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역사 속으로 들어가다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것을 먹으며, 예쁜 집에서 사는 것. 의식주(衣食住)에 대한 욕심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면서 가치기도 하다. 이중 기본이면서도 기본일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바로 집이다. 그림 같은 집에서 사는 것은 모두의 꿈이지만 전부가 이룰 수는 없기 때문이다. 꿈은 꾸지만, 모두가 공유할 수는 없는 기본.

이건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꾸준한 딜레마였을 것 같다. 비용적인 측면과 심미적인 부분이 의식주의 요소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기대와 가치의 수준이 전부 다르기 때문이다. 독일 여정에 오르면서 예쁜 집에 대한 생각을 했다. ‘건축학적인 미는 어떤 것일까’, ‘근대 건축물의 디자인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과감하지만 지나치지 않고, 심플하지만 부족하지 않은, 담백하면서 가장 보기에 좋은 건물. 그 질문엔 독일의 자랑 바우하우스Bauhaus라는 정답이 있었다.

에디팅 편집부 글과 사진 이두용 트래블 인플루언서 취재협조 독일관광청

 

전설, 바우하우스를 엿보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0년 전인 1919년은 우리에게 더없이 특별한 해였다. 한일합병조약으로 국권을 상실하고 9년이 지난 3월 1일. 우리는 일제 탄압에 항거하며 전 세계에 민족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온 국민이 총궐기해 평화 시위를 열었다. 우리는 그 해의 이날을 3·1절이라 부른다. 우리가 한마음으로 불타오르던 때, 멀리 독일에선 건축을 중심으로 순수미술과 사진, 연극 분야에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바로 건축학교 바우하우스Bauhaus의 태동이다.

독일어로 바우(Bau)는 건축을, 하우스(Haus)는 집을 뜻한다. 바우하우스는 이름처럼 처음은 건축을 위한 학교로 출발했다. 하지만 첫 단추에서부터 기존의 건축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새로운 건축 이론을 제시했고, 단순히 건물을 짓는 것을 넘어 그 안과 을 꾸미는 것, 가령 실내외 디자인, 가구 디자인, 응용미술 등 전 분야에 걸쳐 하나의 철학에 입각해 이론을 정립하며 과정을 이어나갔다.

바우하우스를 설립한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는 건축을 주된 이념으로 삼고 예술과 기술을 종합하는 교육을 꿈꿨다. 마치 다양한 예술 분야가 가지와 나뭇잎, 열매가 되고 그 모든 것이 모여 큰 나무인 건축이 되는 상상이었다. 놀라운 건 각각의 다른 예술이 교집합을 이뤘지만 필요 이상으로 화려해지거나 어느 한 분야만이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다.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실용’이 뼈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바우하우스가 100년 동안 전 세계의 건축과 예술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이유다. 그로우피스는 왜 이런 꿈을 꿨을까? 포장지를 풀어내면 알맹이가 드러난다. 바우하우스의 개교는 당시 독일의 경제 상황을 엿보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독일에선 이미 다양한 산업분야에서 그들보다 앞선 영국을 뒤따르고자 국가가 나서서 미술과 공업, 수공예 등을 장려해 산업성장에 힘쓰고 있었다. 사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패전국가 독일은 국민을 하나로 만들고 산업화에도 영향을 끼칠 돌파구가 필요한 상태였다.

유명한 건축가였던 그로피우스는 국민에게 단기간 내 튼튼하고 경쟁력이 뛰어난 주택을 공급하기 위해선 예술과 기술이 결합된 표준규격의 건축자재를 대량생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각자 따로가 아닌 큰 하나를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1919년 4월 바이마르 국립 바우하우스Staatliche Bauhaus Weimar의 초대 학장이 됐다.

바우하우스는 최초 150여 명의 학생을 선발해 도제식 수업을 진행했다.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 역할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파울 클레(Paul klee)나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요하네스 이텐(Johannes Itten), 라이오넬 파이닝거(Lyonel Feininger), 오스카 슐레머(Oskar Schlemmer) 등 미술가와 공예가가 대거 투입됐다. 놀라운 건 예술가와 학생들 사이에 위계나 차별 등을 불식시킨다는 의미에서 교사라는 칭호 대신 이들을 마이스터(Meister)라고 불렀다. 학교의 작은 것에서부터 교육 전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특별했다.

바우하우스 현재형, 베를린

다양한 시도로 승승장구하던 바우하우스는 1925년 첫 위기를 맞는다. 독일의 경제적 불황과 함께 정부의 압박이 시작되면서 바이마르에 있던 학교에 폐교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북부의 산업도시 데사우Dessau에서 바우하우스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며 학교의 인수를 파격 제안했고, 학교 측은 이를 받아들여 이전하게 된다.

이 시기를 데사우 시기라고 부른다. 이때부터 바우하우스는 단순한 직업학교에서 대학교의 지위로 승격했다. 마이스터들 역시 교수로 불렸고 졸업생들은 석사학위로 인정받았다. 1927년엔 정식으로 건축과가 개설되기도 했다. 학교는 새롭게 활기를 찾았지만, 산학협동의 적극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로우피스는 학장에서 물러났다.

이후 스위스 건축가 한네스 마이어(Hannes Meyer)가 2대 학장으로,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가 3대 학장으로 부임해 학교의 이념을 이어갔지만, 나치 정권의 탄압이 심해져 14년의 전통을 마지막으로 1933년 바우하우스는 폐교했다. 교수와 학생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세계 곳곳에서 날아왔던 유학생들은 자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바우하우스의 명맥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후 바우하우스의 이념과 모토는 미국으로 자리를 옮겨 적극적인 지원과 함께 더 큰 열매를 맺었다. 학교의 설립자이자 최초 학장인 그로피우스는 하버드대학교 건축부장으로 교수의 자리를 이어 나갔고, 3대 학장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일리노이공과대학 건축학부장으로 부임했다.

교수였던 헝가리 출신 예술가 모호이너지는 미국으로 망명해 시카고에 뉴 바우하우스(New Bauhaus)를 개설하기도 했다. 발터 그로피우스는 인생 말년에 독일에 바우하우스 기념관을 만들고 싶어 했다. 하지만 바우하우스가 건립됐던 바이마르와 데사우 모두가 당시 동독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미국으로 망명한 그로서는 어떤 협조도 받지 못했다. 독일 내 기념관 건립을 희망했던 그에게 서 베를린이 손을 내밀었고 결국 그가 설계한 바우하우스 전시관이 베를린에 완공됐다. 하지만 건물 완공 이전에 그로피우스가 사망하면서 유작으로 남았다.

베를린 전시장에는 그로피우스가 기증한 바우하우스의 자료와 함께 다양한 기록이 남아있다. 바이마르와 데사우가 아닌 베를린에서 바우하우스 100년의 역사와 당시의 이념, 지어진 건축물을 돌아봤다. 한마디로 인상 깊다. 바이마르와 데사우가 바우하우스의 시작과 끝을 남긴 도시라면 베를린은 바우하우스의 과거를 품고 현재를 이어가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베를린에서 바우하우스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은 1933년 지어진 ‘빌라 램케Lemke하우스’와 독일의 규격화된 주택의 시작인 ‘말발굽 형태 주거지Horseshoe Estate’, 지멘스 공장 근로자를 위해 지어졌던 ‘지멘스 슈타 트Siemensstadt’, ‘에리히 하만Erich Hamann 초콜릿 공장’, ‘ADGB 노동조합 학교’ 등 다섯 개 건물이다.

건축물들은 놀라울 정도로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우리나라의 1980년대 성냥갑 아파트가 떠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건 인정해야 한다. 심플을 넘어 극도로 단순해 보이지만, 용도와 미적 감각은 고스란히 담긴 건축 예술품이 바로 바우하우스다.

약사 폰타네, 소설가가 되다

베를린에서 바우하우스의 여정을 따르다가 한 오래된 건물에 들어가게 됐다. 중세 독일의 상점처럼 꾸며 놓은 방. 가이드는 이곳을 200년 역사의 약국이라고 소개하며 한 소설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작은 시골 마을 약국집의 아들로 태어난 테오도어 폰타네(Theodor Fontane)였다. 올해는 바우하우스 100주년이면서 독일의 소설가이자 시인 테오도어 폰타네가 태어난 지 200년 된 해이기도 하다.

그는 1819년 베를린 교외 노이루핀에서 출생했다. 독일 사실주의 문학의 대표로 손꼽히는 그는 <에피 브리스트>, <얽힘 설킴> 같은 명작 소설을 썼지만 어릴 땐 아버지의 가업을 따라 약사 일을 했다고 한다. 베를린에서 듣는 폰타네 이야기는 사실 밋밋했다. 보다 생생한 경험을 얻고자 노이루핀으로 향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도시 노이루핀의 첫 인상은 베를린과 사뭇 달랐다. 마치 체코의 시골 마을에 도착한 기분이다. 멀리 보이는 성당의 첨탑과 바우하우스의 이념과는 차이가 있는 아기자기하며 알록달록한 건물들. 베를린에서 시공간 터널을 지나 다른 나라에 도착한 기분이 들었다.

고요하고 여유 넘쳐 보이는 이곳에서 폰타네는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직업학교를 마치고 라이프치히과 드레스덴, 레친 등에서 약사 조수로 일했다. 약사인 아버지의 영향이 크다. 1844년엔 베를린에서 1년간 군인 생활을 했는데 이때 베를린의 작가 모임 ‘슈프레 턴넬’에 가입했다.

폰타네의 소설가로서의 재능이 발견된 시기다. 그는 이 모임에서 20여 년간 활동했다. 다양한 글쓰기 연습과 함께 신문에 기고 활동을 하던 폰타네는 30세에 약사를 그만두고 작가로 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50년 발라드 작품을 발표하고 작가로 정신 데뷔했다.

이후 4년간 정부 소속의 기자로 활동했는데, 이때 런던에 체류하며 영국 산업사회를 경험하는 한편, 영국의 역사와 정치, 문화를 소개하는 글을 신문에 기고했다. 그는 영국에 세 차례 머물며 스콧과 바이런 같은 영국 작가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작가의 인생을 선택한 그였지만 생활은 늘 어려웠고 59세에 쓴 <폭풍전야>가 인기를 끌면서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소설가 폰타네의 진짜 시작은 어쩌면 이때부터다. 폭풍전야의 인기에 힘입어 그는 <미로>를 연이어 내놨고 잇따라 18편의 장편과 중편소설을 발표했다. 사실 국내에서 독일 문학이 큰 인기는 아니다. 더욱이 고전인 폰타네의 소설은 애독자가 적다. 하지만 풍부한 인생 경험에서 나오는 따뜻함과 솔직함, 시를 쓰면서 쌓인 독특한 대화 기법은 여전히 세계의 수많은 독자에게 사랑 받고 있다.

폰타네 출생 200주년을 맞아 노이루핀의 박물관과 도시 곳곳에서 폰타네의 작품과 유물, 기록을 볼 수 있는데 사실 고요한 시골 마을이라 찾아보기 전까지 ‘이곳이 그런 곳인가’ 싶을 만큼 평온함이 더 짙다. 사실 개인적으론 그의 발자취를 따르고 난 뒤 폰타네의 유년기를 떠올리며 거닐던 호숫가와 골목이 더 좋았다. 고딕 양식의 쌍둥이 십자가 첨탑이 인상적인 삼위일체성당(St. Trinitatis)과 성당과 그 앞에 펼쳐진 호수에서의 보트 투어는 베를린 여정보다 달달한 추억을 선사했다.

 

독일 와인이 유명하다고?

베를린과 노이루핀을 거쳐 발을 디딘 곳은 비스바덴Wiesbaden이다. 독일 헤센주(州)의 주도인데도 우리에겐 익숙하지 않다. 지척에 독일의 세계적인 공항인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이 있지만, 그곳에서 내리거나 지나는 여행객조차 비스바덴을 들리는 건 흔한 일은 아니다. 비스바덴에 머문 건 GTM(Germany Travel Mart) 2019 행사를 위해서였다.

독일 정부에서 전 세계의 미디어와 관광·여행 담당자를 초청해서 진행하는 이벤트다. 행사 때문에 갔다고 하지만 비스바덴은 의외의 발견이자 주목할 것이 많은 도시였다. 먼저 비스바덴의 와인에 대해 들었을 때 가장 놀라웠다. 독일의 와인도 익숙하지 않았는데 이곳에서 와인이 생산되다니. 하지만 설명을 듣다 보니 와인에 대해 전혀 몰랐던 내가 부끄러울 정도였다. 세계적인 와인 명소에 와서 “What?”을 외친 꼴이다.

비스바덴에는 라인강을 따라 포도밭이 펼쳐진 라인가우 지역이 유명하다. 기원전 1세기부터 포도를 재배했고 1000년 전인 중세시대엔 수도원과 성에서 직접 포도를 수확해 와인을 만들었다. 라인가우는 독일 와인의 역사와 맛을 이어온 곳으로 독일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리슬링 포도가 나는데 이 품종은 가장 오래된 품종이면서 최고급 포도주 재료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20세기 중반엔 프랑스 보르도 등급 와인들보다 가격이 높았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후 팔츠와 바덴에서 나는 드라이한 와인 등에 밀렸다가 다시 현재 다시 인기를 되찾았다.

비스바덴 와인의 중심엔 수도원이면서 포도농장인 ‘클로스터 에버바흐Kloster Eberbach’가 있다. ‘클로스터’는 독일어로 수도원이란 뜻이다. 이곳은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을 영화화한 ‘장미의 이름’의 촬영지로도 알려져 있다. 이곳의 이름을 고스란히 딴 클로스터 에버바흐 와인은 ‘딱 내 입맛!’이었다. 달곰하지만 질리지 않고, 그냥 마시기에도 음식과 곁들이기에도 좋았다.

라인가우의 드넓은 포도밭을 바라보며 마셨다면 더 좋았겠지만 비스바덴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네로베르그Neroberg 언덕에서 즐긴 와인도 나쁘지 않았다. 이곳에도 클로스터 에버바흐 브랜드에서 재배하고 수확하는 작은 단위의 포도밭이 있다. 야트막한 언덕을 따라 수백 미터 이어진 포도밭이 도시 전경과 어울려 수채화 같은 느낌을 준다.

사실 와인을 마시면서 기분이 더 좋은 건 이 언덕에 오를 때 탔던 네로베르그반Nerobergbahn 열차 덕분도 있다. 1888년 만들어진 440m의 짧은 열차는 25도의 경사를 힘차게 오른다. 몇 분간의 탑승이지만 열차를 올랐다 내리는 기분은 여행이라도 떠나는 듯 좋다. 이 열차는 7,000리터의 수압으로 당긴다고 한다. 정차하고 나서 열차 아래로 폭포수 같은 물소리와 함께 쏟아지는 물줄기를 볼 수 있다. 포도밭 근처에는 독일에서 가장 아름답고 정교한 장식으로 소문난 러시안 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듀크 아돌프(Duke Adolph) 공작의 부인 엘리자베스(Elizabeth)가 출산 중 사망한 것을 슬퍼하며 그녀를 기억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쏟아지는 태양에 반사된 황금색 지붕이 슬프도록 푸른 하늘과 대비돼 더 강렬하게 느껴졌다. 곳곳에는 그들의 사랑을 슬픈 사랑을 추억하는 듯 연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비스바덴, 독일어로 바덴은 목욕

그러고 보면 독일 지명엔 바덴Baden이란 명칭이 많다. 알고 보니 바덴의 뜻은 ‘목욕하다’라는 말이라고 한다. 온천이 있는 도시를 칭하기도 한다고. 비스바덴 역시 온천지역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클란즈플라츠Kranzplatz 광장에 가면 시내 한복판에서 김이 폴폴 나오는 온천을 볼 수 있다. 광장 한가운데 있는 코크부르넨Kochbrunnen 분수 덕분이다.

이곳은 이 지역 온천의 발원지로 사시사철 끊임없이 염분이 포함된 온천수가 나온다. 물의 온도는 66도 정도다. 체감으론 우리나라 온천과 거의 비슷하다. 다만 물맛이 다른데 소금을 넣고 달걀을 삶은 물처럼 약간 비리고 짭짤하다. 이곳 분수의 물은 1분에 약 360리터가 솟아 나온다. 따뜻한 오후에도 하얀 김과 함께 물이 솟아 나오는 분수가 신기하다.

이 곳은 19세기부터 일명 ‘비스바덴의 광천수 요법’의 중심지로 각광 받았다. 현재도 분수 주변 멀지 않은 곳에 실내 온천이 여럿 운영되고 있다. 독일 온천과 목욕탕은 대부분 남녀혼탕이라 성인이라면 온천과 함께 이곳 목욕문화도 엿볼 수 있다.

비밀도 아니지만, 비스바덴의 온천이 궁금해서 이곳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카이저 프리드리히 온천Kaiser-Friedrich-Therme에 가봤다. 이곳은 1910~1913년 함부르크의 대표적 건축양식인 청년파 양식Jugendstil으로 지어졌다. 1999년에 400만 유로를 투자해 로마-아일랜드식 온천탕의 모자이크 타일을 새롭게 교체하고 전체적인 확장 공사를 하기도 했다고. 실제 내부의 모습은 수백 년 전에 지어진 건물처럼 느껴진다.

영화 ‘칼리굴라’에 나오는 로마의 목욕탕과 흡사했다. 탕에 걸어 들어갈 땐 영화의 장면과 자연스레 오버랩되기도 했다. 중앙에 넓은 온천탕을 중심으로 사방에 온탕과 냉탕, 러시아식 증기 사우나, 핀란드식 사우나 등이 있다. 남녀혼탕이라고 하면 야한 상상을 먼저 하게 되는데 개인적으로는 가보지 않고 상상하는 쪽이 훨씬 야하게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평일 낮 시간이라 내부엔 10여 명의 노인과 두서너 명의 젊은 사람이 있었는데 모두가 서로를 신경 쓰지 않고 각자의 온천을 즐기는 것에 최선을 다했다. 온천에 머무는 동안 아무 거리낌이 없었던 터라 입장하기 전에 선입견을 가졌던 내가 오히려 부끄러웠다. 비스바덴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극장이다. 이곳에는 몇 개의 극장이 있는데 말 그대로 오랜 영화를 상영하는 상영관과 연극, 발레, 뮤지컬 등의 극을 무대에 올리는 공연장 등이다.

이중 헤센 주립극장(Hessian State Theatre)이 단연 으뜸이었다. 이곳은 1894년 카이저 빌헬름 2세(Kaiser Wilhelm II)가 왕실 궁정 극장으로 만들었는데, 현재까지 오페라, 발레, 연극, 청소년 극장 및 콘서트 홀의 용도로 애용하고 있다. 고전적인 외관에서 풍기는 강렬함은 실내에서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는데 마치 로마의 성당에 들어온 듯한 로비에서부터 중세를 다룬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극장의 모습을 그대로 닮은 공연장도 인상 깊었다.

무대로 집중된 객석엔 수많은 빨간 의자가 줄지어 있는데 그곳에 많은 사람이 들어찬 풍경을 상상하니 정말 대단했다. 오래된 극장 건물은 현대식 건물과 이어졌다. 내부에는 각자의 공연을 준비하는 예술가들부터 무대 세트를 만드는 손길, 간판을 그리는 화공 등 정말 영화에서나 봤음 직한 사람들이 분주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이미 알려진 임팩트 있는 한방보다 의외의 소소함으로 감동을 받을 때 더 깊이 느껴지고 더 오래 기억되는 것 같다. 마치 어설픈 액션물보다 일본 영화 <카모메 식당> 같은 사건 하나 나오지 않는 영화가 더 오래 많은 사랑을 받는 것처럼. 비스바덴에서의 며칠은 화려함이 적어서 더 좋았다. 너무 강렬해서 한 번이면 족한 명소보다 두고두고 누군가와 또 찾고 싶은 곳. 비스바덴은 충분히 내게 그런 곳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