이곳이 아니었다면 공주는 백제가 잠시 머물다 떠난 도시로만 기억됐을지 모른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며 고분군을 걷기 시작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천년도 넘는 시간을 견뎌낸 봉분이 이루는 나지막한 언덕들 위로 역사가 잔잔히 물결친다. 위대한 만큼이나 고요하다. 이런 장소가 서울에 있다면 마음이 심란할 때마다 산책을 나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 멀리 금강이 내려다보이고 바로 옆으로는 소나무밭과 갈대밭이 펼쳐지는 구불구불한 오솔길. 그 옆으로는 부드러운 잔디밭이 역사로 울렁이니 머릿속의 사사로운 걱정들은 금세 하찮은 것이 돼버린다. 1호분까지 모두 둘러보고 길을 돌아내려오면 무령왕릉 모형전시관이 있다. 1997년 이후로 무덤내부가 영구적으로 폐쇄되면서 그 내부를 그대로 복원해 전시하는 곳이다. 무령왕릉의 널방에 들어서서 이리저리 살펴보니 다른 무덤과는 다른 점이 보였다. 무덤의 벽면으로 연꽃무늬가 새겨진 벽돌들이 쪼르륵 이어진다. 불교에서 연꽃은 극락왕생을 상징하는 꽃이다. 무령왕과 왕비가 극락으로 가기를 염원하는 마음이 무덤의 벽돌에까지 담긴 것이다. 모형전시관은 말 그대로 무덤의 구조를 재현해놓은 공간이니 더 다양한 유물이 보고 싶다면 공주박물관으로 향하자. 고분군에서 10분 정도만 걸으면 백제의 보물창고에 방문할 수 있다.

솔내음은 진달래꽃을 타고

공주가 여행지로서 갖는 큰 장점 중 하나는 웬만한 명소들을 모두 걸어갈 수 있다는 점이다. 혹은 시내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무료대여 자전거를 이용한다면 더 없이 신난 여정이 될 것이다. 무령왕릉에서 천천히 걸어가도 채 30분이 걸리지 않는 금강 변으로 멋진 산책로 고마나루 솔밭이 있다. 이곳에는 예부터 전해지는 전설이 있다. 옛날 옛적 본래 곰나루라고 불리던 나루터가 내려다보이는 연미산에 처녀곰이 살았다. 처녀곰은 총각 어부를 연모하다 못해 그를 잡아오기에 이른다. 둘은 부부의 연을 맺고 자식까지 둘을 두지만 어부는 결국 도망을 와버리고, 좌절한 어미곰은 자식과 함께 금강에 빠져 죽었다는 아름답고도 슬픈 이야기다. 그래서 이 어미곰의 혼을 달래고 지역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는 백제시대 때부터 이곳의 웅진단에서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연미산에서 실제로 곰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동굴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이다. 고즈넉한 고마나루에는 되도록 금강의 물안개가 차분히 내려앉은 이른 아침에 방문하는 것이 좋다. 아침의 무게로 솔내음이 바닥에 잔잔히 깔려있다. 하루를 시작하며 소나무들이 새로이 뱉어낸 공기를 누구보다 먼저 폐 깊숙이 들이키는 경험을 무엇과 견줄 수 있을까. 솔밭길의 초입에 세워진 어미곰 동상은 떠오르는 태양을 마주한다. 이를 등지고 걸어가는 발걸음 밑으로 공주가 지나온 역사만큼의 솔잎들이 켜켜이 쌓여 푹신하게 밟힌다. 힘차게 꿈틀대는 소나무들 사이로 시선을 고정시키고는 가만히 서서 숨만 쉬어도 충분한 곳이다.

공주에서는 고마나루와 함께 소나무길로 유명한 곳이 하나 더 있다. 공주 태화산에 위치한 마곡사의 솔바람길이다. 봄이면 꽃으로, 가을이면 단풍으로 붉으락푸르락하는 이 아름다운 사찰은 빛바랜 단청이 세월을 느끼게 하는 대웅보전으로 유명하다. 또한 예로부터 기근과 전란의 염려가 없는 곳이라 일제강점기에는 김구 선생이 이곳에 은거하기도 했다. 그런 김구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기라도 한 듯, 현실에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자 템플스테이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절이기도 하다. 김구 선생이 마곡사에 머물며 사색하고 거닐었던 소나무숲길은 지금 세 코스의 산책길이 되었다. 백범길과 명상산책길, 송림숲길이 그것이다. 3킬로미터로 가장 짧은 백범길은 한 시간 남짓 걷는 길이고, 5킬로미터의 명상산책길은 두 시간 정도의 트레킹 코스다. 조금 더 오랜 시간 이곳을 만끽하고 싶다면 11킬로미터의 송림숲길을 유유자적 걸으며 태화산의 구석구석을 둘러보는 것도 좋다. 공주에 주어진 시간이 오직 1박2일이기에 세 코스 중 가장 짧은 백범길을 택했다. 산책길이라는 말도 무색하게 초반 삼십분은 꽤나 가파른 경사가 이어진다. 가쁜 숨으로 얼굴에 웃음기마저 사라지려던 찰나, 마침내 기대하던 그림이 눈앞에 펼쳐졌다. 완만한 산등선을 따라 길옆을 든든히 채우는 소나무 숲이 상쾌하게 이어지고, 허리춤까지 올라오는 진달래꽃 무리는 분홍빛 안개라도 핀 것처럼 아련하다. 그 길을 따라 걷다보니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에 솔바람길 산책이 왜 포함되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끝자락이 아득하리만치 높은 소나무 길을 걷다보면 어수선한 정신을 숲이 품어주는 것 같은 포근함이 찾아온다. 정화된 몸과 마음으로 가장 강한 기가 흐른다는 군왕대에서 산의 정기를 온몸으로 받고 내려오는 걸로 진정한 재충전은 마무리된다.

신원사와 공산성에 드리운 벚꽃 그림자

제대로 걷는 일은 단순히 다리를 움직이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가장 먼저 길과 주변을 눈으로 담아야하고 성실히 그곳의 공기를 호흡하며, 사방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피부로 정취를 느껴야 한다. 이토록 모든 것을 아우르는 걷기를 마음껏 할 수 있어 공주가 좋았다. 여행의 두 번째 날에는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이런 날에는 신원사로 향해야 한다. 비는 세상의 빛과 향기를 한결 짙게 하는 힘을 지녔다. 신원사는 국가적인 산신제를 지냈던 유일한 유적이라 널리 알려진 산신기도장이다. 유명세도 있으니 북적거리지 않을까 걱정했던 기자를 가장 먼저 반긴 것은 신원사 본 건물을 모두 가릴 듯 만발해있는 벚꽃이었다. 작지만 당당한 신원사의 본건물 대웅전과 그 앞에 단아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5층 석탑을 배경으로 내리는 벚꽃 눈에 가시 돋친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푸른 잔디밭 위의 돌 징검다리를 따라 풀이 무성한 샛길로 따라 들어가니 중악단 건물이 금방 눈에 들어온다. 신자들의 소원을 빠짐없이 읊조리는 스님의 음성과 맑은 목탁소리가 그 주변으로 울린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 울림이 중악단 건물만의 신성한 아우라를 만들어낸다. 마주치는 모든 이에게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하게 되는 오묘한 곳이다. 아침의 향기가 점점 옅어질 즈음 하늘에서 해가 보이기 시작한다. 나무가 드리운 산속의 고요함을 뒤로하고 탁 트인 곳에서 기지개를 키고 싶어 공산성으로 향했다.

무령왕릉과 고마나루에서 멀지 않은 공산성에 도착한 이들은 모두 고개를 치켜든다. 우뚝 솟은 그 전경이 모두를 우러러보게 한다. 공산성은 백제가 웅진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방어를 위해 지은 성곽이다. 듬성듬성 남아있는 산성의 옛터 정도를 상상했던 기자는 이곳의 건재함을 목격하고는 두 입이 떡 벌어졌다. 90년대에 섬세한 복원작업을 거쳐 지금은 산성의 원형이 거의 그대로 유지되어 있다. 산성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금강을 밑으로 해발 110미터의 산 능선과 계곡을 둘러쌓으며 포곡형으로 지어진 공산성은 성곽의 총길이가 2.6킬로미터를 넘는다. 성벽 위를 걸어서 한 바퀴 도는데 한 시간정도가 소요된다. 공산성의 정문 격이지만 사실상 서쪽문인 금서루에서 북쪽으로 성벽을 따라 걷다보면 쌍수정이 나온다. 이 앞으로 펼쳐진 공터는 백제 웅진시대의 왕궁이 있던 자리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런 역사의 정중앙에서 웃고 산책하는 공주시민들이 부러웠다. 공산성 쌍수정의 넓은 뜰은 아름드리 벚꽃나무로 수놓여 있고, 조금만 더 들어가면 역사만큼이나 울창한 숲들이 온몸을 상쾌하게 한다. 특히 가파른 내리막이 아찔한 성곽 위에서는 공주시내 최고의 경치를 볼 수 있다. 산성의 북쪽으로는 공주의 구시가지와 유명 유적지들이 한눈에 들어오고, 영은사와 공북루가 있는 남쪽으로는 빛나는 금강과 공주 신시가지 풍경에 가슴이 뻥 뚫린다. 좋은 공기를 마시며 간단한 산보를 하고 싶다면 금서루에서 쌍수정을 지나 바로 영은사로 산성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것이 편하다. 하지만 공산성의 거친 기세에 체력을 단련하고 싶다면 진남루, 만하루가 있는 동쪽의 거친 코스를 통달해보는 것도 좋겠다. 이곳의 바람으로 땀을 식히는 멋진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과거 선조들의 터전에서 후손이 휴식할 수 있는 곳은 그 예가 많지만 공산성은 뭔가 달랐다. 성벽 안에는 오랜 시간을 견딘 정자들은 물론 시원한 숲과 계곡, 언덕과 평지가 공존하니 마치 하나의 독립된 세상 같다. 높은 성곽 안과 밖의 시간이 다르게 흘러온 건 아닐까 상상해본다. 이곳에서 만큼은 백제를 당당히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공주의 지금을 여실히 감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