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 Buenos Aires

South America in 60 Days 3rd city Scent of Tango in Buenos Aires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탱고에 빠질 확률

‘남미의 유럽’이라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수식어는 남미 고유의 색을 찾아 나선 여행자에게 정말이지 재미없게 들린다. 남미 배낭여행의 세 번째 도시가 아니라 서른 번째 정도로 미뤄두고 싶다. 물론 한 번 보면 넋을 잃고 두 번 보면 머릿속에서 따라 추고 자꾸 보면 나도 모르게 몸을 움직이게 하는 탱고를 몰랐을 때 하는 소리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산다고 모두 탱고를 추는 건 아니지만, 거리를 걷다 보면 감미로운 선율에 몸을 맡긴 사람들과 심심치 않게 마주친다. 그러니 이 도시에서 탱고에 전염될 확률은 매우 높다. 결국 탱고를 품은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글과 사진 김지은 (여행 칼럼니스트)

여기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플로리다 거리. 깜비오, 깜비오- 환전상들의 기계적인 목소리가 뒤섞인 카오스 속을 헤매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선율 하나를 따라가는 중이다. 물 흐르듯 부드럽게 때로는 불타오르듯 격정적인 리듬으로 감성을 어루만지는 소리. 분명 사람이 아닌 기계가 흘려보내는 음악이지만 어쩐지 거리 사람들이 건네는 말보다 훨씬 인간적으로 들린다. 선율의 발원지, 발걸음이 멈춘 그곳엔 남녀 한 쌍이 탱고를 추고 있다. 그들의 우아하고 강렬한 몸짓에도 주변을 감싼 음악과 비슷한 감성이 묻어난다. 나와 어깨를 맞댄 사람들은 그 진한 향에 취해 갈 길도 잃어버린 채 자리에 주저앉아 버린다.

그녀도 그중 한 명이다. “탱고 배우러 여기 왔어요. 두 달 정도 머물다 파리로 돌아갈 거에요. 그때쯤이면 저들같이 자유롭게 출 수 있을까요?” 환하게 웃는 얼굴이 여자 댄서의 머리에 달린 장미처럼 붉게 피어난다. 단지 춤 하나를 위해 낯선 도시로 떠나온 여행. 컨버스 운동화를 신은 수수한 차림의 그녀지만 왠지 섹시하게 보인다. 같은 기간 동안 남미를 여행하며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고작 사일이라는 시간밖에 할애하지 않은 내가, 곧 그녀에게 날 수도 있는 탱고 향기를 탐낸다는 건 그야말로 욕심이다. 금세 잊어버릴 얕은 레슨도 원치 않는다. 하지만 탱고의 향기를 질리도록 맡기엔 넉넉한 시간임이 분명하다. 온 신경을 집중해 보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테다.

왠지 멋 부리고 싶어지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남미의 늦여름에 해당하는 2월 말이지만, 사계절이 뚜렷해야 할 팜파스의 대도시에는 서늘함이 감돌았다. 파리를 모델로 과거에 지어 올린 고풍스러운 건물, 북미나 아시아 등 대도시를 수놓은 것과 비슷한 높고 현대적인 빌딩, 그리고 그사이의 자투리땅에 뒤죽박죽 들어선 알 수 없는 양식의 건축물이 얽히고설켜 만들어낸 도시의 그림자. 아마 그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례 없이 선선한 바람까지 불고 있는 차가운 도시에서 뜻밖에 훈훈했던 건, 남은 얼음에 옅게 벤 셔벳처럼 빛바랜 페인트 벽과 그 위에 마구 그려놓은 저렴한 광고들이었다. 어딘가 촌스러운 유럽 같기도 하고, (같은 느낌을 다른 단어로 표현했을 뿐인데 오히려 첨단을 걷는 듯한 느낌을 주는) ‘빈티지다운’ 이 도시 속에 있다 보니 왠지 멋을 부리고 싶어졌다.

19세기 말, 아르헨티나 드림을 꿈꾸며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건너와 부두 노동자나 선원으로, 혹은 지금의 도시가 있기까지 건물 짓는 일꾼으로 초석을 다진 이민자들 가슴에도 가끔 이런 바람이 불었을 것이다. 그런 날엔 옷장에서 가장 멋진 옷을 꺼내 입고 탱고를 추러 작은 항구마을로 향했다. 흥 많은 이탈리아와 스페인 출신 이민자들의 주도하에 현란한 스텝을 밟으며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에 노동의 힘겨움을 날려 보냈다. 하지만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엔 여자보다 남자의 수가 훨씬 많았다. 그래서 지금과는 조금 다른 조합으로 춤을 추었다. 영화 <해피투게더>의 한 장면처럼 남자끼리 탱고를 추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서로 사랑하는 사이인 보영과 아휘의 춤같이 부드럽고 끈적이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귀한 여인을 차지하기 위해 춤을 겨루는 거칠고 낭만적인 베틀에 가까웠다. 강렬하고 유연한 동작으로 춤을 추며 여자들을 유혹하고 자연스레 껴안는 영리한 방법으로 이용하기도 했는데, 이것이 탱고 특유의 박자와 마초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그들에게 탱고는 가장 재미있는 놀이이자 만남의 수단이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잊게 하는 존재이자, 허세와 멋을 마음껏 표현하는 예술이었던 것이다.이렇게 부에노스아이레스는 과거부터 자연 천지인 투박한 남미에서 문화 요충지 역할을 해왔다. 인간의 본능 중 하나인 문화 형성 욕구를 해소하는.

아르헨티나 탱고의 발상지 라보카

내내 신고 다니던 방수 등산화를 벗어 던지고 산뜻한 단화로 갈아 신었다. 둔탁한 항공모함에 갇혀 있다가 날렵한 보트로 갈아탄 것처럼 발걸음이 한층 가벼워졌다. 실용적인 여행자의 최대 사치품, 샤랄라한 스카프도 곱게 두르고 과거 이민자들이 탱고를 추던 항구마을 라보카La Boca로 향했다. 이곳이라면 선조의 환희를 재현하는 댄서들이 있을 것만 같았다. 왠지 영혼까지 멋있을 것 같은 그들의 춤을 감상하는데 최소한의 예의를 갖춘 것이다.

우선 라보카에서 가장 유명한 까미니또Caminito를 찾았다. 100미터 남짓한 짧은 거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도심과 대조적으로 강렬한 색채를 띠었다. 길을 따라 늘어선 집들의 색감 때문이었다. 빨강, 파랑, 초록, 파스텔 등 다양한 색으로 페인트가 칠해진 양철 판자가 퀼트처럼 벽을 이루고 있었다. 사실 라보카는 가난한 사람들이 살던 동네였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집 꾸미기가 다 뭐란 말인가. 배에 칠하고 남은 페인트를 가져와 덧바르는 게 고작이었다. 색이 통일되지 못하고 제각각인 독특한 풍경은 그렇게 연출된 것이다. 어찌 되었건 이 싸구려 건물들은 도심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남미 특유의 열정적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다.

까미니또의 길 끝에서 그렇게 바라던 풍경과 마주했다. 음악에 몸을 맡긴 남녀가 있었다. 탱고의 발상지인 라보카의 댄서들이라 더욱 기대됐다. 하지만 타이밍을 잘못 맞춘 건지 춤은 금방 끝났다. 아쉽게 돌아서려는데 남자 댄서가 내게 다가와 춤 청하는 자세를 취하는 게 아닌가. 평소 성격대로라면 뻣뻣한 로봇처럼 뒷걸음질 쳤겠지만, 하필 얼마 전 영화 <여인의 향기>를 감명 깊게 본 터였다. “탱고는 실수할 게 없어요. 인생과 달리 단순하죠. 만일 실수하면 스텝이 엉키고, 그게 바로 탱고죠.” 머릿속 알파치노의 응원을 받으며 그를 따라갔다. 춤추기 좋아 보이는 평평한 길 위에 선 남자 댄서는 분위기를 위해선지 빨간 스카프와 인조 꽃으로 금세 나를 치장했다. 한 손으로 내 오른쪽 다리를 척 들어 올리고 앙드레김 패션쇼 모델이라도 된 것처럼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져다 댔다. 순간, 찰칵. 이번엔 이글거리는 강렬한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며 다시 한 번 찰칵. 잠시 맡긴 내 휴대폰을 능숙하게 켠 여자 댄서가 사진을 찍고 있었다. 곧 그가 두 번째 손을 내밀었다. 이번엔 나도 제대로 이해했다. 값을 지불할 차례였다. 그는 능글맞게 한 마디 덧붙였다. 주고 싶은 만큼만 줘. 순간 스텝이 아니라 머릿속이 엉키고 영혼이 너덜너덜해진 기분이었지만 피식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 상황이 웃긴 건 사실이었다.

결론적으로 잠시 머문 라보카에서 탱고의 진정한 정신을 찾을 순 없었다. 그저 관광객을 위한 장소로 느껴질 뿐이었다. 까미니또의 건물 대부분은 우리나라 인사동처럼 관광 기념품을 파는 가게로 탈바꿈해 있었다. 엽서, 그림, 소품 등 탱고 관련 물건들과 아르헨티나 여행의 기념품이 될 만한 것들 이를테면 호박으로 만든 마테 찻잔 구암빠, 마테 잎을 걸러주는 쇠 빨대 봄빌야 등을 팔고 있었다. 과거의 영광을 관광 상품화시켜 파는 것은 전 세계의 공통코드이다. 그들은 오히려 선조가 후세에 남긴 선물이라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정으로 탱고를 즐기던 과거의 항구 사람들과 경제가 악화하여 밥벌이 수단으로 탱고를 팔아야만 하는 지금의 젊은이들은 같은 걸 하더라도 이렇게 다른 향기가 났다. 내가 맡은 라보카의 향은 처음엔 좋지만 확 질려버리는 인공 향 같았다. 다시 받은 휴대폰 속엔 아이러니하게도 그동안 여행하며 찍은 사진 중 가장 그럴듯하고 남미다운 사진이 담겨 있었다. 이런 곳에서 여행자는 적당히 웃고 즐기면 그만인 것이다.

1 부에노스아이레스 라보카의 까미니또 거리. 형형색색의 양철 판자가 퀼트처럼 벽을 이룬다. 
2 라보카의 거리에서 탱고를 추는 댄서들. 
3 화폭에 담긴 까미니또 거리와 탱고 댄서들. 까미니또 거리는 예술가들에게 사랑받는 곳이기도 하다. 
4 플로리다 거리에서 기타 치며 노래하는 길거리 뮤지션. 맨발이 인상적인 그녀지만, 탱고보단 이목을 끌지 못한다. 
5 라보카의 기념품 숍에서 팔고 있는 마테 찻잔 구암빠와 잎을 걸러주는 쇠 빨대 봄빌야.

탱고의 거장 까를로스 가르델

탱고를 논할 때 까를로스 가르델Carlos Gardel을 빼놓을 수 없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엄마를 따라 부흥기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건너온 그는, 1910년 데뷔해 탱고 가수 겸 작곡가로 활동한다. 수많은 명곡을 만들며 부둣가의 하층민이나 즐기는 거로 인식되던 탱고를 아르헨티나의 어엿한 문화로 발전시킨다. 영화 <여인의 향기>의 유명한 OST ‘Por Una Cabeza’ 역시 그의 작품이다. 하지만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아 하늘이 시샘했던 걸까. 그는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에 비행기 사고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어떤 분야에서 최고인 사람을 칭할 때 ‘그는 가르델이다’라는 표현을 쓴다. 가르델에 대한 여전한 사랑과 존경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번엔 그의 발자취를 따라나설 차례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지하철 숩떼를 타고 그와 같은 이름을 가진 역에서 내렸다. 까를로스 가르델 역을 빠져나와 조금 걸으니 그의 동상이 온화한 자태로 서 있는 길이 보였다. 보통 지하철역 이름은 역세권의 특징을 담고 있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이 일대는 가르델의 숨결이 진하게 묻어난다. 그의 지역이라는 걸 입증이라도 하듯 거리 곳곳에 벽화가 그려져 있고, 그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밀롱가(탱고를 추는 클럽)와 탱고 쇼를 공연하는 극장이 포진해 있다. 한편에는 그가 살았던 생가를 개조해 만든 까를로스 가르델 박물관Museo casa carlos gardel도 있다. 가르델이 사용했던 손때 묻은 물건들과 반도네온, 기타, 피아노 같은 탱고 관련 악기들, 그가 출연했던 영화 포스터와 기사 등으로 가득 차 있는 곳이다. 한 바퀴 쓱 돌아보면 그에 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탱고의 역사,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산층의 생활상까지 한눈에 볼 수 있다.

하지만 낮에 찾은 이 일대는 좀 휑하고 음침한 분위기가 났다. 동양 여자 혼자 돌아다니는 걸 눈여겨본 경찰들이 예의주시하며 조심하라고 경고를 보냈다. 하긴, 여행객이 아닌 이상 누가 평일 대낮부터 탱고를 찾아 헤매겠는가. 라보카가 탱고를 파는 곳이라면 여긴 진정으로 탱고를 즐기는 사람들의 구역인 것이다.

가르델의 이름을 건 탱고 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마지막 밤, 까를로스 가르델 역을 다시 찾았다. 그의 음악으로 구성된 탱고 쇼로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서다. 언젠가 영상으로 접했던 충격적일 만큼 아름다운 탱고 무용수들의 몸짓을 직접 보지 않고 떠난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플로리다 거리의 한 부스에서 미리 구매한 공연 티켓에는 두툼한 아르헨티나 소고기 스테이크와 와인 만찬이 포함되어 있었다. 음식이 나오고 거의 다 비울 때쯤 탱고 공연이 시작되었다. 위층 투명한 부스에서 소형 오케스트라가 가르델의 음악을 라이브로 연주하면 탱고 무용수와 가수가 아래층 무대에 차례로 등장해 음악에 맞춰 춤과 노래를 선보였다.

그동안 플로리다 거리와 산텔모Barrio San Telmo 거리, 라보카의 레스토랑에 있는 작은 무대 등에서 탱고 추는 댄서들을 많이 봤지만 이곳의 춤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탱고라는 이름으로 묶여있지만, 프로와 아마추어 단어의 차이를 실감할 수 있었다. 무용수마다 풍기는 춤의 느낌도 전혀 달랐다. 마치 곡예사처럼 하늘을 붕붕 날아오르며 아찔한 춤을 선보이는가 하면, 긴 팔다리를 이용해 발레처럼 우아하고 섬세하게 움직이지만 탱고 특유의 섹시함도 잃지 않아 탄성을 자아내는 무용수도 있었다. 또한 매우 빠른 스텝으로 역동적이고 감각적인 춤을 추는 이도 있었으니 한 시간여의 공연이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버렸다.

탱고는 혼자 출 수 없는 춤이다. 따라서 탱고의 스텝과 동작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파트너, 음악과 잘 어우러져야 한다. 혼자만의 잡념에 빠진다거나 흥에 취해 돋보이려 욕심내면 절대 멋진 춤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탱고 댄서들은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수양도 중요하게 여긴다. 이렇게 환상적인 무대를 선보이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 자신과 싸우며 노력했을지, 새삼 탱고 무용수들이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고마웠다. 이 도시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아르헨티나 탱고의 자존심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왜 수많은 사람이 탱고와 사랑에 빠지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몰려드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순간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플로리다 거리에서 만났던 그녀처럼 이 도시에 남아 탱고를 배워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여정지를 떠올리자 바로 단념하게 되었다. 거대한 빙하의 쿨한 향기가 진동하는 엘 칼라파테가 기다리고 있었다. 자연 애호가가 여기보다 조금은 더 환영받는 아르헨티나의 파타고니아로 가는 거다.

1 2 3 까를로스 가르델의 생가를 개조해 만든 박물관 풍경. 탱고 역사뿐만 아니라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살았던 중산층의 생활상까지 한눈에 알 수 있다. 
4 까를로스 가르델 박물관 맞은편에 있는 아르헨티나 전통양식 필레떼아도. 꽃과 그림으로 장식한 건물이 화사하게 피어나는 것 같다. 
5 까를로스 가르델 음악으로 탱고 공연을 하는 극장의 직원들. 이국적인 분위기와 밝은 미소로 맞이해준다. 6 아르헨티나 두툼한 소고기로 만든 스테이크. 소가 아르헨티나 인구의 2배에 달할 정도로 많아서인지 고기 인심이 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