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새로운 발견 - 월간 뚜르드몽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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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9월호]     대륙분류 : [유럽]     국가분류 : [독일]     도시분류 : [라이프찌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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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TFIELD] 행운과 불운의 경계에서 당당했던 멘델스존

Travel :: Felix Mendelssohn
The Mysterious Life of Mendelssohn

행운과 불운의 경계에서 당당했던 멘델스존

펠릭스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 (1809년-1847년)은 우리가 일상에서 아주 가까이 대하고 있는 음악가 중 하나이다. 신랑신부가 결혼식에서 혼인 예절을 끝내고 돌아 서서 예식장 복도를 통해 하객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부부로서의 첫 발걸음을 같이 하고 나오는 순간 울리는 퇴장 음악이 바로 멘델스존이 작곡한 ‘웨딩마치’라는 곡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상의 수많은 젊은이들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자신이 작곡한 곡이 장식한다는 사실을 멘델스존이 무덤에서라도 안다면 너무나 자랑스러워 할 일이다. 그러나 신부가 입장할 때 울려 퍼지는 입장곡은 그를 그렇게 싫어하고 폄하했던 리하르트 바그너 (1813년-1883년)의 음악이란 사실은 참 공교롭지 않은가?

글과 사진 권석하 편집위원(유럽문화탐사 저자)


1멘델스존이 지휘자로 있던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타라 신축건물
2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건물 앞 분수에 앉은 남녀
3정원에 설치된 멘델스존 두상
4응접실
5하우스 음악회를 여는 콘서트홀

엄청난 독서가 멘델스존에 미친 영향

멘델스존은 어떻게 이를 받아들일까? 세상에는 이렇게 의도치 않게 적을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식의 교묘한 우연이 만들어 내는 지극히 비극적이거나희극적인 장면이 참 많다. 그래서 나는 ‘삶은 필연이라는 바다에 뜬 몇 개의 우연이 만들어 내는 난장판 한 판’이라고 말한다. 독일 
라이프찌히의 멘델스존 하우스 박물관은 Goldschmidtstraße 12번지에 있다. 시내 한복판 광장에서 걸어서 20분, 멘델스존이 지휘자로 근무하던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건물로부터는 10분이면 도착한다. 멘델스존이 살았던 건물로는 유일하게 방문할 수 있도록 남아 있는 곳이다. 멘델스존 하우스 박물관을 다른 유명인사들의 생가를 생각하고 가면 의아스러워 좀 혼란스럽다. 거의 현대식인 것 같은 4층 아파트 건물이 들어서 있는 골목길이 주소로 나와서 이다. 아니 이런 곳에 무슨 집이 있나 하고 한참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아까 본 긴 아파트 벽에서 ‘멘델스존 하우스 박물관’이란 동그란 표지판을 발견하고는 안도를 하게 된다. 골목길을 따라길게 늘어선 아파트의 이층이 멘델스존이 나이 36살인 1845년부터 2년 뒤인 1847년 뇌졸증으로 세상을 뜰 때까지 산 집이다. 멘델스존의 사망 150주년을 맞아 1997년 11월 러시아 출신 거장 지휘자인 쿠르트 마수르의 주도로 수리를 하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멘델스존의 물건들을 모아 개관을 한 박물관이다.
4층 건물 중 2층이 원래 멘델스존 가족이 살던 곳이라서 여러 개의 방이 멘델스존의 작업실, 거실, 응접실로 나뉘어져 있다. 그 방들 안에는 있는 전시품은 실제 멘델스존이 쓰던 각종 가구를 비롯해 식기, 찻잔, 포크와 나이프, 등 심지어는 이쑤시개까지 있다. 물론 당시의 관습대로 멘델스존의 석고 데드마스크와 손도 전시되어 이를 보고 있노라면 감회가 새롭다. 

멘델스존의 친필 편지와 친필 악보도 있다. 또 엄청난 독서량으로 유명한 멘델스존이 읽던 책 중 몇 권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중에는 호머의 ‘오딧세이’도 보인다. 멘델스존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유태인이라면 태생적으로 지는 차별의 질고를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적으로 뛰어나야 한다는 이유로어릴 때부터 교육에 대단한 관심을 쏟았다. 덕분에 멘델스존은 영어, 이탈리아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라틴어까지 능숙했다. 특히 멘델스존은 셰익스피어 작품에 심취해서 영어로 작품을 읽었다. 이는 12살에 괴테의 친구이자 멘델스존의 작곡 선생이던 젤타의 손에 끌려 처음 만나 오래 동안 교류를 한 대문호 괴테의 영향 때문이다. 당시 72살이던 괴테가 신동이던 멘델스존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는지 는 잘 알려져 있다. 물론 어린 멘델스존으로서도 굉장한 영광으로 느꼈을 터이고 해서 평생을 가는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당시 괴테는 멘델스존을 모짜르트 보다 낫다고 평했다. 모짜르트가 7살에 연주할 때 당시 14살이던 괴테는 직접 연주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비록 멘델스존이 괴테에게 연주를 할 때가 12살이었긴 했지만 괴테는 모짜르트의 당시 연주는 지금의 멘델스존의 연주와 비교하면 아이와 어른의 연주 차이라고 까지 극찬 했다. 또한 작품을 영어로 읽을 정도로 셰익스피어 에 심취해 있던 괴테는 멘델스존에게 음악가로서 편향된 시각을 벗어나기 위서는 셰익스피어는 물론 각종 고전문학을 읽으라고 권했다.
 
괴테는 그후 멘델스존이 20살이 되던 만났을 때는 수학과 과학에도 관심을 가지라고 권했다. 멘델스존이 어릴 때와는 달리 자신이 관심이 없는 것들이라고 솔직하게 말하자 벌컥 화를 내고 방을 나갔다가 멘델스존이 괴테를 달래기 위해 피아노 연주를 하자 다시 들어 왔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로 괴테는 멘델스존에게 좋은 말을 해주려고 노력했다. 멘델스존은 괴테의 이런 충고를 깊이 받아 들여 평생을 독서에 심취했다. 괴테는 어릴 때 피아노와 첼로를 배워서 음악에 관심이 많기도 했다.

멘델스존이 눈엣가시였던 바그너의 질투

박물관의 전시품 중에는 멘델스존이 그린 수채화가 몇 점 있었다. 멘델스존의 수채화 실력은 취미로 그리는 아마추어를 넘어서서 거의 작가 수준이었다. 정말 화가로 나갔어도 성공할 만한 실력이었다. 멘델스존 가족이 살던 이층에는 좌석이 약 50석 정도 되는 홀이 있는데 멘델스존의 가족들이 친지들을 불러 하우스 콘서트를 열던 방이다. 여기서 여자이기에 공개적으로 바깥 연주를 못하던 멘델스존의 천재적인 작곡가이자 연주자 였던 누나 파니가 개인 연주회를 열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매주 일요일 점심 때면 마티니 음악회가 열리는 아직도 살아 있는 박물관이다. 저녁에는 하우스 콘서트도 열리기도 한다. 1층에는 멘델스존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최신의 스피커가 여러 개 설치된 현대식 리스닝 룸과 함께 기념품 가게도 있어 멘델스존의 수채화 프린트를 살 수 있다. 3층에는 라이프찌히 대학교 음악연구소가 있다. 아담한 정원은 멘델스존이 살아 있을 때 망중한의 시간을 보냈을 푸른 잔디 밭 귀퉁이에 벤치 몇 개가 놓여있다. 마침 마당의 단층 건물에서는 멘델스존을 주제로 한 회화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사실 멘델스존의 유품이 이렇게라도 남아 있을 수 있는 것도 어떻게 보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멘델스존 사후에 바로 시작된 멘델스존의 음악에 대한 악의적이고 의도적인 폄하 때문이다. 1847년 멘델스존이 세상을 떠난 후 라이프찌히의 분위기가 반전한다. 정통교조주의적인 기독교에심취하던 리하르트 바그너(1813년-1883년)는 평생에 걸쳐 반유태주의를 지향해 왔다. 여기에 걸린 것이 바로 멘델스존이다. 바그너 보다 4살이 적지만 바그너는 항상 멘델스존을 베토벤, 슈베르트로 이어져 내려오는 독일 음악을 유태인인 멘델스존이 오염 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요즘 말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멘델스존과는 달리 평생에 걸쳐 불우하게 음악가 생활을 한 바그너로서는 멘델스존에게 질투를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외지인인 멘델스존이 라이프찌히에서 음악가로서 승승장구할 때 라이프찌히가 고향이고 거기서 자란 바그너는 라이프찌히에서 전혀 존재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 여기저기를 생계를 위해 떠돌고 있었으니 바그너에게는 멘델스존은 눈의 가시일 수 밖에 없었다. 멘델스존의 생전에는 감히 도전을 못하고 가만히 있던 바그너는 멘델스존이죽은 지 3년 되는 해인 1850년 드디어 ‘음악에서의 유대정신’이란 논문을 발표해서 독일 음악에서의 유태 음악인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격렬한 반기를 든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멘델스존의 폄하는 나치 정부 시절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절정에 달한다. 히틀러는 바그너를 거의 신격화 해서 이용하면서 동시에 멘델스존을 말살하려 한다. 결국 히틀러는 라이프찌히 성요한 성당과 게반트하우스 앞에 설치되어 있던 멘델스존의 동상을 철거하게 하고 유품과 악보를 비롯한 많은 자료를 압수해 국가문서 보관소에 집어 넣어 버린다. 유감스럽게도 2차대전의 와중에 이런 귀중한 자료들이 사라져 버린다.

히틀러와 바그너의 합작이 만든 멘델스존 죽이기

당시는 유태인이라는 누명은 쉽게 벗어날 수 없었고 공직을 맡을 수도 없었다. 다행히 멘델스존은 아버지의 돈으로 인해 다른 유태인들과는 달리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또한 당시 라이프찌히가 속한 프러시아의 법은 피로서의 유태인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종교로서 따졌다. 유태인도 기독교도만 되면 모든 권리를 동등하게 누릴 수 있었다. 당시는 지금보다도 더 종교가 인기가 없었고 무종교가 유행이던 시절이기도 해서이다. 이렇게 해서 당시 유태인은 자신들이 속한 국가에 대단히 애국적이었다. 그래서 프러시아보다 훨씬 자유롭고 자신에게 잘해주고 특히 빅토리아 여왕부부가 자신의 열렬한 팬인 영국을 10번이나 방문했지만 멘델스존은 언제나 기꺼이 프러시아로 돌아 갔다. 멘델스존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아이가 태어나자 말자 영세를 받게 하는 당시 풍조와는 달리 눈치를 보면서 자식을 유태인으로 영세 시키지 않았고 유태인이라면 누구나 하는 할례를 멘델스존에게 하게 하지 않았다.
 
멘델스존은 7살이 되어서야 베를린에서 신교인 루터란 교회의 영세를 받게 하여 기독교 신자로 만들었다. 당시 독일 유태인 사이에서 만연했던 ‘혈연으로는 유태인. 종교로는 기독교인, 문화로는 독일인’이라는 유행을 따른 셈이다. 물론 랍비이자 칸트와 헤겔과 동급으로 인정 받는 대단한 철학자인 할아버지 모세 멘델스존은 노발대발 했지만 당시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멘델스존의 아버지는 이렇게 자식을 기독교인으로 개종 시키고 차별 받지 않게 했으나 결국 멘델스존은 바그너에 의해 거의 부관참시를 당했다.

 

1거실 2정원 3멘델스존의 작업실 4멘델스존 5멘델스존 관련 6 기념접시들 멘델스존 기념품


인류 최고의 음악 ‘마태수난곡’ 재발견하다

멘델스존은 자신의 음악 말고도 음악을 위해 여러 가지 공을 세웠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지금은 인류가 만든 최고의 음악이라는 극찬을 받는 요한 세바스찬 바하의 ‘마태수난곡’을 재발견하여 새로 대중들에게 알린 공헌 말이다. 마태수난곡을 멘델스존이 우연히 푸줏간에서 고기를 싸는 종이에서 발견해서 살려내었다는 식의 드라마틱한 에피소드가 시중에 떠도나 사실이 아니다. 

1829년 20살의 약관 멘델스존이 마태수난곡 초연을 지휘하기4년 전 할머니 벨라 살로먼이 바하의 원고를 어디서 구해 멘델스존에게 넘겨준다. 이를 가지고 멘델스존은 집안의 영향력과 후원을 이용해 베를린 상가데미의 악단과 합창단의연주를 지휘한다. 멘델스존이 직접 발견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결국 그에 손에 의해 대중들에게 소개되었으니 발견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1890년 당시 13살의 파블로 카잘스가 바르셀로나 헌책방에서 바흐의 첼로 조곡을 발견한 이후 13년 간을 연습해 26살에 처음으로 세상에 바흐의 걸작을 세상에 소개한 일 보다 훨씬 더 대단한 일이다.
멘델스존의 행운은 이로 그치지 않는다. 헨델의 오라토리오 ‘이집트의 유태인’을 런던에서 발견하고 자신의 손으로 직접 무대에 올린 일도 있다. 또 있다. 슈베르트의 마지막 교향곡 ‘그레이트’를 슈만이 슈베르트 형 페르디난트 집에서 발견하여 멘델스존에게 보낸다. 결국 1839년 3월31일 라이프찌히 게반트하우스에서 멘델스존에 의해 초연된다. 결국 멘델스존은 정말 이런 음악적인 행운이 이어진 행운아였다. 뿐만 아니라 멘델스존은 프란츠 슈베르트와 로베르트 슈만의 곡도 자신이 지휘자로 있던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로 하여금 연주하게 해 대중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물론 이런 연주 때 지휘봉을 처음 쓰기 시작했고 지휘자가 오케스트라의 연주 박자만이 아니라 곡 해석을 시도해서 연주의 질을 높인 최초의 지휘자이기도 하다.

1멘델스존 하우스 표지판 2가계부 등 3멘델스존 머리카락 4기증된 그랜드 피아노 5멘델스존 부부 초상화 6 멘델스존 데드 마스크

오페라 미작곡, 멘델스존의 미스터리

멘델스존의 작품 750곡 중에서 가장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리는 곡은 역시 ‘무언가(Lieder ohne worte: song without words)’이다. 물론 줄 세우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베토벤, 브람스 것과 함께3대 바이올린 협주곡이라 일컫는 바이올린 협주곡 E 단조 Op. 64도 있고 심지어는 현악 협주곡 중 가장 멜랑꼴리 하다는 작품번호 Op. 13 No. 2 의 현악4중주 A 단조곡도 있지만 그래도 멘델스존의 작품 중 가장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곡은 역시 ‘무언가’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이를 또 사람들은 슈베르트의 무언가, 슈만의 무언가, 브람스의 무언가와 함께 4대 무언가 라고도 한다. 이 곡은 피아노곡으로 각 8곡씩 6집과 첼로와 피아노로 연주한 1곡으로 도합 49곡으로 이루어졌다. 각 곡은 매우 짧아서 불과 5분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 소품들로 거의 3부로 되어 있다. 거의 클래식 음악의 유행가 수준이다. 

압도하는 음악이 아니라 조용한 시간에 혼자서 연주하고 혼자서 감상하는 듯 한 음악이다,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듯 연주자가 청중은 아예 없는 듯 요즘 말로 하는 ‘혼주’를 하는 듯한 음악이다. 절친 슈만과는 달리 멘델스존은 가곡을 남기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멘델스존은 이렇게 ‘가사 없는 가곡’을 16년이란 세월 속에 심혈을 기울여 작곡했다. 가곡을 비롯해 오페라 같이 ‘가사 있는 음악’을 작곡하지 않은 멘델스존을 두고 사람들은 어릴 때 만난 괴테의 영향 때문이라고 의심을 한다. 괴테는 ‘음악은 절대 문학의 적수가 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 했다. 이를 멘델스존이 너무 깊게 새긴 것이 아닌가 하는데 이도 사실이 아니다. 멘델스존은 ‘참으로 뛰어난 음악은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라고도 했고 ‘말을 음악으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부정확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너무 정확하다’라고 말했으니 말이다. 굳이 구차하게 말1234561멘델스존 하우스 표지판 2가계부 등 3멘델스존 머리카락 4기증된 그랜드 피아노 5멘델스존 부부 초상화 6 멘델스존 데드 마스크직접 무대에 올린 일도 있다. 또 있다. 슈베르트의 마지막 교향곡 ‘그레이트’를 슈만이 슈베르트 형 페르디난트 집에서 발견하여 멘델스존에게 보낸다. 결국 1839년 3월31일 라이프찌히 게반트하우스에서 멘델스존에 의해 초연된다. 결국 멘델스존은 정말 이런 음악적인 행운이 이어진 행운아였다. 뿐만 아니라 멘델스존은 프란츠 슈베르트와 로베르트 슈만의 곡도 자신이 지휘자로 있던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로 하여금 연주하게 해 대중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물론 이런 연주 때 지휘봉을 처음 쓰기 시작했고 지휘자가 오케스트라의 연주 박자만이 아니라 곡 해석을 시도해서 연주의 질을 높인 최초의 지휘자이기도 하다. 

오페라 미작곡, 멘델스존의 미스터리멘델스존의 작품 750곡 중에서 가장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리는 곡은 역시 ‘무언가(Lieder ohne worte: song without words)’이다. 물론 줄 세우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베토벤, 브람스 것과 함께3대 바이올린 협주곡이라 일컫는 바이올린 협주곡 E 단조 Op. 64도 있고 심지어는 현악 협주곡 중 가장 멜랑꼴리 하다는 작품번호 Op. 13 No. 2 의 현악4중주 A 단조곡도 있지만 그래도 멘델스존의 작품 중 가장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곡은 역시 ‘무언가’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이를 또 사람들은 슈베르트의 무언가, 슈만의 무언가, 브람스의 무언가와 함께 4대 무언가 라고도 한다. 이 곡은 피아노곡으로 각 8곡씩 6집과 첼로와 피아노로 연주한 1곡으로 도합 49곡으로 이루어졌다. 각 곡은 매우 짧아서 불과 5분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 소품들로 거의 3부로 되어 있다. 거의 클래식 음악의 유행가 수준이다. 압도하는 음악이 아니라 조용한 시간에 혼자서 연주하고 혼자서 감상하는 듯 한 음악이다,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듯 연주자가 청중은 아예 없는 듯 요즘 말로 하는 ‘혼주’를 하는 듯한 음악이다. 절친 슈만과는 달리 멘델스존은 가곡을 남기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멘델스존은 이렇게 ‘가사
없는 가곡’을 16년이란 세월 속에 심혈을 기울여 작곡했다. 가곡을 비롯해 오페라 같이 ‘가사 있는 음악’을 작곡하지 않은 멘델스존을 두고 사람들은 어릴 때 만난 괴테의 영향 때문이라고 의심을 한다. 

괴테는 ‘음악은 절대 문학의 적수가 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 했다. 이를 멘델스존이 너무 깊게 새긴 것이 아닌가 하는데 이도 사실이 아니다. 멘델스존은 ‘참으로 뛰어난 음악은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라고도 했고 ‘말을 음악으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부정확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너무 정확하다’라고 말했으니 말이다. 굳이 구차하게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통한다는 뜻이다. 사실 음악계의 미스터리에는 멘델스존이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은 것이 들어간다. 당시 작곡가들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하는 일이었고 돈이 가장 되는 오페라를 왜 한 곡도 안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이 음악사학자들의 오래 풀지 못한 숙제이다. 셰익스피어 작품을 영어로 읽을 정도로 심취했으면서도 ‘한여름 밤의 꿈’을 왜 서곡만 만들고 그만 두고 말았을까? 오페라를 작곡할 만한 충분한 능력도 있었고 만일 그가 만든 작품이라면 당연히 인기가 있었을 터 인데 말이다. 예를 들면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를 만들 기회가 1831년, 1844년 최종적으로 1847년 등 여러 번 있었는데 그 때마다 고개를 흔들었다. 오페라를 만들자는 권유를 받으면 언제나 핑곗거리를 찾았다. 누나인 파니가 나중에 바그너가 희대의 걸작으로 만든 독일 전설 ‘니벨룽겐의 반지’로 오페라를 만들자고 하자 ‘너무 많은 사람이 끝에 가서 죽어 가야 하기 때문에 싫다’는 이유를 대고 거절한다.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자 오페라 팬의 한 사람이자 멘델스존의 음악가 한
명으로서 심히 유감이다.


멘델스존의 연애편지를 공개하지 않는 이유?

멘델스존을 보통 유복한 유태인 ‘엄친아’이자 평생을 행복하게 산 행운아라고 하지만 멘델스존도 이루지 못한 가슴 아픈 사랑이 있다. 스웨덴 출신 소프라노 제니 린드에게 아내도 있고 자식도 있던 멘델스존이 빠져서 편지를 수도 없이 보내고 심지어는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까지 협박을한다. 그래서 36살의 멘델스존의 요절이 누나인 파니의 죽음으로 인함이 아니고 실연으로 인한 상심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또 멘델스존의 걸작 중의 하나라는 A 단조 현악4중주 곡도 누나를 기리는 곡이 아니라 실연의 상심을 표현해서 그렇게 훌륭한 작품이 나왔다는 말도 있다. 멘델스존의 유족들로부터 받은 당시 연애 편지를 가지고 있는 멘델스존 재단은 각종 압력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공개를 하지 않고 있어 모든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아내고 있다. 가장 유복하고 행복했던 음악가로 일러지는 멘델스존도 어두운 면이 있다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다른 유형의 멘델스존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인 데도 말이다.
멘델스존의 발자취는 최근까지도 우리 발치에 살아 있었다. 차남인 화학자 파울 멘델스존이 설립한 아그파(Agfa)는 필름을 비롯해 사진기까지 만들던 세계적인 기업이었으나 시대의 변화를 타지 못해 결국 2010년부터는 겨우 후지필름을 통해 필름 상표로만 남을 정도로 사라지고 말았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경영했던 멘델스존 은행은 1900년대 초까지 왕성한 활동을 해 왔고 1차 대전을 겪으면서도 잘 살아 남았으나 히틀러에 의해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1부부의 모형이 전시된 방 2멘델스존 부인 세실 3 멘델스존 작품 악보를 비롯한 인쇄물 4 멘델스존 사진판 5 멘델스존 응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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