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새로운 발견 - 월간 뚜르드몽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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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호]     대륙분류 : [유럽]     국가분류 : [헝가리]     도시분류 : [부다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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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TFIELD] Franz Liszt 부다페스트 보다 아름다운 프란츠 리스트(2)

Travel :: Franz Liszt II

Franz Liszt 부다페스트 보다 아름다운 프란츠 리스트(2)

일년 중 11월을 난 참 좋아한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어정쩡한 달 이어서 이다. 이별의 가을은 비에 젖은 낙엽만 남기고 이미 저만치 가 버렸고, 고독의 겨울은 아직 오지 않고 문턱에 서 있는, 일년 중 가장 특별 난 데가 없는 달이다. 근거 없는 가을의 싸구려 멜랑꼴리에 빠질 일도 없고 모두들 이유도 모르는 채 흥분해 나대는 연말과 성탄절의 분위기까지는 아직 상당한 여유가 있다. 일년 중에서 분위기에 휩싸이지 않고
가장 차분하게 일상에 몰입할 수 있는 달이다. 주어진 삶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고 살아 가고 싶은 내게는 딱 체질에 맞는 달이다.
그래서 나는 11월이 좋다. 11월호에 이은 리스트의 마지막 이야기가 계속된다.
글과 사진 권석하편집위원(유럽문화탐사 저자)


독주곡과 같은 리스트의 고독한 삶

(11월호에 이어) 사실 따지고 보면 리스트의 음악은 누구와 협연을 하거나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서 연주하는 곡이 아니라 혼자서 외롭게 자신을 이겨내면서 하는 독주곡들이 많다. 무대 위에서 연주하는 순간은 어느 누구도 도와 줄 수 없다는 진리를 살펴보면 리스트의 외로운 운명은 이미 그렇게 지어져 있었다는 뜻이다. 화려한 무대에서의 고독은 모든 연주자들이 토로하는 외로움이다. 피아노 특히 독주곡은 사실 쉽게 친해 지기 쉽지 않다. 연주자가 청중을 의식하고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심취해서 쏟아내는 듯한 그런 음악이다.
 
그래서 감히 끼어 들기 어려울 정도로 접근을 용납하지 않는 듯 하다. 그러나 조금 마음을 열고 가까이 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그건 아니다. 처음에는 쌀쌀 맞은 새침한 여인일 수록 마음을 열면 살갑기가 그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연주자가 자신 만을 위해 연주하지 않고 나만을 위해 연주하는 듯한 그런 기분이 독주곡을 들을 때 마다 느껴진다. 이렇게 얘기하다 보니 내가 클래식의 대단한 애호가 같긴 하지만 사실 나의 음악 성향은 잡식성이다. 음악이란 음악은 조금더 좋아하고 덜 좋아하는 차이는 있어도 종류에 따라 차별을 해 본 적은 별로 없다. 살아 오면서 내 귀에 들리는 어떤 음악도 싫다 라는 느낌을 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내가 모은 판들은 정말 백화점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70-80노래들은 물론이고 나이가 들면서 잚을 때는 듣지도 않던 뽕짝까지 거의 가리지 않는다. 거기다가 요즘의 힙팝까지 편견을 가지지 않고 듣는다.
노래란 시대를 두고 변하는데 한 시대의 노래가 내 청년시절 때의 노래라고 그 노래들만 듣고 살 수 있을까 말이다. 새로운 풍조가 귀에 설어도 듣다 보면 익숙해진다. 예를 들면 힙팝도 처음에는 굉장히 낯설었지만 이제는 익숙해져서 자이언티의 ‘양화대교’ 같은 곡은 듣다가 보면 가슴이 찡하고 따라 부를 정도까지 되었다. 

‘우리 집에는 매일 나 홀로 있었지아버지는 택시드라이버어디냐고 여쭤보면 항상
"양화대교"아침이면 머리맡에 놓인 별사탕에 라면땅에새벽마다 퇴근하신 아버지
주머니를 기다리던어린 날의 나를 기억하네’
‘행복하자 우리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행복하자 행복하자아프지 말고 그래’

 

1 글루미 선데이 촬영지 게르바우드 카페 
2 전통식당 악단 
3 부다페스트 야경 
4 부다페스트 시내

얼마나 공감이 되는 가사들인가?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라는 가사들은 누구나의 가슴을 적시게 되어 있다. 젊은 음악이라고 외면 할 일이 아니다. 누가 요즘 젊은 세대를 가슴이 없다고 하는가? 지금은 고인이 된 마왕이라고 까지 불리던 신해철의 NEXT곡 하나를 아주 오래 전에 듣고 정말 요즘 말로 ‘뻑간 적’이 있다. 돌아 가신 부모님이 그립고 내가 내 자식들에게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돌아 보는 때면 가끔 찾아 듣는 바로 ‘아버지와 나’ 라는 곡이다. 다 큰 아들이 바라보는 아버지의 모습이 가사에 담겨 있어 가슴에 너무 와 닿아 뭉클 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아주 오래 전, 내가 올려다본 그의 어깨는 까마득한 산처럼 높았다.
그는 젊고, 정열이 있었고, 야심에 불타고 있었다.
나에게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었다.’
‘저기 걸어가는 사람을 보라.
나의 아버지, 혹은 당신의 아버지인가?
가족에게 소외 받고, 돈 벌어 오는 자의 비애와, 거대한 짐승의 시체처럼껍질만 남은 권위의 이름을 짊어지고 비틀거린다.
집안 어느 곳에서도 지금 그가 앉아 쉴 자리는 없다.
이제 더 이상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아내와 다 커버린 자식들 앞에서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한 남은 방법이란 침묵 뿐이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아직 수줍다.
그들은 다정하게 뺨을 부비며 말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그를 흉보던 그 모든 일들을 이제 내가 하고 있다.
스폰지에 잉크가 스며 들 듯 그의 모습을 닮아가는 나를 보며,
이미 내가 어른들의 나이가 되었음을 느낀다.’

 

1부다 언덕 위 건물들 게르바우드 카페
2 부다페스트 도시명 작품
3 리스트의 수제자 소피 맨터
4 48살 리스트
5 프러시아 빌헬름1세 에게 헌정된 승리 행진곡 악보


허름한 리스트박물관에 남아 있는 리스트의 영혼

조금 인용이 길었지만 이런 가사에는 깊은 인생 철학이 담겨 있지 않은가? 대중가요 가사에서 무슨 철학을 찾느냐 하지만 이 정도의 인생을 관조하고 꿰뚫는 철학보다 더 대단한 철학이 있는가? 사실 대중가요가 이제는 노벨문학상을 받는 시대가 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구 사회주의 국가의 박물관을 가 보면 중요한 물건과 자료와 함께 아주 소소한 물건들까지 꼼꼼하게 모으고 잘 정리 해 놓아 정말 경이롭다. 이름없는 학예사들이 아주 오랜 세월을 두고 천직처럼 묵묵히 매일매일 일상으로 정성 들여 정리한 모습이 역력하다. 이런 정도의 수준의 수집과 정리는 당장은 빛이 안 나는 일 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의 가치에 전혀 의문을 품지 않아야 가능한 일이다. 능률이니 실적이니 효율이니를 따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라면 과연 저런 게 가능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긴 그들의 사회에서는 국가가 정해주면 전혀 의심을 품지 않고 아니 품을 여지도
없이 그대로 받아서 해 내면 그만이니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저 정도로 해 내었을 터이다. 

어찌 되었건 그들의 자료 정리 노력은 정말 놀랍다. 러시아 야스나야 폴라냐에 있는 톨스토이 하우스 박물관의 수집품에서는 경악을 금치 못했고 라이프찌히의 멘델스존 하우스 박물관에서는 멘델스존이 유태인이라서 히틀러 치하에서 박해를 받은 걸 감안하면 그나마 후대들이 정성 들여 모은 수집품의 수준에 감동을 받았다. 이제 리스트 하우스 박물관에서 다시 한번 놀란다. 부다페스트 시내 한복판 거리(Vorosmarty Street 35) 에 자신이 거의 설립하다시피 한 왕립 헝가리 국가 음악원(사실 지금은 그냥 통칭 리스트 음악원이라 부른다)과 같은 건물에 위치하는 리스트하우스 박물관은 건물로 보면 보잘것없는 아파트 건물이다. 그러나 같은 지붕 밑에 자신의 이름을 딴 음악원에서 젊은이들이 오늘도 음악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리스트는
지금도 보람을 느낄 듯 하다. 리스트 하우스 박물관은 과거를 회상하기만 하는 박제 만으로 존재하는 박물관이 아니라 오늘도 살아 움직일 뿐 만 아니라 미래를 만들어 가는 박물관이라는 점이 사실 어느 박물관을 방문할 때 보다도 더 감동적이었다. 낮에는 관람객을 받아도 저녁이 되면 불을 끄고 캄캄해져서 유령들만이 빈 공간을 돌아 다닐 듯한 여느 박물관과는 달리 후학들이 리스트를 기리면서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말이다. 라이프찌히의 멘델스존 박물관이 주말이건 주중이건 저녁이면 작은 하우스 음악회를 끊임없이 개최 한다 던지 영국 돌체스타의 작가 토마스 하디의 딸이 영국 공익재단 네셔날 트러스트에 하디 집 소유권을 넘기면서 반드시 사람이 살아야 한다는 조건을 달아서 지금도 그 기념관 하우스에는 사람이 산다. 건물에는 사람이 살아서 인간의 숨결이 있어야 건물이 퇴락하지 않는다는 깊은 생각이었다. 정말 공감이 간다. 그래서
리스트 하우스 박물관은 참 행운인 듯 했다. 더군다나 이 집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그냥 사람들이 아니라 리스트를 따르는 피가 펄펄 끓는 젊은 학도들이 말이다. 

영원한 방랑자, 리스트사실 이 집에서 리스트는 오래 산 것은 아니다. 음악원이 설립되고 자신이 초대 원장으로 취임한 후 지금의 박물관인 음악원 건물 한 층에 집을 마련해서 1881년에서 1886년 사이 5년간 살았다. 그러나 그 마저도 사실 리스트는 그 유명한 ‘삼중생활(Threefold Life)’이라는 말처럼 바이마르, 로마, 부다페스트를 번갈아 가면서 알 년에 6000킬로를 여행하던 당시로는 정말 엄청난 거리를 쏘다닌 바쁜 삶이라 날짜로 따지면 5년 중에 1년 남짓 살았을까 말까 한 집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일 년에 6000 킬로라면 하루에 거의 20 킬로이다. 자동차로 가면 10분이 걸릴까 말까 하는 거리지만 한창 당시 개발이 되고 있던 기차에 실려 다녀도 하루에 많은 거리를 갈 수가 없었고 그나마 자주 기차가 다니지도 않았을 터이다. 결국 길에 깐 역마살 끼인 그의 일생이 참 지난 하긴 하다. 이렇게 3국을 돌아 가면서 살았기에 리스트를 헝가리인이라고 하지 않고 최초의 국제인이라고 하기는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리스트는 헝가리어를 못했으나 독일어가 모국어이고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능란하게 했다. 한 때 헝가리어를 배워 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가 태어난 고향이 당시는 독일 땅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래도 본인은 헝가리의 민요 등으로 헝가리 냄새가 나는 음악을 만들어 보려고 했지만 그의 음악에서는 결코 베토벤의 독일, 드뷔시의 프랑스, 엘가의 영국, 차이코프스키의 러시아 같은 헝가리가 안 보인다. 그의 음악을 프랑스 음악이라고 하는 사람이
독일 음악이라고 하는 사람보다 훨씬 많다. 비록 리스트의 대표작이자 가장 인기 있는 헝가리안 광시곡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헝가리안 광시곡에서 조차 프랑스 음악의 냄새가 난다. 역마살과 함께 도화살 까지 끼어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쉴새 없이 유럽 여기 저기를 옮겨 다니면서 살아야 했던 영원한 방랑자 리스트의 고단했던 일생은 부단히 강대국 이웃의 지배하에서 지난한 역사를가지 헝가리와 겹쳐져 더욱 애잔함과 함께 애틋한 정이 간다.

 

1 59살의 리스트
2 런던 연주 방문시 가져 온 런던탑 판화 등
3 리스트 침대 겸 소파
4 리스트서명이 인쇄된 리스트 박물관 표지판
5 죽기 3개월 전인 1886년 3월의 리스트 오른손
6 악본와 지휘봉
7 부다 언덕에서 보는 페스트 시내 8 리스트 일생을 설명하는 안내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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