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zerland

엄마와 함께한 따뜻한 스위스

 

그 동안 친구와 함께한 패키지여행, 아무런 계획 없이 떠난 나 홀로 여행, 오로지 맛있는 걸 먹기 위해 떠난 식도락 여행 등 짧지만 다양한 여행을 해왔으나, ‘효도관광’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엄마의 평생소원은 어렸을 적 교과서에서 봤던, 알프스호른을 부는 목동들이 있는 스위스여행이었다. 가이드이자 보호자로 떠난 이번 여행에서는 미리 공부해야 할 것도, 사소하게 신경 쓸 것도 많았지만 엄마에게 평생 남을 감동을 줬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글과 사진 이진영 에디팅 편집부

 

이진영｜경기 광주 오포

부모님과 함께 사는 20대 후반의 4년 차 직장인. 몸은 회사에 묶여있지만 마음만 은 항상 여행 중이다.

 

 

취리히, 스위스와의 첫 만남

도착지인 취리히의 첫 인상은 시원한 청량음료 같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과 파란 호수가 고된 새벽비행을 마친 우리의 에너지를 다시 채워주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신선한 아침 공기를 마시면서 곧바로 린 덴호프 언덕으로 향했다. 린덴호프 언덕은 취리히 시내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언덕이라고는 하지만 계단과 언덕이 그리 심하지 않기 때문에 엄마와 가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여느 전망대에서 그렇듯이 이곳에서도 다른 일행들의 사진을 대신 찍어주고 부탁도 하며 서툴지만 기분 좋은 감사를 나누기도 했다. 린덴호프 언덕을 오가는 길에는 로컬 식당과 기념품점, 고미술상점이 있는데, 이곳 중 한 곳에서 스위스 풍경을 담은 그림을 하나 사왔다.

여행을 갈 때는 항상 그 곳의 풍경을 담은 그림이나 엽서를 한 장 사온다. 길거리 화가의 그림에서는 프라하 카를교의 노을을 떠올리고, 흑백의 옛 사진에서는 블라디보스톡의 노동자들을 떠올릴 수 있다. 취리히에서 산 액자 그림에서는 변함없이 높고 높은 알프스 산맥을 떠올리며 엄마와 함께한 스위스에서의 5박을 떠 올리고 있다.

 

베른, 장미의 도시

엄마가 스위스 여행을 간다고 하시니 주변에서 베른이 제일 예쁘다는 말을 들으신 모양이다. 여행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나에게 맡긴 엄마께서 딱 하나, 베른을 추천하셨다. 여행사를 통해 예약된 기차표들을 살펴보니 인터라켄에 가는 길에 베른을 경유하여 관광이 가능했다.

베른을 추가한 여행계획표를 보여 드리니 오랜만의 설렘을 감출 수 없는 엄마의 표정이 아직도 기억난다. 베른은 지금까지 본 도시들 중에 건물들이 제일 깔끔하게 정리된 도시였다. 기차역에 캐리어를 보관하고 기차역에서 멀지 않고 전망이 훌륭하다고 소문난 국 회의사당으로 갔다. 국회의사당 건물 뒤편은 민간인이 갈 수 있도록 개방이 되어 있는데, 기대한 만큼 아름다운 에메랄드빛의 아레강이 펼쳐져 있었다.

이제 광장에서 열린 오픈마켓에서 납작 복숭아를 사들고 곰을 상징으로 하는 베른의 다양한 기념품들을 구경한 뒤 장미의 언덕으로 향했다. 베른도 그리 큰 도시가 아니라서 우린 모든 관광지를 도보로 이동했다. 장미의 언덕은 린 덴호프 언덕보다 등산이 좀 필요하다.

  하지만 정오를 알리는 교회의 종소리가 들리고 빛나는 아레강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서 가니 힘들기는커녕 꿈만 같았다. 장미의 언덕에는 그 유명한 장미 레스토랑이 있다. 북적이는 점심시간이었지만 식당 밖 테이블에 여유롭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베른의 전망을 감상할 수 있는 자리에 엄마를 앉히고 파스타와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밥을 먹고 곧바로 자리를 비워주는 우리나라와 달리 스위스에서는 항상 여유로웠다. 따뜻한 그 순간을 충분히 느낀 뒤 아인슈타인과 사진도 찍고(아인슈타인이 베른에서 연구를 한 적이 있어 장미 레스토랑 밑에는 베른 시내를 배경으로 아인슈타인과 같이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벤치가 있다.) 장미공원을 지나 곰공원으로 향했다.

곰공원에서는 일광욕을 하며 놀고 있는 곰들을 볼 수 있다. 곰공원을 지나 기차역으로 가기 전 강가에 앉아 강 빛을 감상하고 있는 중 강 건너편에 한 커플이 수영복을 입고 강으로 뛰어들었다. 강의 물살은 꽤 셌는데, 강물에 몸을 맡긴 커플은 순식간에 오른편 길가로 이동했다. 자전거보다 빠른 속도였다.

아직까지도 기억나는 아레강을 뒤로하고 미련이 남았던 기념품을 사고 매 정각에 움직이는 천체시계를 마지막으로 베른과 안녕했다.

융프라우, 따뜻한 겨울왕국

스위스 여행의 목적이라 할 수 있는 융프라우 관광은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여야 많은 마을들을 볼 수 있다. 여행을 할 때에는 양보다 질이라고 생각하지만, 스위스의 마을들은 하나하나 다양하게 아름답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놓치기 아쉬웠다. 한국과 시차가 8시간이나 차이 나기에 엄마는 오후 5시면 슬슬 졸려 하셨다.

그래서 저녁을 먹고 호텔에 일찍 들어가 잠을 청했는데, 덕분에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융프라우 기차역에 한국인 전용 할인쿠폰을 제시하니 기차표와 함께 한글로 된 빨간 융프라우 여권을 내밀었다. 새로운 스위스 여행이 시작된 느낌이었다. 판매원이 기차시간표와 함께 라우 터브루넨 방향으로 올라가고 그린델발트 방향으로 내려오는 코스를 추천했다. 그대로 기차여행이 시작되었다. 스위스는 기차의 나라라고 불릴 만큼 기차 시스템이 잘 되어있다.

사람들은 기차로 도시간 이동을 하며 출퇴근을 하며, 기차는 분단위로 굉장히 정확히 움직인다. 그 높은 알프스산맥까지 기차로만 올라간다는 사실이 경이롭기까지 한데, 기차는 올라가는 내내 평생 잊지 못할 그림을 선사한다. 첫 도착지는 라우터브루넨이었다. 높은 절벽에 가느 다란 폭포가 유명한 곳인데, 오전시간이어서 그런지 햇볕이 다 드리우지 않아 약간 쌀쌀했다.

그러나 스위스에 들어와 처음 본 목가적인 풍경에 연신 셔터를 누를 수밖에 없었다. 종소리가 은은하게 나며 염소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스위스 전통 가옥인 샬레들은 형형색색의 꽃들로 예쁘게 장식되어 있었다.

  시간이 되어 다시 기차를 타고 클라이네샤이텍으로 가서 융프라우까지 가는 산악열차로 환승했다. 구간별로 난이도가 다양한 하이킹 코스가 마련되어 있어 기차 대신 하이킹으로 클라이네샤이텍까지 갈 수 있다. 엄마의 컨디션을 고려해야 했기에 하이킹은 선택지에 넣지 않았지만, 기차로도 충분히 알프스의 파노라마를 볼 수 있었기에 그리 아쉽지는 않았다.

클라이네샤이텍에서 환승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그 동안에는 사람이 많아도 줄을 길게 설 만큼 북적이지 않았는데, 클라이네샤이텍에서 만큼은 30분을 기다려야 했다. 그 날도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이었는데, 고도가 높은 곳에서 햇빛을 받으니 눈으로 덮여있지만 너무 더워서 옷을 한 겹씩 벗었다.

드디어 융프라우 정상으로 향하는 산악열차에 탑승했고, 우리는 무섭지만 설레는 순간을 맞았다. 깜깜한 터널 속으로 올라갔고 열차 안 모니터에서는 현재 고도를 보여주었다. 고산병을 우려했지만 다행히 모두 별 탈없이 적응했다. 전망대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한국인이라면 무료로 먹을 수 있다고 하는 컵라면을 먹었다.

엄마는 생각보다 퐁듀, 뢰스 티와 같은 현지 음식을 잘 드시긴 했지만, 고춧가루가 들어간 한식을 하루 한 끼니씩은 먹을 수 있도록 계획을 마련했다. 그야말로 살인적인 물가를 자랑하고 있는 스위스에서 끼니 하나를 뜨끈한 라면국물로 채울 수 있다는 것이 정말 감사했다.

거기다 융프라우 정상의 설경을 바라보며 먹는 그 라면이란... 예전에는 여기까지 와서 무슨 컵라면이냐는 생각을 했었지만, 한국인 여행객들에게는 명물과 같이 여겨지는 융프 라우에서의 컵라면은 충분한 당위성을 가지고 있었다. 배를 따뜻이 채우고 화살표가 표시된 방향대로 융프라우 관광을 시작했다.

스위스 국기가 펄럭이는 노천 전망대, 영화 <아이스에이지>의 다람쥐가 도토리를 들고 얼어붙은 장면을 볼 수 있는 얼음궁전, 세계적인 스포츠 선수들이 융프라우 정상에서 테니스, 축구 등을 한 장면, 후손을 위해 춥고 험한 알프스를 개척하여 오늘날까지 세계적인 관광지로 발전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한 역사 등 스위스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산 정상에서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해외여행이 워낙 보편화되어 있어 스위스 융프라우는 이제 한물간 여행지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 뜨거운 직사광선에도 불구하고 차가운 하얀 눈이 대조되는 그때의 풍경은 아직도 눈을 감고 스위스를 상상하면 생생하게 펼쳐진다. 그런 풍경에 취해 행복한 탄성을 지르는 엄마의 모습도 감격스러웠다.

루체른, 내 기억 속의 스위스

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인 어렸을 적 엄마께서는 세계 각국의 유명한 건축물, 스포츠, 문화 등을 세계지도에 삽입한 세계 테마지도 책을 사주셨다. 나와 동생은 식탁 의자를 눕혀놓고 그 책으로 세계 각국을 여행하는 여행놀이도 했었다. 그때 스위스 지도에는 ‘빈사의 사자상’이 그려져 있었다. 루체른의 빈사의 사자상을 여행계획에 추가했을 때 어렸을 적 스위스로 상상 속 여행을 했던 그 설렘이 현실로 느껴졌다.

막상 빈사의 사자상을 마주했을 때는 숙연한 분위기에 말을 할 수 없었다. 빈사의 사자상은 1792년 프랑스혁명에 참전했던 스위스 용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절벽을 깎아 만든 조각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웅장한 크기에 놀랐고, 창이 관통해 방패를 베고 죽음을 고통스럽게 맞이하는 사자의 사실적인 표정에 슬펐다. 관광객들이 많았지만 그들도 똑 같은 감정인지, 그 누구하나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이 없었고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사자상을 바라볼 뿐이었다.

에필로그, 함께하기 좋은 스위스

취리히 행 비행기에서는 공항에 착륙하기 전부터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알프스산맥을 볼 수 있다. 눈으로 덮여있는 융프라우 정상이 뜨거운 햇빛 때문에 덥듯이, 한겨울 날씨의 스위스였지만 사람들의 따뜻한 환대로 결코 춥지 않은 여행이었다. 스위스는 부모님뿐만 아닌 어린 자녀들이 동행한 가족 여행지로도 손색없을 정도로 치안이 좋고 시설이 깔끔하다.

실제로 모든 도시에서는 유모차를 끌고 온 세계 각국의 관광객 들을 만날 수 있었다. 주요 관광 도시에서는 많지는 않지만 한식당을 찾아 김치찌개를 먹을 수 있다. 푸른 초원과 에메랄드 빛 호수를 기차에 편히 앉아 그림처럼 한 눈에 볼 수 있다. 교회가 보이는 노천 식당에서 교회 종소리를 들으며 여유로운 식사를 즐길 수도 있고, 공원을 산책하다 힘이 들면 쏟아진 다이아몬드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호수를 한동안 응시하며 앉아서 쉬어갈 수도 있다.

평생 동안 볼 거의 대부분의 백조와 소를 볼 수 있고, 난간이 꽃으로 덮이고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너무나 아름다운 목조다리인 카펠교를 건널 수 있다. 날씨가 흐려 케이블카를 타지 못할 수도 있지만, 운이 좋으면 알트호른을 부는 스위스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우연히 들른 고미술상점에서는 서툰 영어로 상점 주인과 따뜻한 인사를 나눌 수 있으며, 시내 한복판의 한식당에서 친절한 한국인 사장님과 인생 비빔밥을 만날 수 있다. 스위스는 평생에 한 번은 가볼 만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