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bia :: Zlatibor
Green Zlatibor

즐라티보르, 세르비아의 초록빛 남쪽

세르비아의 북부가 다뉴브강이 흐르는 비옥한 평야지대라면 남부는 알프스 산맥과 발칸 산맥으로 둘러싸인 석회암 지대다. 남서쪽의 즐라티보드는 43킬로미터로 이어지는 디나르 알프스 산맥에 걸쳐있는 고산지대. 즐라티보르의 숲속을 산책하고, 세르비아 영화에 취하고, 기차에 오르며 즐긴 초록빛 남쪽 이야기다.
글 함희선 기자 사진 이두용 취재협조 세르비아관광청 www.serbia.travel, 한진관광 www.kaltour.com

공기가 다르고, 태양이 다르다. 하-아. 도시를 벗어나 마주한, 신선한 초록빛에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뱉는다. 분명 햇살은 피부가 아리도록 뜨겁다. 기분 탓인가. 산뜻한 산소가 들어가니 폐부터 머릿속까지 민트를 씹은 듯 싸해진다. 여긴 즐라티보르Златиборски округ다. 베오그라드에서 남쪽으로, 또 서쪽으로 한참을 달렸나보다. 아마도 200킬로미터 쯤. 아침 먹고서 출발했는데, 점심때를 훌쩍 넘긴 걸 보니.

남서쪽의 산악지대

도시에서 멀어질수록 포토그래퍼의 셔터 소리가 잦아든다. “여기 스위스 같지 않아? 이탈리아도 닮았어.” 빨간 모자의 양치기가 엉덩이가 귀여운 양떼들을 무심하게 앞서간다. 봉긋하게 솟아있는 언덕마다에는 주홍 지붕이 콕콕 박혀있다. 우리 차 앞으로 하이디가 불쑥 뛰어든다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풍경. 세르비아의 북부가 다뉴브강이 흐르는 비옥한 평야지대라면 남부는 알프스 산맥과 발칸 산맥으로 둘러싸인 석회암 지대다. 남서쪽에 있는 즐라티보르는 남동쪽에서 북서쪽까지 43킬로미터로 이어지는 디나르 알프스 산맥에 걸쳐있는 고산지대다. 가장 높은 봉우리는 1,496미터의 토르니크. 스키타고 하이킹하는 사람들로 시즌 없이 북적댄다. 미네랄 풍부한 온천도 있다. 즐라티보르에 놀러간다고 하면 반응은 거의 비슷하다. “건강해지려고요?” 이 동네가 심장 쿵쿵 뛰게 하는 액티비티 천국이란 소리다.

“방 있습니다. 20유로에요. 좋은 방 있어요.” 자기네 아파트를 빌려주겠다는 동네주민들의 친근한 호객행위가 시작되면 거기가 바로 즐라티보르의 입구다. 모험이 기다리는 남서부 여행의 중심지로 시외버스 터미널, 웰니스 센터를 갖춘 호텔, 산책길이 예쁜 호숫가, 훈제 프로슈토, 꿀과 잼, 라키야, 울 스웨터 등 지역 특산품으로 무장한 시장 등이 있다. 자연 속에 파묻히기 전 문명과의 이별을 고할 마지막 기회의 동네다.

과거로 떠나는 시로고이노 산책

세르비아 관광의 중심지라 불리는 즐라티보르이지만, 그래도 역시 시골이라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다. 산등성이에 흩어져있는 오두막집 사이로 스카프를 머리에 묶은 할머니 하나가 지나가기에 물었다. “여기 집주인이신가요?” 아니란다. 서른 개가 넘는 나무집들이 전부다 빈집이다. 한때 농장을 이루고 살던 이들의 보금자리를 그대로 보존해두었는데, 즐라티보르만의 전통적인 건축과 라이프 스타일을 엿볼 수 있어 1980년부터는 ‘올드 빌리지 뮤지엄’이라 부르고 있다. 마을이 예부터 갖고 있던 예쁜 이름은 시로고이노Сирого.но다. 하나의 울타리 안에 곡식 저장소, 빵 굽는 데, 유제품 발효시키는 곳, 라키야 만드는 물레방아, 돼지랑 닭 키우는 광, 잠자는 방, 부엌 등 기능별로 세세하게 나뉜 빌딩이 여럿이다. 석판을 대어놓은 가파른 지붕과 부엌 아궁이 옆에 바싹 붙어있는 침대를 보니 폭설에 고생했을 그들의 고충이 상상되더라. 마치 과거의 시간을 현재에 묶어놓은 듯, 민속촌이라 부르기엔 너무나 생생한 광경이다. 조심스레 오두막 안을 훔쳐보고, 숲길을 산책하면서 귀신이든 뭐든 누군가 여전히 살고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아무도 살지 않는데, 이렇게 실감나는 집이라니!

1 예전에 이런 모습이었구나. 과거의 세르비아를 실감나게 상상할 수 있는 시로고이노의 집들. 
2 스카프를 머리에 둘러맨 아주머니. 울창한 숲속을 걷는 모습이 마치 동화처럼 예쁘다. 
3 시장에서 만난 할아버지. 머리에 쓰고 있는 게 옛날 세르비아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쓰던 모자다. 유래는 역시 터키다. 
4 5 프로슈토 써는 아저씨. 두툼하게 뜬 울 스웨터. 즐라티보르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는 시장구경이다. 먹을 것도 많고, 생필품과 기념품도 많다.

에미르 쿠스투리차의 영화 속으로

세르비아 영화를 본적 있는 사람이라면 기억을 되살려보길. 사실 영화에는 무지한 편이라 이번에서야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동유럽에서 세르비아의 영화수준이 매우 높다는 것. 그리고 에미르 쿠스투리차Emir Kusturica는 영화계에서 알아주는 영화감독이라는 것도. 1981년 <돌리벨을 아시나요?>로 베네치아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뒤 그는 <아빠는 출장 중>과 <집시의 시간>으로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두 번이나 탔으며, <애리조나 드림>으로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은곰상까지 수상했다. 트레일러로 그의 작품을 잠깐 봤는데,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 단순히 독특하다고 하기엔 복잡함이 가득하다. 유대인 가족을 둔 소년의 이야기라든가, 보스니아 방언으로 찍은 사라예보에서의 성인기, 아이의 눈으로 바라본 유고슬라비아의 내전, 마케도니아에서 집시어로 집시에 관해 찍은 영화까지. 호기심이 속에서 세차게 일렁거린다. 실뭉치처럼 세르비아를 둘러싼 상황들, 그 속의 삶.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에미르 쿠스투리차만의 영화이므로.

갑자기 영화 얘기를 꺼낸 건 드르벤그라드Дрвенград를 소개하기 위해서다. 모크라 고라Мокра Гора에 있는 이 마을은 오롯이 영화 <삶은 기적이다>를 찍기 위해 에미르 쿠스투리차가 창조해낸 공간이다. 참고로 <씨네 21>에서 찾은 간략한 영화 소개를 적어본다. ‘보스니아를 배경으로 에로틱한 장면을 가미한 로미오와 줄리엣.’ 그의 팬이라면 영화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마을이 신기하고 반가울 테고, 팬이 아니라 해도 혹은 여기가 영화 때문에 만들어진 것조차 모를지라도 충분히 마음에 들어올 황홀한 풍경이 펼쳐진다. 세트장은 현재 호텔과 레스토랑으로 바뀌었다. 드르벤그라드에선 에미르 쿠스투리차의 영화가 매일같이 건물 지하에 있는 스탠리 큐브릭 시네마에서 상영되고, 매년 1월 국제 영화 축제가 개최된다.

사르간 기찻길 위에서

삐-익. 고요했던 모크라 고라의 언덕을 깨우는 울림이다. 사르간 에잇.argan Eight. 낡아서 더 예쁜 수박색 기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려간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한껏 들뜬 표정의 얼굴들. 2시간 30분짜리 열차 티켓을 손에 쥔 여행자들이다. 여기서 다시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영화감독 에미르 쿠스투리차. <삶은 기적이다>에서 주인공 루카의 꿈이 보스니아와 세르비아를 연결하는 철도를 건설하는 게 아니었던가. 사르간 에잇이 딱 그런 기차다.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에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사라예보를 통과해,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까지 달려가는 기찻길. 1921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5천 명의 노동자의 맨손과 땀으로, 4년 동안 건설된 협궤철도다. 물론 지금 남아있는 건 일부다. 1999년 버려진 철도 중에 세르비아 산간지방의 15,440미터의 구간만 관광열차를 위해 재건한 것. 어느 쪽으로 달리고 있는지  방향감각을 잃게 하는 숫자 8모양의 트위스트, 22개의 터널, 5개의 다리. 덜컹덜컹 어지럽게 괴롭히는, 낡은 기차에 올라 산속을 쉼 없이 왕복으로 달렸다. 사르간, 모크라 고라, 즐라티보르. 초록빛에 홀렸나. 몽환적인 에미르 쿠스투리차의 영화 생각에 너무 빠져들었던가. 어느 순간 루카의 꿈이 기적소리와 함께 들려온다.

1 영화 <삶은 기적이다>에서 세트장으로 지어졌던 모크라 고라의 마을. 환상적인 그의 영화와 잘 어울리는 공간. 
2 사르간 지역을 달리는 관광열차. 고요한 동네 모크라 고라에 여행자들이 열광하는 이유. 
3 열차타는 기분을 들뜨게 하는 친절한 검표원들. 
4 열차는 2시간 30분을 달리면서 총 22개의 터널을 통과한다. 
5 이 지역은 미네랄 풍부한 온천으로도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