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vitation from Traditional and Historical City, Suzhou

시공을 거슬러 도착한 낡은 초대장

어미지향魚米之鄕이자 수향水鄕이라. 물고기와 쌀이 풍부하여 살기가 좋은 곳이 소주요, 운하에 에워 쌓여 아름다운 곳 또한 소주다. 지금껏 흘려보내지 않던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곳으로부터 초대장을 받았다. 오래됐지만 그래서 더욱 빛날 수밖에 없는 영광의 도시, 소주의 이야기를 하려한다.

글과 사진 김수현 기자 취재협조 중국국가여유국 www.cnto.or.kr 중국동방항공 www.easternair.co.kr

시간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는 갈라진 흰색 벽과 툭 치면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한 검은색 기와지붕. 무채색으로 가득한 옛 도시의 가운데로 꽉 막힌 도로에 독일제 고급 세단들이 느릿느릿 앞을 향해 나아간다. 소주의 첫인상은 그렇게 과거와 현재라는 차원의 틈새 사이에서 길을 잃어버린 도시로 다가왔다. 옛 시가지 안에서도 고개를 들면 보이는 초고층 건물과 차들조차 들어가지 못하는 작은 길옆으로 떠다니는 나룻배. 고대의 흔적을 보존하면서도 현대에 발맞춰 가려는 두 가지의 움직임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은 과거의 영광을 품에 안고 무럭무럭 자라나는 그들만의 품격 있는 문화였다. 현대문명의 이기에 지친 사람들을 위한 아련함과 정겨움이 묻어나는 옛 도시의 이름은 바로 소주蘇州다.

2,500년 역사의 살아있는 숨결

양쯔 강 유역 도시 중에서도 2,500년이라는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소주는 기원전 514년, 오나라가 이곳에 성을 세우며 시작되었고 이후 수나라 때 경항대운하가 완성되며 본격적으로 발전하였다. 인재가 있다면 신분에 상관없이 능력을 인정하였고 관료들은 나라를 위한 작은 목소리에도 항상 귀를 기울였다. 거기에 1년에 2모작이 가능한 풍요로운 자연환경이 더해져 이 땅을 거친 많은 이들이 입을 한데 모아 말하길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가 있다’라 감탄했다. 소주는 예부터 지금까지도 중국과 강소성 내에서도 부유한 지역으로 꼽힌다. 동서남북을 가로지르는 수로, 대운하와 함께 발달한 경제 덕분에 예부터 도시는 항상 상인들과 공인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각계각층의 부유한 자들과 당대의 예술가들은 이곳에 모여 물의 도시에서의 풍류를 즐겼고, 경치가 유명한 호수 및 정원문화가 발달한 것 또한 이들과 큰 연관이 있다. 북방에 있는 정원은 국가가 만들었기 때문에 규모가 크고 대범한데 비해, 남방에 있는 것들은 꼼꼼한 관리들에 의해 섬세함을 자랑한다. 예로부터 입고 먹을 것이 걱정 없는 동네였는지라 지금까지도 전체적인 소주의 분위기는 풍요로 가득했고, 주민들 역시 발전하는 현대 문명에 순응하는 동시에 그들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보존하기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흐르는 강물과 정원을 기반으로 한 아름다운 도시 환경, 그리고 떠들썩한 거리 위에서 오늘도 소주의 역사와 미래는 함께 숨 쉬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지상낙원의 정취

도시 전체가 정원이라고 해도 될 만큼 물과 자연의 어우러짐으로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소주이지만 그중에서도 졸정원拙政園은 물과 나무, 돌과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며 중국인들의 건축과 자연에 대한 깊은 조예가 드러나는 공간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된 정원은 중국에서도 손꼽히는 5A급 풍경구로 베이징의 이화원, 청두의 피서 산장, 소주의 유원과 함께 중국의 4대 명원 중 하나로 꼽힌다. 명나라 때 지어졌지만 청나라까지 내려오는 동안 계속 주인이 바뀌며 각기 다른 시대상과 취향이 혼합되어 있다. 강남지방에서도 제일간다는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 큰 기대에 부풀어 입구에 도착했는데 웬 돌들이 떡하니 정원을 막고 있다. 마치 이방인의 방문을 반기지 않는 듯 버티고 있는 돌의 정체는 태호. 남방에서는 부의 상징이며 내부가 잘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세워놓은 것이라 한다. 높게 우뚝 서있는 태호석을 지나치니 그제야 시야가 탁 트이며 정원의 환상적인 경관이 두 눈에 들어온다. 황제의 정원과 비교했을 때는 작지만 나무를 많이 심어 아무리 둘러봐도 끝이 보이지 않고 물이 차지하는 면적이 전체의 3/5이라 그 규모가 웅장해 보이기까지 한다. 게다가 개인의 정원에 산까지 인공적으로 만들어 둔 것을 보니 중국인들의 스케일에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나보다. 그렇게 웅장하고 신비로운 세계는 돌을 지나오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졸정원의 의미는 무능하다는 뜻, 여기서는 스스로를 낮추는 말로 자신의 손에서 날려버렸다는 의미를 가진 졸拙자를 써, 정치하는 사람이 일선에서 벗어나 고향에서 나무나 채소를 심고 가꾸는 것을 하루의 일과로 삼는 것을 뜻한다. 명나라 때의 어사 왕헌신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16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완공한 정원은 그가 은퇴와 동시에 지내고 싶었던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그대로 표현했다. 동원, 중원, 서원으로 구분되는 정원은 하루 만에 다 돌기에도 벅찰 정도의 크기. 정원이라고는 하나 나무와 물로 가득한 자연 속에서 조용히 거닐기에도, 고택에 앉아서 여유롭게 휴식을 즐기기에도 좋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실은 정작 주인이었던 왕헌신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지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아름다운 정원을 불과 2년밖에 누리지 못했다는 것. 이것도 모자라 그의 아들은 도박에 빠져 하룻밤 사이에 정원을 다른 이의 손으로 날려버렸다. 마치 ‘졸’이라는 뜻에 부합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그의 인생이 슬프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정원이 건축되는 동안 자신만의 천국을 꿈꾸었다는 점에서다. 그리고 그가 남은 평생을 바쳐 추구한 지상낙원은 오백년이라는 세월을 넘어서까지도 방문하는 이들의 가슴에 더할 나위 없는 행복과 안식을 안겨주고 있다. 그가 남겨놓은 곳에서 행복을 느낀 한 사람으로서 다시 돌아온 도시 안에서 졸정원을 떠올리며 문득문득 천국을 꿈꾼다.

작은 도시의 이야기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랫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가지와 수로를 따라 떠다니는 나룻배. 마치 고전 소설 속 한 장면을 그대로 재현한 듯 한 핑쟝平江역사거리는 소주 사람들 사이에서도 구시가의 축소판이라 불린다. 오래된 거리의 길고 깊숙한 골목에서부터 문화와 예술이 번영한 소주의 옛 정취가 전해져온다. 비슷한 키의 일렬로 늘어선 흰 벽과 검은 지붕의 2층 건물들은 겉으로는 고전적이지만 안에 들어서면 완전히 현대식으로 탈바꿈되었으며 여관, 서점, 찻집 등으로 저마다 소중한 역사와 이야기를 간직한 채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구역의 전체적인 배치 또한 800년 전의 송나라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정부에 의해 고택 보수와 옛 모습을 회복하기 위한 작업이 행해지고 있기 때문. 그렇기에 800년이 지난 21세기에도 800년 전의 지도를 가지고도 곳곳을 거닐 수 있는 곳이 바로 핑쟝역사거리다. 

역사의 흔적을 따라가기 위해 당대 관료와 한량처럼 나룻배를 타고 거리를 유람하기로 했다. 여전히 좁은 길들 사이로는 자동차보다는 자전거와 배가 많아 오늘날까지도 거리와 물길이 함께하고 있었다. 선착장으로 가는 길에는 또 다른 세계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우원이 있다. 다른 정원들에 비해 조용하고 작은 규모지만 섬세하면서도 절제된 안뜰과 연못이 자랑인 곳.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 없어 규모가 작다고는 말했지만 어디까지나 이곳의 정원은 우리가 상상하는 크기 그 이상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테다. 정원을 관람하는 것인지 길을 헤매고 있는 것인지 아리송해질 때쯤 나룻배 앞에 도착했다. 꽤나 진지한 모습의 노파는 이내 이방인들을 향해 미소를 보여주었고 힘차게 강물 아래로 노를 젓기 시작했다. 10명이 탑승한 배를 운행하기에 힘에 부치지 않을까 잠시나마 걱정도 했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먼저 출발하는 배의 노랫소리가 더 크게 들리려 할 때쯤에는 마치 대결이라도 하는 양 목청을 가다듬고 다시 시원하게 노래를 시작했으니 말이다. 눈을 감고 강을 베게 삼아 노파가 부르는 ‘소성고사’에 귀를 기울였다. 과거와 현재가 마주하여 기쁨과 즐거움이 넘쳐나고 한 폭의 그림 같기도, 한 곡의 노래 같기도 한 작은 도시의 이야기. 노랫말의 뜻을 알고 나니 이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여진다. 이곳이야말로 등려군과 노파의 노래 속에서 말하던 소성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소주에 울려 퍼지는 곤곡의 선율

주변 모든 사람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좋아하는 영화는 몇 십번이고 돌려보는 특이한 취미를 가졌지만 특히나 중국과 홍콩영화에 대해서는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다. 중국영화의 사랑의 시작이 된 작품은 초등학교 6학년 때 본 패왕별희. 15세 이상 관람가의 영화를 어떻게 입수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비극적인 스토리와는 별개로 처음 본 경극의 매력은 아직까지도 뚜렷이 가슴 한편에 남아있다. 북경을 대표하는 것이 경극이라면 소주에는 곤곡崑曲이 있다. 강소 군산에서 시작하여 600여 년이라는 중국 전통극 중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졌다. 한때는 중국을 대표하는 극이자 전통극의 어머니 격인 곤곡이었지만, 19세기와 20세기에 성행한 경극에 밀려 지금은 소주를 중심으로 조용히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역사구역 내에 위치한 곤곡박물관은 소주에서 보존되는 100여 개의 회관, 사무소들 중에서도 가장 완벽하게 과거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다. 회관을 정면에서 보았을 때 양쪽에는 관람루가, 전후에는 무대가 마주하고 있다. 완벽한 대칭과 아담하고 정교한 건물이 소주의 옛 건축양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관내에 들어서면 고전 민속 악기 전시실이 있고 과거에 이용했던 이동식 무대까지 깨끗하게 보존되어 그 오랜 역사를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박물관에서 곤곡과 관련한 건축물과 악기를 구경했지만 역시나 소주에 왔으니 곤곡을 직접 감상해 주어야 한다. 여러 가지 작품들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탕헌조의 <모란정> 10착 유원경몽은 관련 내용이 영화로도 개봉되었을 만큼 특히나 유명하다. 55착으로 구성되는 방대한 장편 희곡인 탓에 전편을 무대에 올리려면 몇날 며칠을 지새워야 하기 때문에 보통 10착, 12착, 14착 등을 간추려서 공연한다고 한다. 어린 시절 경극에서 전해온 감동을 곤곡을 통해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시작 전부터 가슴이 쿵쾅거린다. 드디어 조명이 어두워지고 화려한 복장을 한 배우들이 눈앞에 등장했다. 두려낭과 춘향의 섬세한 손짓과 간드러지는 목소리에 관객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그들의 노랫말에 귀를 기울인다. 작품 전체를 음미하려면 대사와 춤이 한데 어우러져야 하는데, 실감 나는 표정과 연기 덕에 극의 분위기와 시나리오가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중국어를 한마디도 모른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지역 사람들도 알아듣기 어려운 옛말의 억양 탓에 무대 위쪽의 화면을 통해 중국어와 영어 자막을 통해 극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으니 말이다. 짧은 곤곡 감상 이후 머릿속은 온통 배우들의 하이톤 목소리와 단아한 멜로디만이 맴돌았다. 게다가 피리, 소, 비파 등이 어우러진 몽환적인 반주 덕에 두려낭이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이 꿈속을 떠다니는 듯 한 기분을 느끼며. 그와 동시에 어린 시절 브라운관을 통해 경극에서 느꼈던 감동의 몇 배가 가슴속으로 밀려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기까지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