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urmet :: Tea
Two Kinds of Good Afternoon Tea

굿 애프터눈! 가을날의 두 가지 티타임

분위기가 달라진 바깥을 내다본다. 홍차를 마시기 참 좋은 나날들이다.오늘 마실 차를 고르고, 따뜻한 물에 그 맛이 우러날 때까지 기다리는 일 역시 휴식이 되는 차. 첫입부터 강한 향이 퍼지는 커피와 달리 차는 보다 느리고 연하다. 쓸쓸한 날이면 더욱 생각나는 진한 홍차나 밀크티 한 잔은 그 잔이 채워져 있는 시간을 보다 따뜻하고 고요하게 데운다. 그렇게 유러피언 티룸과 아시안 티룸 두 곳에서 보낸 시간을 전하려 한다. 다채로운 블렌딩 차와 정통 홍차를 서로 다른 분위기에서 맛볼 수 있는 따스한 공간들이다.
글 이소윤 기자 사진 진하정 기사 취재협조 딜마, 르쁘띠베르

감미로운 우롱 카라멜 뵈르 살레의 밀크티
쥬뗌므와 우롱 카라멜 뵈르 살레의 찻잎

르쁘띠베르 Le Petit Verre
나만을 위한 티파티가 열리는 곳

홍차를 가장 화려하게 즐기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홍차와 알록달록한 디저트들로 오후의 시간을 장식하는 ‘애프터눈 티’이다. 영국에서 시작된 이 문화는 고소한 스콘과 샌드위치, 케이크 등의 간식거리들과 함께 홍차로 낮의 허한 속을 달래며 시작되었다. 여기에 나른한 오후를 깨우는 즐거운 대화들은 덤이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생겼다. 어쩌다가 영국은 홍차하면 떠오르는 나라가 된 것일까.

역사상 차나무는 중국에서 가장 먼저 재배되었다. 부지런히 아시아 대륙에 대한 항해를 시도했던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로 인해 유럽에 처음 동양의 차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다른 대륙에서 건너온 차는 당시 유럽에서도 왕족과 귀족만이 감당해 낼 만큼 비싼 가격 때문에 대중화에는 무리가 많았다. 그러다 영국의 찰스 2세가 아내로 맞이한 포르투갈의 캐서린 공주가 줄곧 마셔온 홍차를 영국에서도 즐겨 찾으면서 그 존재감이 귀족들 사이에 더욱 확산되었다. 17세기에는 그녀를 계기로 홍차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지만, 18세기 후반에 찻값이 뚝 떨어진 후에야 홍차의 진정한 대중화가 시작될 수 있었다. 그러다 영국인이 인도와 스리랑카 등지에서 홍차를 직접 생산하는 시대가 열리면서 서민들의 식탁에까지 홍차가 자주 올라가고, 서서히 애프터눈 티 문화가 자리 잡혀간다. 그런 문화가 점점 깊어지면서, 마시는 차와 디저트의 종류, 티 포
트와 찻잔 등 티타임을 장식하는 모든 부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함께 커졌다. 하루의 중간에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차의 온기와 향에만 집중하는 자연스럽고도 신중한 이 행위의 매력에 모두가 빠져든 것이다. 이는 서서히 다른 유럽 국가들로도 퍼져 나갔다. 그럼 제빵과 스위트의 나라 프랑스와 애프터눈 티가 만난다면 과연 어떨까. 서울 가로수길의 우아한 티룸에서 그 상상을 직접 즐겨보기로 했다. ‘작은 찻잔’을 뜻하는 이름 ‘르쁘띠베르’는 방문하는 모두에게 유럽식 차 문화에 휩싸인 황홀감을 안겨준다. 프랑스와 인도, 독일, 중국, 미국, 스리랑카 등 그 국적도 다양한 브랜드들의 차를 새롭게 맛보는 일이 매번 즐겁다는 박정아 사장은 오직 맛만으로 메뉴에 오를 차를 선별한다. 

차를 마시며 이 향을 어떤 식으로 다뤘을 때 더욱 맛있어질지 더불어 구상하면서 말이다. 그런 덕분에 르쁘띠베르의 다양한 밀크티들은 차마다 전부 다른 레시피를 갖고 있다. 차와 함께 먹는 디저트에도 서로의 맛을 살리는 조화가 중요하다. 프랑스의 르꼬르동블루에서 2년간 제과를 배운 박정아 사장은 차와 디저트를 모두 깊게 탐닉할 줄 아는 사람이다. 자칫 프랑스 디저트라면 화려한 단맛만을 떠올릴 수 있지만, 르쁘띠베르의 3단 트레이에 담긴 디저트들은 보다 온화했다. 1층에는 따끈하게 데운 크로크무슈와 얼그레이 파운드 케이크, 말차 스콘으로 고소함을 살리고, 2층의 갸또쇼콜라와 딸기 구겔호프, 크렘뷸레에 적절한 단맛과 감미로움을 더한다. 3층에서는 얼그레이&말차 마카롱과 까눌레, 브루통 등으로 담백함과 달콤함의 균형을 맞춘 디저트들이 티타임에 벗을 해 주니, 프랑스 브랜드 꽁뜨와프랑세뒤떼의 ‘우롱 카라멜 뵈르 살레’로 끓인 밀크티와 브랜드 떼오도르의 ‘쥬뗌므’를 말끔히 우린 홍차가 술술 들어간다. 차 종류부터 티 포트와 잔까지 모두 내 취향대로 골라 꾸밀 수 있는 르쁘띠베르에서의 티타임은 훌륭한 맛의 차와 디저트로 비로소 더욱 완전해진다. 조용하지만 그 무엇보다 행복한, 나를 위한 작은 파티인 셈이다.

주소 및 연락처 02-512-5959, 서울시 강남구 도산대로 17길 13
영업시간 12:00~22:00 (월요일 휴무)
가격 애프터눈 티 세트 1인 2만 원대, 차 1만 원대, 디저트 2천~1만 원대

딜마 Dilmah
편견 너머에서 음미한 스리랑카의 단아한 향

연희동의 골목들 속으로 조금만 들어가니 작은 아지트와 같은 티룸 ‘딜마Dilmah’가 눈에 띤다. 나만 아는 다락방처럼 편안한 인테리어의 실내에는 맑은 차향이 뭉근히 퍼져 있다. 이곳에서는 스리랑카 섬의 흙을 밟고 자라난 찻잎들이 뜨거운 물속에 빠지길 기다리고 있다. 스리랑카의 다원들을 바탕으로 1988년부터 문을 연 딜마는 중후한 실론티의 위엄을 꿋꿋이 지켜 가고 있는 차 브랜드이다. 스리랑카에서 난 찻잎의 정체성을 가장 중요시하기에, 홍차에 향을 더하기 위해 꽃잎과 여러 찻잎 등을 섞는 다른 브랜드들과는 차에 대한 태도가 조금 다르다. 물론 딜마에서도 바닐라 실론티나 스트로베리 실론티 등 다양한 향의 차들을 선보이고 있지만, 이는 찻잎에 변화를 주기 보단 기본 배합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향료로 맛을 더하는 것이다. 딜마를 찾는 차 애호가들이 어떤 향의 차를 골라도 항상 딜마에 기대하는 실론티의 정체성을 느낄 수 있길 바라는 듯하다.

스리랑카의 차 산지별 특징을 비교하기 위해 ‘누와라엘리야’와, ‘캔디’, ‘갈레’의 홍차로 세 개의 주전자를 채웠다. 스리랑카는 많은 지역에서 비교적 높은 고도에 다원을 두고 있는 덕분에 그 고도에 따른 차 맛의 변화를 쉽게 가늠해볼 수 있다. 세 지역 역시 누와라엘리야가 해발고도 1,800미터로 가장 높고, 그 다음이 해발 약 300미터의 캔디, 저지대인 갈레 순으로 고도에 차이가 난다. 본래 실론티는 2분 이상 우리면 떫은맛이 올라온다는 인식이 강하지만 이 세 종류의 차는 모두 그 편견을 빗나갔다. 누와라엘리야는 실론차의 샴페인답게 살가운 고소함과 푸릇한 향이 번지고, 캔디 역시 평소에 기억하던 홍차의 무게감이 빠진 가벼운 맛이다. 갈레는 저지대에서 자란 차답게 보통의 무게감을 지니지만 그 느낌이 매우 온화해 진한 녹차와도 같은 편안함이 있었다. 차만 마셔 보았을 뿐인데 잔 속의 따끈한 물에서 이토록 단아한 동양적인 매력을 느낄 수 있
다니, 차란 참 오묘한 것이구나 싶다. 여기에서만 그치기 아쉬워 깊어가는 가을에 어울릴 깊은 향의 중국 차 ‘랍상소총’을 함께 우려냈다. 역시나 소나무의 훈연을 흡수한 독특함으로 유명한 차답다. 오래 우리면 한약과 비슷한 느낌이 나지 않을까 싶을 만큼 엄숙한 향은 티 포트 속에 작은 숲이 자라나 물에 그 향이 배어든 것만 같다.

나른한 오후에 가만히 앉아 차의 향에만 집중하다 문득 참 평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만 남고 나는 잠시 사라진 기분이다. 이처럼 홍차는 몽롱한 날은 정신이 들게 하고, 신경이 선 날은 모든 걸 잠시 내려놓게 만드는 달콤한 심호흡이다.

주소 및 연락처 02-323-5232,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맛로 7-12
영업시간 11:00~22:00 (명절 휴무)
가격 차 7천~9천 원대, 디저트 5천 원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