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oatia :: Plitvice

Plitvice Where the Queen of Water Lives

물의 여왕과 함께 한 산책, 플리트비체

몸에 물 한 방울 닿지 않았다. 하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눈과 귀, 코, 폐, 심장까지 싱그러운 물줄기로 흠뻑 젖은 기분이다.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유명한 국립공원, 플리트비체에서 멋진 산책을 즐긴 후의 감정은 이러했다. 우아하면서도 넉넉한 플리트비체는 물의 여왕이 살고 있는 거대한 궁전과도 같다. 여왕과 가까워진 물들의 몸짓은 그 어느 곳에서보다 강인하다.
글 이소윤 기자 사진 최은주 기자 취재협조 카페드유럽 www.cafedeeurope.com, 한진관광 www.kaltour.com

1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의 호수들은 수많은 송어의 보금자리다. 햇빛에 살짝 닿은 송어의 지느러미가 발갛게 빛난다. 
2 나무 길 아래로 물의 발걸음이 찰랑거린다. 공원에서는 저렇게 반려동물과 함께 맑은 공기와 물을 감상하는 이들이 자주 보였다. 
3 호수 상 · 중 · 하류에 세 곳의 정거장을 갖는 파노라마 열차는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30분에 한 번씩 정류장 사이로 운행된다.

플리트비체의 물을 흐르게 하는 중력에 감사했다. 크로아티아의 국토처럼 기다란 부지를 따라 줄줄이 이어지는 플리트비체 국립공원Plitvice National Park의 수많은 호수와 폭포들을 바라보며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이뿐이었다. 유네스코도 인정한 이곳의 물에는 내가 살아오며 마시고 헤엄치고 가까이 했던 물들과는 확연히 다른 무언가가 있다. 물이 고이는 곳이면 파란빛을 뿜으며 잠에 빠져들다가도, 어느샌가 다시 생동감 넘치는 물살을 일으키며 아래로 아래로 달려 나가는 물들의 몸짓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부드러운 유기체와 같다. 그 모습에서는 오묘한 우아함과 위압적인 강인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상상 속 물의 여왕처럼. 아드리아해를 따라 이어지는 지중해풍 도시 중에서 유명한 관광지를 많이 지니는 크로아티아이기에 이토록 울창하고 수분감이 가득한 광경을 만날 수 있는 명소는거의 플리트비체가 유일하다.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와 서쪽 해안의 작은 도시 자다르를 직선으로 이었을 때 그 가운데 쯤에 위치하는 플리트비체. 이 국립공원은 발칸 반도 서쪽의 디나르알프스Dinar Alps 산맥 속 카르스트 지형이 만들어낸 자연의 걸작이다. 공원에 자리하는 크고 작은 16개의 호수들이 차곡차곡 낮아지는 계단식으로 이어지며 그 사이로 아름다운 폭포들을 흩뿌린다. 여러 호수 중 가장 상류에 위치하는 프로찬스코Pro..ansko 호수와 중하류의 코냐크Kozjak 호수는 제일 넓은 면적으로 전체 부지의 8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바다처럼 넓은 프로찬스코 호수에서부터 시작되는 물줄기들은 백운암 지반이 오랜 시간 침식작용으로 만들어낸 계단식 지형을 따라 16개의 호수를 만들며 행진한다. 싱싱한 물줄기는 하류의 코냐크 호수에서 숨을 한 번 고르고, 호수 옆 산 위를 흐르던 플리트비카Plitvica 강물이 쏟아내는 78미터 높이의 벨리키Veliki 폭포가 일으키는 물거품을
맞으며 속도를 서서히 낮춘다. 그렇게 코라나Korana 강물에 몸을 섞으면서 화려한 행진에 막을 내리는 것이다.

역동적인 물길을 따라 걷는 2시간

이토록 웅장한 규모이니 물들의 화려한 행렬을 모두 감상하기 위해서는 최소 이틀의 시간이 필요하다. 물길 주변으로 깔려 있는 인도의 길이만 총 18킬로미터이고 그 안에서 파노라마 열차와 보트에도 탑승이 가능하다. 방문객은 상류와 하류 호수 전체를 어느 방향으로 감상하고, 열차와 보트를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소요시간과 감상이 다양한 총 10개 코스 중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다. 국립공원에 마련된 A, B, C, E, F, H, F, G1, G2, K1, K2 경로들 중 일행은 E코스를 택했다. 파노라마 열차를 타고 입구2에서 입구3까지 올라간 후, 가장 상류 지점에서부터 하류의 코냐크 호수까지 플리트비체의 호수 대부분을 감상하며 트레킹을 즐긴 후, 마지막으로 2분 정도의 보트 탑승까지 가능한 코스였다. 사실 하루 미만으로 공원에 방문하는 여행자들은 플리트비체에서 제일 높은 폭포인 벨리키 폭포가 속하는 하류 호수로의 트레킹을 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방문한 당시에는 전날의 호우로 높아진 수위 때문에 벨리키 폭포 인근의 길이 잠긴 상태였다. 성수기인 9월이 지나면 비 오는 날이 잦아지면서 흔히 생기는 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수위의 영향을 받지 않는 폭포 건너편 산길 코스를 추가했다. 단순한 폭포 관람이 아닌 국립공원 전체를 감상하는 일이기에 이토록 방문하는 당시의 계절과 기후에 따라 매일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플리트비체의 또 다른 매력이다.

입구2에서 출발한 파노라마 열차가 호수의 상류에까지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20분 남짓이다. 이름 그대로 온통 창으로 뒤덮인 열차
안에선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플리트비체 호수들의 아름다움을 파노라마로 감상할 수 있다. 열차는 공원 내에 마련해둔 입구1, 2, 3 총 3개의
정거장을 돌며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돕는다. 매 정거장에선 최소 30분에 한 대씩 열차가 출발한다. 우리가 택한 E코스는 입구2에서 입구3까지 열차를 통해 이동하는 코스다. 입구3 주변으로는 간단한 식사나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길 간단한 편의시설들이 마련돼 있었다. 여유로운 사람들을 구경하며 어느 덧 프로찬스코 호수 곁으로 부쩍 다가간다. 인도를 따라 몇 걸음 떼자마자 바다처럼 넓은 프로찬스코 호수의 전경이 가슴을 탁 틔운다. 호수의 곁을 따라 이어지는 모든 인도는 오로지 나무로만 친환경적으로 만들어진 길이다. 정겨운 나무 길은 수면 바로 위에서 찰랑이는 호수 물에 몸을 적셔가며 우리의 발길이 호수와 가장 가까울 수 있도록 돕는다.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은 1995년부터 관광지로서 새로 복원되기 시작해, 이 자연적인 길들을 완성하는 데는 그로부터 몇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뭉뚝하게 자른 나무들을 이어놓은 길이라 내심 불안할지 모르지만 시시때때로 물이 차오르는 호수 위에서도 묵묵히 자연을 받아들이며 제 기능에까지 충실할 만큼 견고하다. 길 사정이 이러하니 플리트비체 호수에 방문하기 위해선 밑창이 두터운 신발을 신는 편이 좋다. 2시간 이상의 트레킹을 천천히 편안하게 즐기고 싶다면 말이다.

1 플리트비체의 폭포가 이렇다. 번지점프처럼 단번에 몸을 내던지지 않고 바위와 풀의 모양새를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린다. 2 5 호수 트레킹이 중류에 가까워질수록 폭포의 높이가 점점 높아진다. 미처 호수 속으로 빠져들지 못한 물방울들이 공기 중에서 남아 청량한 미스트처럼 기분을 좋게 한다. 3 4 상류 호수에서는 호수와 숲을 골고루 탐방할 수 있다. 6 오직 나무로만 지어진 인도가 친환경적인 트레킹을 완성시킨다. 7 반려동물은 물론 어린 자녀와 함께 해도 좋은 건강한 길들이 이어진다. 플리트비체가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다.

1 4 갈로바츠 호수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주변 숲과 함께 비현실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영화 ‘아바타’의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이곳에서 어떤 영감을 받았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2 맑게 빛나는 물이 일으키는 물살에서 유기체과 같은 강인함을 느꼈다. 
3 호수 주변으로 조성된 건강한 숲의 나무들은 이끼 옷을 자주 입고 있다. 조심스레 만져보면 갓 씻고 말린 강아지 털처럼 보드럽다.

하루하루 조금씩 달라지는 자연의 일기

프로찬스코 호수 이후로 아담한 호수 두 개를 지난 후 갈로바츠Galovac 호수에 들어서는 순간, 발길이 스스로 속력을 낮추기 시작했다. 이전 호수에서 떨어지는 물이 폭포가 되어 병풍처럼 펼쳐지는 경관 앞에선 누구라도 잠시 넋을 잃는다. 곧 다가올 10월을 맞아 조금씩 단풍 물로 알록달록 새 옷을 입어가던 주변의 숲과 함께 우아한 폭포가 넓게 펼쳐지는 모습은 물 위로 작은 낙원의 섬이 둥둥 떠 있는 것만 같다. 더불어 호수 물이 바로 옆에서 찰랑이는 흙길을 걷다보면 물속 가득 보이는 송어 떼들도 또 다른 즐거움이 된다. 그렇게 상류 호수의 청량한 멋에 취해 2시간쯤 걸었나보다. 그중 처음 한 시간은 폭포들을 만날 때마다 속으로 횟수를 세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상류에서 규모가 큰 편인 갈로바츠 호를 지나 코냐크 호수에 가까워질수록 고개만 돌리면 쏟아지는 폭포들에 열심히 세어 놓았던 횟수는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초반의 폭포들은 높이가 상당하지는 않지만 딱 감상하기 좋은 위치에서 그림 같은 광경을 자아내는 편이라면, 하류로 가까워질수록 폭포들의 높이는 높아지고 물줄기도 굵어진다. 하지만 플리트비체 호수의 폭포들이 한결같이 지니는 공통점이 있다. 이곳의 폭포들은 단순히 높은 곳에서 한 번에 뚝 떨어지는 물줄기가 아니다. 나무의 뿌리와 길게 자란 수풀, 울룩불룩 솟은 바위 절벽의 표면을 따라 여러 갈래로 흩뿌려진다. 울퉁불퉁한 백운암 지반을 따라 개구진 물들이 자기 멋대로 신나게 샘솟는 것만 같다. 폭포는 그렇게 부드러운 면사포가 되어 주변 바위와 식물의 모양을 그대로 드러낸다. 지구의 빙하기 이후부터 형성되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플리트비체의 매력은 한결같지 않다는 점에 있다. 석회질 지반을 따라 흐르는 물들은 수천 년에 걸쳐 계곡의 깊이와 모양을 매일 조금씩 다르게 침식시켜왔다. 길은 폭포와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발밑을 더욱 잘 살펴야한다. 여름이 끝나가며 호수의 수량이 늘어나면 많은 길들이 잠수교처럼 꼬르륵 물에 잠겨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이 풍부해지면 좋은 점도 있다. 많은 물이 떨어지는 폭포 주변으로는 물의 힘으로 잠시 중력을 잊은 물방울들이 천연 미스트가 되어 부유한다. 숲의 청정한 공기와 맑은 수증기가 뒤섞이며 탄생하는 이 촉촉한 공기는 그 속에 한 시간만 서있으면 모든 병이든 치유될 듯 청량하다.

7,000년간 매일 새로운 역사가 흐른 푸른 호수

이토록 눈부신 플리트비체가 한때 전쟁터였다면 그 누가 믿을 수 있을까? 플리트비체는 사실상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최초로 시작된 장소이다. 함께 유고슬라비아 소속이었던 공화국 세르비아의 극단주의자들이 처음 플리트비체에서 국립공원 경찰관을 살해한 사건이 내전의 결정적인 발단이 됐기 때문이다. 전쟁은 몇 년 후 막을 내렸지만 여전히 당시 세르비아군의 막사로 쓰였던 국립공원 내 건물이 호텔로 운영되고 있기도 하다. 크로아티아 군대가 1995년에 탈환하기 전까지 호수는 ‘악마의 정원’으로 알려진 과거 별명처럼 지독한 아름다움의 악명을 떨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첩첩산중 산맥 사이에 위치하니 과거에는 사람의 발길이 닿기 더욱 어려운 탓이었다. 직접 호수를 마주해 본 이들은 매일 파란색, 초록색, 회색 등으로 멋대로 색깔을 바꿔 입는 호수의 물 빛깔에 감탄과 동시에 경외심마저 느꼈을 것이다. 실제로 플리트비체의 물은 매일의 날씨와 해 밝기에 따라 다양한 색깔을 수면에 띄운다. 현세에 들어 이는 호수의 물로 녹아 든 석회질 성분이 이유인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오묘한 자연현상에 숨은 과학적인 이유를 몰랐던 과거 사람들에게 플리트비체는 어떤 초자연적인 힘이 작용하는 마법의 호수처럼 보였을지 모른다. 물론 지금은 전쟁의 상처와 오해가 남아 있던 허물을 모두 씻고, 매년 자연에 탄식하길 바라는 백만 명에 가까운 여행자들을 위해 열려 있지만 말이다.

벨리키 폭포를 가까이 보기 위해 많은 이들이 포기하는 상류 호수에서의 여정은 예상치 못한 기쁨이었다. 남미의 이과수 폭포가 그렇듯, 폭포의 규모가 커질수록 적당히 먼 거리에서 바라보는 것이 더욱 아름답다는 사실을 더욱 체감했달까. 벨리키 폭포의 바로 아래까지 이어지는 길 대신 파노라마 열차의 첫 번째 정거장에서부터 공원의 입구1까지 이어지는 산길은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다. 길을 따라 줄줄이 나타나는 포토 스팟들을 발견하는 걸음도 만만치 않은 감탄의 연속이다. 특히 플리트비체를 상징하는 모든 사진들은 이 길목에서 탄생하는 작품이니 체험만큼이나 멋진 사진으로 추억을 남기고 싶다면 꼭 코스에 포함시키자. 여전히 눈을 감고 잠시만 추억해도 온몸으로 맑은 물이 밀치고 들어오는 것만 같은 경이로운 땅, 플리트비체. 물들의 침식작용으로, 또 계절마다 날마다 달라지는 수량으로 단 하루도 같은 얼굴로 그대를 반기지 않을 것이다. 매번 새로울 푸른 호수와 폭포들의 힘찬 행진이 나는 그래서 더욱 기대된다.

개장 시간 08:00~17:00
일반 성인 1일권 가격 7~8월 180쿠나, 11월~3월 55쿠나, 나머지 기간 110쿠나
(국립공원 내 호텔에서 숙박할 경우 1일권으로 이틀 입장이 가능하다.)
사이트 www.tzplitvice.h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