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er's Essay :: Valencia
Relaxed Valencia, Spain

여유를 끄적이는 곳, 발렌시아

스페인 발렌시아를 가는 길은 처음부터 만만치 않았다. 힘겹게 도착한 발렌시아 공항은 아주 조용하고 아담했으며 심지어 입국 심사조차 하지 않았다. 누군가 후에 발렌시아를 다녀왔는지 증명이라도 해보라 하면 나의 여권에는 입국 도장 같은 건 찍혀있지 않으니 혹 거짓말쟁이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0시간이나 걸려 온 나름의 긴 여정이 싱겁게 끝나긴 했지만 공항을 나서는 순간 온통 물들어 있는 오렌지빛 가로등을 보며 ‘드디어 내가 발렌시아에 도착했구나’ 실감했다.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여행을 간다는 것은 다른 공기를 마주하는 일이다. 발렌시아의 첫 공기는 생각보다 담백했고, 불어오는 저녁 바람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것이어서 쉽게 안심하고 발걸음을 뗄 수 있게 하였다.
글과 사진 장윤희 에디팅 이소윤 기자

장윤희 l 서울시 영등포구 가마산로
이제 갓 회사를 그만둔, 이제 갓 삼십 대 초반으로 입성한, 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그래서 앞으로의 삶이 더욱 기대되는 여행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해 질 무렵의 발렌시아 해변.

드디어 눈앞에 펼쳐진 발렌시아 해변

여행 첫날, 애초부터 거대한 계획은 없었으나 그래도 이곳에 유명하다는 해변은 꼭 한 번 가보고 싶었기에 길을 물었다. 내가 나온 골목에서 무조건 직진, 그렇게 쭉 직진만 하면 그 끝에 바다가 있다고 하였다.
수영복과 선크림을 챙기고 근처 마켓에 들러 해변에서 깔고 누울 수 있는 돗자리와 슬리퍼를 샀다. 해변으로 가는 길 중간에 스산한 분위기의 동네를 지나치게 되었는데, 순간 어두침침한 분위기에 살결이 오싹하였다. 나중에 들으니 해변 바로 앞은 집시들이 많이 사는 동네라고 하였다. 두리번두리번하면서도 무조건 직진하라는 말을 지도 삼아 한참을 걷다 보니 점점 짜릿해지는 바닷가 냄새. 드디어 내 눈앞에 바다가 나타났다. 바다를 보는 순간 순식간에 눈이 번쩍이는데 이것은 마치 내가 이전에 가지고 있던 내 눈이 아닌 것 같다. 내 눈의 시야가 그렇게나 넓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얼마나 까마득하고 넓은지 도대체 해변은 어디까지 계속되는 건지 끝이 보이지 않아 가늠할 수 없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보는 또 얼마나 예쁜지, 일렬로 한없이 펼쳐진 잎들을 보니 이 도시까지 오기 위해 걸린 30시간이 아깝지 않았다.해변으로 들어가는 데크를 따라 한참을 걸으니 평일 오전인데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물은 아무리 들어가도 깊어지지 않았고 바닷물은 너무 강한 햇살 때문인지 미지근하여 수영을 하면서도 미지근한 해수에 온천을 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바다에 들어가 삼삼오오 모여 선탠을 즐기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수영을 마치고 나도 사람들 옆에 자리를 펴고 선탠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따뜻한 모래를 만져 본 지가 언제였지?’ 까마득한 옛 생각에 잠긴다.

모래가 너무 부드러워 쉽게 발이 빠지므로 나무 데크를 이용해 해변 입구까지 걸어간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해변. 야자나무들이 반갑게 맞이해준다.
해가 기울어도 한가로이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
사람들보다는 그냥 바닷가로 가기 위해서는 히피들이 주거하는 동네를 꼭 지나야 한다.

그저 조용히 바다와 시간을 음미하기

하루 종일 그저 바다만 보고 있어도 시간은 잘도 흘렀다. 이렇게 바다 한곳에서 시간의 흐름을 지켜본다는 것은 황홀하기 그지없는 경험이었다. 차차 저 멀리서 하나둘씩 켜지는 오렌지빛 가로등을 멍하니 보고 있노라면 행복하다는 말을 그냥 계속해서 뱉게 되는 순간들이었다. 해가 지자 바닷가 주변 풍경들은 조금 더 비현실적으로 바뀌어 마치 한 폭의 그림만 같았고 몇몇 장면들은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처럼 쓸쓸하고 처연했지만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렇게 깜깜한 밤바다를 등지고 다시 돌아가는 길이 너무나도 아쉬워서 언제라도 기억할 수 있게끔 똑같은 풍경의 사진들을 계속해서 찍어댔다.

발렌시아 바다에 매료된 나는 연속해서 3일 내내 똑같은 바닷가를 똑같은 길로 와서 구경하고는 다시 똑같은 길로 돌아가는 여행을 계속하였다. ‘사람이 복잡하게 살려고 하면 얼마든지 복잡하게 살 수 있지.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들을 보내기 위해 지구 반 바퀴를 돌아왔다는 것이 대단한 거야. 이러한 하루가 위대한 거야’라는 생각을 매일 되뇌었다. 똑같은 바다였지만 매일 마주하는 사람들이 달랐고, 매일 발을 담그는 물의 온도가 달랐으며, 저녁이 되면 돌아가는 사람들의 쓸쓸한 뒷모습이 달랐다. 그런 모습들을 보고 있으니 만 리 너머의 고향도 생각나고, 보고 싶은 사람들의 얼굴도 불현듯 떠오르는 밤들이었다.

발렌시아의 오렌지빛 가로등은 새벽이 되어서야 꺼진다. 그리고 다시 찾아오는 아침은 쨍쨍하여, 커피를 마시고자 밖으로 나가게 될 때에는 꼭 그늘이 있는 커피숍을 찾았다. 커피는 한국에서 먹었던 커피들보다 조금 더 고소한데 그 차이는 우유에서 오는 것 같았다. 아침마다 1.5유로의 사치를 누리며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여행에서는 큰 일과였다. 신문을 보는 사람, 담배를 피는 사람, 알 수 없는 언어로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별다르게 하는 일 없이도 시간은 훌쩍 흘렀다.

찬란한 고풍미의 발렌시아 구시가지

발렌시아에서 바닷가를 구경하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들은 구시가지 구경에 할애하였다. 관광 책도 없고 지도도 없어 무작정 휴대폰 어플리케이션의 지도만 믿고 길을 나섰다. 예전 같으면 큰 지도를 펴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식은땀을 흘려 댔을 것이다. 갑자기 건물들의 빛이 달라지고 골목이 많아지는 걸 보니 거의 다 도착했다는 감이 오기 시작하여, 지도를 끄고 발길 닿는 대로 걷기 시작하였다. 다시 돌아오기 위한 길을 외우려고 주변의 큰 건물을 살펴보니 엄청난 구멍이 뚫린 대형 투우경기장이 보였다. 벽에는 날카로워 보이는 소와 함께 날렵한 투우사의 모습이 포스터로 붙어 있었다. 이 경기장을 지나 눈에 보이는 큰 건물들을 따라가니 시청이 보인다. 시청 주변의 건물들은 심지어 우체국까지 모두 장엄했으며, 주변에는 화려한 꽃을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다. 매일 이런 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아마 이런 웅장함을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선글라스를 쓰지 않으면 눈 뜨는 것조차 힘든 이곳 풍경의 반은 모두 햇빛의 몫이었다. 이러한 햇살 덕분에 분수대의 물은 더욱 반짝였고 건물의 대리석이 더욱 빛나 보였다.

구지가지에선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발렌시아는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처럼 관광객들이 넘치지는 않지만 시내 중심부로 나가게 되면 거리마다 유명한 건물들이며 먹을거리가 가득했다. 관광객들도 도시와 닮았는지 골목골목 서두르지 않고 소소하게 걸어 다니는 모습이 참 정겨웠다. 먹을거리도 다른 유럽 물가에 비해 저렴하여 10유로 내외로 코스 요리를 맛볼 수 있는데, 일명 스페인식 볶음밥인 빠에야Paella의 본고장이 발렌시아라는 것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빠에야 이외에도 거리 곳곳마다 즐비한 각종 타파스Tapas 요리를 파는 식당들이 아기자기하게 눈을 즐겁게 했다. 요일과 시간이 운 좋게 딱 맞는다면 더 싸게 파는 곳도 있지만, 타파스들은 대략 1유로에서 2유로 사이라 다리가 아프고 지칠 때쯤 식당에 들어가 서너 개씩 시켜놓고 맥주와 함께 먹으면 이보다 더 든든한 동반자가 없다. 맛있는 타파스 몇 개를 먹고 배도 부르니 다시 걷고 싶어질 때면 구시가지 중심의 대성당 주변으로 여러 갈래 나뉘어 있는 골목들을 누볐다. 정해 놓은 일과가 없으니 굳이 유명한 곳을 찾아봐야겠다는 목표도 없었다. 분수대가 나오면 잠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앉아서 물소리를 듣거나, 새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슴으로부터 꽉 찬 만족을 느낄 수 있었다.

나를 위해 찍은, 나만을 위한 쉼표

인생이라는 것이 ‘여기까지면 됐어. 조금 쉬었다가 다시 시작하면 돼’ 라는 식으로 태어날 때부터 쉴 곳이 정해져 있으면 참 좋겠지만 그렇게 쉽게 마음처럼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매일 머릿속으로는 망망대해를 건너고 유토피아를 꿈꿨지만 매일 아침이면 일어나서 똑같은 학교나 똑같은 직장을 가야하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나이는 들고 용기는 줄어갔다. 이번 여행은 스스로 쉬고 싶은 아니 쉬어야 하는 지점을 과감하게 선택해서 오직 그것만을 위해 아무 생각 없이 떠나온 데 큰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여행 책도 준비해 가지 않았다. 모르면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되고, 길을 잃으면 다시 돌아가면 되니까. 그리고 매일 빽빽한 관광 일정으로 인해 스스로 지쳐가기 보다는 하늘 구경, 사람 구경, 마음에 드는
곳 어디든 앉아서 끄적거리며 보낸 시간들이 전부였던 여행이다. 발렌시아를 떠나는 아침, 여전히 출국 심사 같은 건 없었고, 내 여권에는 발렌시아와 관련된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아무것도 아닌 시간들을 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그리고 이러한 하루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깨닫게 해준 발렌시아의 바다와 하늘. 산화되지 않게 꽁꽁 싸서 잘 숨겨두었다가 엄청나게 그리울 때쯤 다시 꺼내 보아야겠다.

저녁의 바다를 유유자적 거니니 불현듯 행복해진다.
오렌지 빛깔로 물든 도시. 이 빛은 다음날 아침까지 계속된다.

고풍스러운 발렌시아 중앙 시장의 입구. 오후 2시까지만 문을 연다.
왼편의 투우경기장은 길을 찾기 위한 랜드마크로 항상 기억해두었다.
구지가지의 중심. 멀리 발렌시아의 대표 건축물인 대성당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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