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er's Essay :: Spain

Gamino de Santiago

산티아고가 어디에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산티아고를 향해 걷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왜 걷는 걸까? 산티아고 순례길은 대한항공 광고에서도 ‘도전해보고 싶은 유럽’ 순위 중 1위에 올랐다. 유럽 어딘가의 낭만적이고 유서 깊은 아름다운 길로 상상해왔던 산티아고로 가는 비행기에 설레는 마음으로 올라탔다. 
글과 사진 이주영 에디팅 이소윤 기자

이주영 l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
숭의초등학교를 올해 졸업하고, 베세토 국제중학교에 재학 중인 어린 도보여행가. 아시아, 유럽, 미주, 오세아니아 등 다양한 나라로 어린 나이부터 배낭여행을 다녔다. 이런 여행경험을 바탕으로 세계 여행일기 시리즈 책을 준비 중이다.

초등학교 6학년인 나는 산티아고가 유럽 어딘가의 아름다운 곳이라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많은 길 중 총 800킬로미터에 달하는 코스를 걸을 수도 있었지만 작은 나에게는 말도 안 되는 거리였다. 그래서 사리아Sarria에서 산티아고까지 110킬로미터를 걷는 현실적인 길을 선택했다. 최소 110킬로미터를 걸어야 순례자증명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5일간의 일정으로 스페인 마드리드로 들어가서, 기차를 6시간 타고 산티아고 순례길 출발점 사리아로 이동해 ‘알베르게’라는 여행자 숙소를 찾아 들어가는 것도 나에겐 힘든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두려워 집으로 돌아갈까도 생각했지만 왠지 새로운 모험이 펼쳐질 것도 같았다.

110킬로미터 여정의 시작

하지만 순례자 숙소 알베르게에서 난방이 안 돼 밤새 떨며 뒤척이면서 '집으로 갈걸' 후회가 먼저 들었다. 다행히 따뜻한 샤워를 하고 나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다음 날에는 아침을 포기하고 첫 목적지인 포르토마린Portomarin으로 향했다. 무려 23킬로미터나 떨어져있다고 한다. 23킬로미터가 얼마나 될까? 아직 잘 모르겠다. 일단 가보지 뭐! 처음부터 높은 오르막길이 보인다. 첫 오르막길부터 숨이 차고 다리가 아프고 언덕 끝이 아득하다. 3시간도 더 걸었는데 아침을 거른 탓인지 배가 고프고, 숨이 차오를 쯤 저 앞에 식당 간판이 보였다.
보통 산티아고의 모든 식당이나 숙소 알베르게는 순례자 여권에 찍을 스탬프를 준비해놓고 걸어온 거리를 확인해준다. 10개 이상의 스탬프를 받아야만 ‘콤포스텔라’라는 순례자 증명서를 받을 수 있다. 빨리 먹고 싶은 마음에 식당으로 뛰어 들어갔지만 벌써 순례자들이 식당에 가득했다.

첫 목적지까지 30킬로미터

첫날 7시간을 걸어 도착한 포르토마린 알베르게에서 세 번째 스탬프를
찍으니 피로가 확 몰려왔다. 샤워를 하고 빨래만 하고 누웠는데 눈을
뜨니 다시 출발해야 되는 아침이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평소에 보던
유럽과 차이가 많았다. 유럽식 아름다운 성이 곳곳에 있고 눈부신 호수와 멋진 나무, 꽃들이 우거진 길을 상상했는데 지금 걷는 길은 유독 똥이 많다. 내가 평생 살면서 볼 똥을 다 본 것 같다. 어제 밤에 비가 내려
냄새도 심하고 길마저 질척거려서 주위를 잘 살피며 걸어야만 똥을 피할 수 있는 길이다. 똥을 피하며 걷다 보니 어느 새 점심을 먹을 때였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비가 한 방울 두 방울씩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어느새 빗방울이 굵어져 주룩주룩 내린다. 추울 줄 알고 입고
온 스키복으로 빗물이 스민다. 빗물과 한기, 질퍽한 땅이 내 다리를 무겁게 한다. 바람막이 점퍼대신 좀 더 두툼하고 방수가 잘되는 스키복을
입었는데도 춥고, 축축하고, 힘들고, 짜증이 났다. 첫날은 가파른 오르막길이, 둘째 날은 비가 날 괴롭혔다.

순례자들의 보금자리, 알베르게

나는 우리 방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서 머리를 감고, 짐을 쌌다. 등산용 배낭에 속옷, 양말, 세면도구, 핫 팩, 여벌 옷 한 벌 등을 간단하게 챙겼는데도 가방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혹시 버릴만한 불필요한 짐을 찾아 가방을 뒤지는 내 소리에 순례자들의 잠을 깨우게 됐다. 알베르게의 침대는 오는 순서대로 배정되기 때문에 다양한 나라 사람들과 6~8명까지 한방을 사용한다. 남녀가 구분된 곳도 있지만 대부분 같이 사용하는 숙소가 많다. 운이 없는 날은 코를 심하게 고는 사람이나 개 냄새가 나는 사람이 머리 위, 내 옆 침대에서 밤새도록 괴롭힐 수도 있는 곳이다.

서로 에티켓을 지켜야 하는 곳에서 내가 낸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을 깬 외국인 순례자들은 내가 아직 어린이인데다 오며 가며 눈인사를 나눈 사이라 그런지 일그러진 표정을 감추고 아침 인사를 건네주었다. 미안한 생각이 들어 한국에서 준비해 간 핫 팩과 오레오 과자를 항상 다정한 인사를 건네주던 프랑스 순례자에게 내밀었다. 나중에 알게 된 그의 이름은 가브리엘, 그는 순례길 경비를 아끼기 위해 식당에도 들르지 않는 가난한 오빠였다. 내가 건넨 과자와 핫 팩을 한사코 거절하더니 나중엔 자기 가방을 뒤져 딱딱한 빵을 나눠주었다.

산티아고 순례길 위에서는 노란 화살표를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길 곳곳의 노란 화살표가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인도한다. 알베르게가 있는
마을을 조금만 벗어나도 나무가 빼곡한 전원적인 길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또 이 순례길은 내 또래의 어린 순례자를 만나기 어려운 곳이라 나는 어딜 가나 관심과 환영을 받는 인기인이었다. 산티아고 마을 주민과, 모든 외국인 순례자들이 내게 밝은 인사와 화이팅을 외쳐주었다. 처음엔 쑥스럽고 어색해 주저주저하던 나도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며 먼저 인사를 건넬 만큼 자신감과 용기가 생겼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오늘도 힘겹게 걸으며 ‘여긴 아마도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격려하며 함께 걷는, 친구가 되는 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산티아고 성당을 앞두고 찾아온 고비

오늘은 마지막 날. 순례길의 목적지인 산티아고 대성당을 향해 길을 나선다. 오늘을 위해 많은 초콜릿과 과자를 준비해놓았다. 순례길에 있는
대부분의 식당들은 순례자가 적은 겨울에는 영업을 하지 않아서, 겨울에 가는 순례길은 비교적 큰 마을까지 가야만 식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날은 최소 10시간도 넘게 걸어야 하는 거리라 단단히 준비를 하고 길을 나섰다. 가방 안의 랜턴도 꺼내고 남은 핫 팩도 여기저기 몽땅 붙이고 출발했다. 산티아고 대성당에 가까이 갈수록 평소보다 훨씬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난 많은 순례자들을 만나면서 이름으로 기억하기가 힘들어 특징을 기억해서 별명을 붙였다. 날 당황하게 했던 검정팬티, 미스터 빈을 닮은 미국인 아저씨, 텍사스 아저씨, 가난한 오빠 가브리엘 등 별명을 붙이는 놀이도 순례길의 즐거움 중 하나가 되었다.

오늘은 모두가 ‘올라’ 대신 ‘부엔 까미노’라는 인사말을 건넨다. ‘부엔 까미노’가 뭐냐고 묻자, 좋은 길이라는 뜻이란다. 마지막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하길 바라며 건네는 인사란다. 나도 지나가는 사람을 볼 때마다 “부엔 까미노!”라고 크게 외쳤다.

40킬로미터 정도를 가야만 도착하는 마지막 코스로 접어들면서 점점 걸음이 빨라졌다. 페이스 조절을 잘해야만 갈 수 있는 거리라는 걸 알
면서도 걸음이 자꾸만 빨라진다. 같이 걷는 미스터 빈 아저씨가 뛰는 포즈를 취하며 나에게 장난을 걸었다. 곁을 지나는 순례자들도 내 배낭을 두드리며 힘내라는 화이팅을 보태며 지나간다. 잠깐의 휴식도 없이 앞만 보고 걷기만 했다. 어느덧 해가 기울고 밤이 깊어지고,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을 랜턴으로 비춰가며 걷고 또 걸었다. 다행히 노란색 화살표가 밤에는 형광 빛으로 빛나 방향을 잃지 않고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점점 힘들어진다. 발에 물집이 잡혀 쓰라리고, 다리도 아픈데 배낭이 너무 무겁게 내 어깨와 등을 짓눌러 길바닥에 배낭을 버리고 싶었다. 한쪽 발로만 몸을 지탱하며 쩔뚝쩔뚝 걸어갔다. 어두워지면서 기온이 뚝 떨어진데다 배도 고프니 그냥 다 포기하고 길에 누워버리고 싶다. 도대체 왜 여길 걷고 있는지, 이런 걸 왜 경험해야 하는지, 여기가 왜 와보고 싶었는지, 이 길에 끝이 있긴 한 건지, 후회가 밀려올 때쯤 멀리서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산티아고 시내의 불빛이었다.

마침내 도착!

마침내 빨간 불빛이 커지면서 최종 목적지인 산티아고 대성당이 보였다. 드디어 끝이다. 아침 8시에 출발해서 밤 11시가 넘어서야 시내로 들어올 수 있었다. 비록 110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산티아고 중 가장 짧은 코스이지만 어린 나는 너무나 힘들었다. 보통은 300킬로미터에서 800킬로미터 정도를 계획하고 온다는데, 모든 순례자들이 참 대단하다. 많은 사람들이 완주를 하기도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포기하고 돌아가기도 한다고 들었다. 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다는 완주 증서인 콤포스텔라를 받아 들고 나서야 산티아고에 도착했음을 실감했다. 옆에 있던 미스터 빈 아저씨가 나에게 최고라며 엄지손가락을 보여주었다. 갑자기 내가 자랑스러워졌다. 엄마가 이곳에 나를 보낸 이유가 이제야 이해된다.

여전히 귀에 생생한 부엔 까미노

좋은 길이란 뜻의 ‘부엔 까미노’는 내가 들은 언어 중 가장 아름다운 단어가 아닐까? 아름다운 성, 눈부신 호수, 화려한 꽃길을 상상하며
시작한 순례는 사실 춥고, 배고프고, 지치고, 힘들고, 포기하고 싶을 만큼 고생스러운 길이었지만 그 길 위에서 난 작은 것에 감사하며, 많은 순례자들의 배려와 따듯한 인사 한마디가 얼마나 힘이 되고 용기를 주는지 알게 되었다. 지하철 식수대, 따뜻한 온수, 공중화장실의 휴지 등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 아무 편의점에 들어가서 살 수 있는 생수 한 병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산티아고 길을 걷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또한 힘들고 지칠 때 서로 건넨 말 한마디가 그렇게 힘을 주고, 가슴 깊이 남게 될 줄은 몰랐다. 나이도, 인종도, 문화도,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서로에게 건넨 “부엔 까미오”란 인사가 아직도 내 귀에 생생히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