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발행구분
[2019년 11월호] 대륙분류 : [유럽] 국가분류 : [벨기에] 도시분류 : [겐트]
기사제목
[OUTFIELD] 유럽 여행의 선물 상자 - A gift box of European travel
A gift box of European travel 유럽 여행의 선물 상자
지난 8월 벨기에산(産) 맥주가 우리나라에 수입되는 맥주 판매순위 1위를 차지했다. 한·일 무역 갈등 이후 일본 제품 불매운동의 일환인 ‘NO JAPAN’이 자연스레 국민 정서에 자리 잡은 영향이 가장 크다. 그렇다고 해도 지도상에서 정확히 어디 있는지 단번에 찾아내기도 힘든 먼 나라 벨기에의 맥주가 국내에서 최고의 인기를 얻은 건 개인적으로 놀라웠다. 이후 미국 맥주가 마케팅을 내세우며 1위 자리를 탈환했지만, 벨기에 맥주 순위는 꾸준히 손가락 안에 꼽힌다.
개인적으로 벨기에 맥주를 좋아한다. 벨기에 3대 맥주로 통하는 호가든(Hoegaarden)과 스텔라 아르투아(Stella Artois), 레페(Leffe)가 모두 내 입에 딱 맞는다. 특히 호가든은 전용 잔에 가득 채워서 마시면 안주가 없어도 특유의 향과 부드러운 목 넘김 때문에 여러 잔을 마셔도 부담이 없다. 그래서도 벨기에 플랜더스 여정이 정해졌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맥주였다. 각자의 독자적인 맛을 가진 맥주 브랜드가 2,000여 개나 되는 나라. 출발도 하기 전에 벨기에를 설명할 수많은 수식어구 중 하나 그저 ‘맥주’에 크게 열광했던 나는 여정 내내 마주한 모든 벨기에에 반했다. 마치 여러 잔의 술에 취하듯, 시선을 돌릴 때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음식을 대할 때마다 잔잔히, 하지만 깊게 빠져들었다.
Gent 벨기에가 품은 가장 비싼 보석, 겐트 30,528㎢의 좁은 국토에 1,154만의 인구가 모여 사는 나라 벨기에. 그 면적은 우리나라 국토의 10분의 3 크기로 경상남북도를 합친 것보다 작다. 이 설명만으로도 국토의 넓이와 인구 밀도는 가늠할 수 있지만, 벨기에의 역사와 내면에 흐르는 아름답고 강한 저력은 상상하기도 힘들다. 맥주 하나만 떠올리며 벨기에로 날아왔는데, 첫 번째 여정에서 마주한 도시 풍광에 순식간에 맥주는 까맣게 잊게 됐다. ‘겐트(Gent)’. 긴 여행의 첫 단추인데 처음부터 너무 강렬했다. 유럽의 한 매체는 이 도시를 설명하면서 ‘여러 겹의 비밀에 싸여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유럽 최고의 도시’라고 극찬했다. 늘 하는 얘기지만 이런 평가는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는 말할 수 없다.
호텔에 여정을 풀고 호텔과 이어진 대로를 따라 걸었다. 5분쯤 지나 성 미카엘 다리에 올라서자 양쪽에 늘어섰던 건물이 걷히면서 강과 고풍스러운 건물이 어우러진 유화 한 폭이 걸음을 막아선다. 다리 아래엔 프랑스에서 흘러와 도시를 관통하는 레이어(Leie)강이 지난다. 오른쪽에는 성 미카엘 성당이 우측 정면에는 성 니콜라스 성당이 도시 풍경의 균형을 잡아준다. 조물주가 커다란 블록 장난감으로 강을 따라 조립한 듯 형형색색의 건물이 물길을 따라 이어져 있다. “우와!” 자연스레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림 같은 도시는 일 획도 부족하거나 과해 보이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 완벽하게 좋다. 출발점에서 멈춘 걸음은 한동안 움직여지지 않았다.
벨기에의 고도(古都)다 보니 세워진 건물마다 시간이 스미지 않은 것이 없다. 고개를 바짝 들고 기둥 하나, 기와 한 장, 벽돌 하나 꼼꼼하게 살피며 걸으니 좁은 도심인데도 어디가 어딘지 모를 지경이다. 그러다 가이드와 함께 골목으로 들어섰다. 아! 여기 별천지다. 좁은 골목을 따라 양쪽 벽에 화려한 색 스프레이로 장식한 그림과 글이 가득하다. 겐트의 명물 그라피티 골목이다. 알고 보니 겐트는 거리 벽화가 합법이라고 한다. 심지어 1996년 이후 매년 벽을 새로 칠하고 다시 그림과 글씨로 채운다고 한다. 역사와 전통이 살아있는 건물들 사이로 가장 현대적인 거리 예술이 공존한다고 생각하니 멋지다.
골목을 나오니 겐트 대학교 건물이 나타난다. ‘고작 건물이 하나인가?’ 싶었는데, 도시 곳곳에 건물과 시설이 많단다. 놀라운 것은 겐트 대학교를 중심으로 도시가 운영된다고 할 만큼 시민의 대다수가 교직원과 학생으로 이뤄져 있다. 겐트에만 7만여 명이 겐트 대학교와 관련이 있다고. 덕분에 젊은 도시인 겐트도 벨기에의 여느 도시처럼 자연스레 맥주가 일상이라고 한다. 레이어강으로 내려가 보트에 올랐다. 물길을 따라 도보로 봤던 건물의 이면이 드러난다. 몰래 비밀스러운 속살이라도 보는 듯 설렌다. 중간에 만나는 커다란 성은 ‘그라벤스틴(Gravensteen)’이다. 최초 9세기에 방어를 위해 목조 요새로 지었다가 1180년에 석조로 재건축됐다. 1353년까지 플랑드르 백작이 머물렀다고 해서 플랑드르 백작의 성이라고도 부른다.
성은 강에서 올려다보면 영락없이 요새지만 육로로 들어가면 꽤 넓은 마당이 있는 저택이다. 내부에는 감옥과 고문실, 침실, 거실 등 과거의 모습을 고증한 공간이 있다. 실내보다는 성곽을 따라 만나는 풍경이 몇 배는 낫다. 성곽 너머로 보이는 겐트 시내가 성 밖에서 보는 것과 다르다. 겐트는 보는 곳마다 느낌이 천지 차이다. 도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은 성 니콜라스 성당의 종탑이다. 과거엔 좁은 계단을 올랐지만, 지금은 엘리베이터가 놓여있어서 편하다. 종탑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진짜 천상의 기분이다. 날씨는 흐렸지만 ‘유화로 그린 도시’의 느낌은 오롯하게 느껴졌다. 겐트의 마지막은 성 바프 성당(Saint Bavo Cathedral)으로 화룡점정(畵龍點睛)했다. 이곳에 있는 제단화 한 점에 이끌려 겐트를 찾는 사람이 대다수다. 바로 반 에이크(van Eyck) 형제가 그린 ‘어린 양에 대한 경배’다. 12개의 패널로 이루어진 이 그림은 형이 그리다가 동생이 이어받아 완성했는데 플랑드르 회화의 명작이자 15세기 유럽 미술의 초석으로 여겨진다. 작은 그림 안에 우주를 담은 듯 섬세함이 놀라울 정도다. 이들은 세계 최초로 유화를 발명하기도 했다. 현재 성당에 있는 그림은 모작이고 원작은 겐트 미술박물관(MSK)에서 복원 중이다.
겐트를 떠나기 전, 벨기에로 날아오면서 설렜던 맥주에 대한 갈증을 풀었다. 어스름한 시간 벨기에 맥주 전문가 박찬 씨를 초빙해 자세한 설명을 들으며 여러 종류의 맥주를 시음했다. 벨기에 맥주를 자랑하기에 앞서, 사실 맥주가 유명한 나라는 많다. 하지만 벨기에 맥주가 특별하고 가치가 있다는 건 내가 아니라 세계유산을 선정하는 유네스코가 먼저 했다. 지난 2016년 ‘벨기에 맥주 문화’를 유네스코의 무형 문화재로 올린 것이다. 특별한 맥주를 양조하고 음미하는 것이 벨기에만의 살아있는 유산이라고 판단한 이유다. 맥주를 말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라는 독일이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브랜드도 벨기에보다 많고, 맥주에 대한 정보는 독일에 대한 것이 더 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1516년 바이에른 공국의 빌헬름 4세가 ‘맥주순수령’을 내리면서 독일에선 맥주를 만들 때 원료를 보리와 홉, 물로 제한했다. 수 세기 동안 제한된 원료를 가지고 맥주를 만들다 보니 독일 전역에 수많은 양조장이 있지만, 맛에 대해 새로운 시도는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도 각자의 브랜드와 지역마다 맛의 차이는 있다.)
반대로 벨기에는 맥주 양조에 대한 엄격한 기준이 없었다. 자유로운 생산이 가능했다. 게다가 전쟁 중 혹시 모를 음독을 피하고자 수도원에서 만든 안전한 맥주를 마시기 시작하면서 소량으로 양조된 수도원 맥주가 차츰 대중적인 인기로 이어졌다. 곳곳에서 다양한 맛의 시도와 함께 소량으로 생산되다 보니 뛰어난 품질에 독특한 맛을 가진 맥주들이 탄생했다. 맥주는 크게 발효방식에 따라 에일(Ale)과 라거(Lager), 람빅(Lambic) 3가지 종류로 나눈다. 이중 벨기에 맥주는 에일과 람빅이 지배적이다. 람빅은 거의 벨기에에서만 생산되기 때문에 벨기에 맥주라고 보는 게 맞다. 에일은 맥주를 발효시킬 때 위로 떠오르는 효모, 즉 ‘상면발효(上面醱酵) 효모’로 만든다.
그래서 ‘상면발효 맥주’라고 불린다. 에일 맥주는 과일과 같은 향긋한 맛과 진하고 깊은 맛이 특징이다. 벨기에, 영국, 아일랜드 등에서 생산된다. 라거는 19세기 중반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맥주를 발효시킬 때 에일과 반대로 아래쪽으로 가라앉는 ‘하면발효(下面醱酵) 효모’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하면발효 맥주’라고 부른다. 라거는 독일어로 ‘저장’이라는 말에서 나왔다. 하면발효 라거는 에일보다 낮은 온도에서 장시간 저장시키며 생산했기 때문이다. 라거 계열의 맥주는 에일과 달리 과일 향이나 깊은 맛이 없는 대신 부산물이 적어 깔끔하고 시원한 청량감이 특징이다.
라거 계열의 필스너 맥주가 한국 사람이 가장 즐겨 마시는 맥주라고 한다. 필스너는 5~10도의 저온에서 인공 효모를 맥주 원액 밑에서 하면발효 시키면서 숙성한 맥주를 가리킨다. 람빅은 같은 맥주지만 생김도 맛도 만드는 방법도 전혀 다르다. 섭씨 15~20도의 비교적 고온에서 람빅만의 특별한 천연효모를 발효시켜 만든다. 이 효모가 람빅의 핵심인데 브뤼셀 인근 센(Senne) 강 유역에서만 구할 수 있는 ‘브레타노 마이세스 브뤼셀렌시스’, ‘브레타노 마이세스 람비쿠스’다. 이름도 어렵다. 발효하는 과정도 다른 맥주와 완전히 달라서 상면과 하면에 국한하지 않고 천연효모가 자연 발효하면 맥주가 완성된다.
Brugge 북쪽의 베네치아, 운하의 도시 브뤼헤 다음 여정은 벨기에에서 만나는 베네치아의 낭만, 브뤼헤(Brugge)다. 벨기에는 많은 도시가 물을 곁에 두고 있지만, 브뤼헤는 땅의 길보다 물길이 더 수려하고 낭만적이다. 도심이 품고 있는 강은 명소 곳곳을 돌아 다른 도시로 이어진다. 보트에 올라 강을 따라 도시를 만끽하는 일은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똑 닮았다. 길지 않은 코스지만 계절을 끌어안은 브뤼헤를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다. 브뤼헤는 12세기에 플랜더스의 수도였다. 정치적 중심이 겐트로 옮겨진 뒤에도 북서유럽의 대표 중세도시 역할을 했다. 겐트와 브뤼헤가 고도(古都)로 불리며 벨기에 역사의 한 축을 담당하는 이유다. 13∼14세기에는 교역지로 전성기를 누렸다. 특히 영국의 고급 양모를 수입하는 항구로, 또 한자동맹의 북쪽 상업망의 중계지로 남부 유럽의 베네치아에 비길 만한 상업 도시를 이루었다. 오늘날 도시의 화려한 풍경을 담당하는 역사적인 건물과 성당들이 이 시기에 지어졌다. 이러한 이유로 브뤼헤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기도 했다.
도시 정중앙에 있는 마르크트 광장에 호텔이 있는 건 행운이었다. 여정 내내 흐리고 비가 내렸던 탓에 조금만 맑은 하늘이 보이면 새벽이든, 이른 아침이든, 깜깜한 밤이든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런데 호텔이 명소의 한복판에 있다 보니 잠깐의 맑은 날씨도 금세 사진에 담을 수 있었다. 마르크트 광장엔 브뤼헤 종탑이 우뚝 서 있다. 시원하게 펼쳐진 광장에 올라선 종탑은 80m에 불과하지만, 도시의 마천루 역할을 톡톡히 한다. 광장을 중심으로 어깨를 맞대고 사방에 늘어선 건물들은 고딕과 바로크, 로마네스크 양식 등 다양한 기법으로 건축됐다. 시대를 이어오며 이곳이 얼마나 번성했었는지를 실감하게 한다.
이중 돋보이는 아름다움을 가진 건물이 있는데 바로 브뤼헤 시청사다. 1420년에 완공된 이 건물은 벨기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로 손꼽힌다. 시청사 하나만 놓고 봐도 건물이 아니라 커다란 조형물처럼 아름답다. 이른 아침 창밖으로 햇살이 비치는 것 같아 식사도 거르고 호텔을 나섰다. 광장에는 장이 서는지 상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매주 수요일 아침 7시부터 6시간 동안 장터가 열린다고 한다. 순식간에 광장은 조금도 손색없는 재래시장이 됐다. 골목 사이에서 나온 시민들이 상인들과 웃으며 인사하고 물건을 구입한다. 활기가 넘친다. 강을 따라 걸으며 물에 반영된 건물들을 찍었다. 물은 어제와 오늘이 같아 보여도 강물 역시 수백·수천 년간 변함없이 흘렀을 것이다. 역사적인 건물과 더 오랜 시간 이곳을 지난 강의 조합이 아름답다.
광장과 곳곳으로 이어진 대로, 골목, 그리고 건물들도 볼거리지만 브뤼헤에서 빠뜨리면 아쉬운 곳이 그루닝헤 미술관(Musee Groeninge)과 베긴회 수녀원(Begijnhof)이다. 그루닝헤 미술관은 1716년 창설한 미술 아카데미의 수집품과 회원들의 기증 작품들을 가지고 시작돼 차츰 전시관의 형태를 갖췄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로 이전하면서 미술관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건 1930년부터다. 재밌는 건 이곳에 전시된 작품들은 대부분 플랜더스 지역 출신 화가 또는 이곳에서 작품 활동을 한 작가들의 회화라는 것. 지역을 국한하고 있는 것 같아 작품의 수준을 낮게 본다면 오산이다. 유화를 발명한 얀 반 에이크의 손꼽히는 명작은 물론 세계에서도 천재성을 인정받은 예술가들의 작품이 많다. 그림의 디테일과 컬러의 화려한 배색을 보면서 이곳의 건물들이 왜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었는지를 떠올렸다.
루벤스의 영혼이 머무는 예술 도시, 안트워프 안트워프(Antwerp)를 설명하는 데는 딱 한 단어만 있으면 된다. 바로 ‘루벤스(Peter Paul Rubens)’다. 이곳은 벨기에 플랜더스 지역에서 패션의 도시로도 유명하지만, 루벤스로 시작해서 오롯하게 루벤스로만 설명을 끝내도 모자람이 없다. 벨기에 북부의 상업 도시로 오랜 시간 명성을 누린 안트워프는, 16~17세기 스페인에 점령당했던 시기에도 예술과 문화의 도시로 꾸준히 번성했다. 특히 15세기에 경쟁하듯 이 도시에서 성장한 보석연마기술은 현재까지 다이아몬드 공업의 원천이 되어 도시의 자랑으로 여겨진다. 사실 안트워프의 다이아몬드에 대한 자신감은 박물관에 가보면 무릎을 치게 된다. 영화에서 봤던 보석 보관실에 온 듯 눈앞에 놓은 화려한 보석들이 은밀하고 신비롭다.
신화나 역사,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사실적인 그림으로 섬세하게 풀어내기 좋아했던 천재 화가. 루벤스. 거장이다 보니 유명한 작품이 많지만 단연 최고로 손꼽히는 작품은 프랑스 파리 뤽상부르궁전에 있던 ‘마리 드 메디시스의 생애’다. 뤽상부르궁전은 1615년 앙리 4세의 둘째 왕비였던 마리 드 메디시스를 위하여 지어진 곳이다. 루벤스는 대형 홀의 벽에 왕비의 생애를 섬세하게 그려 총 21면의 작품으로 완성했다. (관련 인물의 그림을 포함하면 24면이다.)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이 작품은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고향인 안트워프에서 예술의 혼을 불태운 루벤스인데 명작이 ‘마리 드 메디시스의 생애’뿐 일 리 없다. 안트워프에도 루벤스의 세계적인 작품이 있는데 바로 ‘성모 승천’과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다.
성모마리아 대성당에 전시된 이 그림들을 통해 루벤스는 바로크 시대의 피카소로 불리며 고향을 비롯해 유럽에서 최고로 손꼽히게 됐다. 두 그림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동화 <플랜더스의 개>에도 등장한다. 사실 만화영화가 더 친숙하다. 주인공 ‘네로’와 그의 충견 ‘파트라슈’가 나오는 이 동화는 안트워프를 중심으로 그려졌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루벤스 같은 화가가 되길 바라던 네로는 가난 때문에 큰 좌절을 겪고 죽기를 결심한다. 그리고 추운 겨울날 성모마리아 대성당으로 걸어와 평소 보고 싶어 하던 루벤스의 그림 앞에서 파트라슈와 함께 죽음을 맞는다.
안트워프가 루벤스의 도시라고 하지만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부족한 건 아니다. 동선을 잡기 힘들 땐 안트워프 중앙역이 으뜸이다. 철도계의 대성당으로 불릴 만큼 멋진데, 영화 <해리 포터>의 세트장에라도 들어온 듯 사방이 고풍스럽다. 안트워프의 수호신 브라보(Silvius Bravo)를 만나는 것도 추천한다. 광장을 시작으로 곳곳에 커다란 ‘잘린 손목’을 들고 있는 동상이 있는데 그가 바로 브라보다. 전설에 나오는 인물인데 부당한 돈을 받아내던 거인에게 대항해 그의 손목을 잘라 강으로 던져 거인의 시대를 끝냈다고 한다. 도시 이름인 안트워프도 ‘손을 던진다’라는 뜻의 ‘핸드 워프(Hand Werp)’에서 유래됐다고 하니 주의 깊게 볼만 하다. 루벤스가 살았던 집과 당시 그의 절친의 집을 돌아보는 것도 안트워프를 마음에 새기기에 더없이 좋다.
Brussels 벨기에의 과거와 현대를 관통하다. 브뤼셀 드디어 벨기에의 수도면서 플랜더스의 심장인 브뤼셀(Brussels)에 도착했다. 벨기에에 와서 좋은 것만 보고, 맛있는 것만 먹다 보니 어느 순간 눈높이가 이만큼 높아 있었다. 그렇다고 본편을 주마간산 격으로 볼 수는 없다. 브뤼셀은 사실 오래전엔 번성하지 않아 조용한 도시로 통했다고 한다. 교외에 있던 크고 작은 18개의 자치 시(市)를 병합하면서 현재의 수도 브뤼셀이 탄생했다. 놀라운 건 17세기에 이미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는 평을 받았다는 것. 브뤼셀을 설명할 때 꺼내기 쉬운 정답지는 단연 ‘오줌싸개 소년 동상(Manneken Pis)’이다. 명소가 많은 브뤼셀이지만 이 작은 녀석이 최고라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1619년 제롬 뒤케누아(Jerome Duquenenoy)가 만든 약 60cm 높이의 청동상이다. 오줌 누는 소년의 모습을 본떠서 만들었는데 너무 유명해져서 수 세기 동안 벨기에의 상징이면서 세계적인 스타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의 동상이 진품은 아니다. 1745년 영국에 약탈당하기 시작하면서 여러 번 도난을 겪었다. 1817년 도난 때는 조각나기까지 했는데, 그것을 이어붙여 만든 것이 현재의 동상이라고. 재미있는 건 벌거벗은 아이의 모습이 측은했는지 옷을 입히기 시작해 전 세계에서 옷을 보내왔다고 한다. 현재는 시립박물관에 옷장까지 마련돼 있고, 한복을 포함해 600벌 넘게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어지간한 사람보다 낫다. 오줌싸개 소년 동상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지만, 생각보다 크기가 작아서 대부분 실망한다. 거리의 교차 지점 안쪽 울타리에 작은 동상이 서 있는데 멀리서는 생김새가 잘 안 보일 정도였다. 모르는 사람도 많지만, 브뤼셀에는 ‘오줌싸개 소녀 동상(Jeanneke Pis)’도 있다. 사실 소녀 동상은 나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됐다. 오줌싸개 소년 동상을 지나 최고 명소 중 하나인 그랑플라스를 사이에 두고 반대편 골목 안쪽에 있다. 이 동상은 생소한 데다 워낙 생뚱맞은 골목 안쪽에 있어서 알고 찾아가지 않으면 찾기 힘들다. 심지어 보러 온 사람도 거의 없었다. 오줌싸개 소년 동상에 비해서 익살스러운 맛이 적고 디테일이 과해서인지 왜 인기가 없는지 알 것 같았다.
브뤼셀은 벨기에 수도지만 중심가는 생각보다 넓지 않아서 도보로 이동하기에 충분하다. 걸어 다니다 보면 계속 거쳐 가는 광장이 있는데, 이곳이 브뤼셀의 상징인 ‘그랑플라스(Grand Place in Brussels)’다. 의미는 단순히 ‘큰 광장(Grand Place)’이란 뜻인데 13세기에 이곳에 대형 시장이 생기면서 오늘날까지 성장했다. 고풍스러운 건물이 즐비한 거리에는 저마다의 멋과 맛을 지닌 상점과 레스토랑이 가득하다. 현재 남아 있는 석조 건물과 광장의 모습은 17세기 상공업 길드 시기에 만들어졌다. 시청사, 길드 하우스, 왕의 집 등 건축학적, 예술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광장이 1998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전통과 역사를 빼놓으면 설명할 수 없는 벨기에지만 근대와 현대를 아우르며 오늘로 이어오는 명물도 많다. 대표적인 건 역시 아토미움이다. 브뤼셀 중심가에서 약 5km 떨어진 라켄공원에 세워진 초현대식 타워 구조물이다. 전체적인 형태는 원자 핵분열의 순간을 표현한 것인데, 여러 개의 구로 만들어져 있다. 그냥 대형 쇠구슬처럼 보이지만 한 개의 구슬이 철의 원자를 1,650억 배 확대한 것이라고 한다. 각 구의 반지름은 18m고, 전체 구조물은 3개의 거대한 지지대로 떠받쳐져 있다. 이 구조물은 1958년 브뤼셀 만국 박람회를 위해 건설됐다가 건축학적 업적을 인정받아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다.
첫인상은 놀이동산의 기구처럼 보인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부로 들어가면 마치 거대한 우주선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아토미움은 그 존재로도 가치가 있지만, 꼭대기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브뤼셀 전경이 압권이다. 하늘 아래 장쾌하게 펼쳐진 시내가 인상적이다. 벨기에의 명작이라면 만화도 둘째가라면 서럽다. 벨기에 만화의 시초면서 세계적인 걸작인 팅팅(Tintin)에서부터 스머프, 아스테릭스 등 이름만 대도 ‘아하~!’를 외칠 유명한 만화가 많다. 벨기에 만화에 대해 궁금하다면 ‘벨기에 만화 센터’에 가면 된다. 그랑플라스에서 도보로 10여 분이면 도착하는데 건물에 입장하면 마치 다른 세계에 온 느낌이 든다. 내부에는 ‘스머프’의 100명이 넘는 등장인물 모형과 그림은 물론 ‘팅팅의 모험’ 시나리오·에피소드 분석 내용, ‘아스테릭스’ 캐릭터 입체 모형, 만화의 원화와 제작 과정, 작가들이 사용했던 작업 도구 및 소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만화를 얘기하니 벨기에의 세계적인 먹거리도 빼놓을 수 없다. 사실 유명한 걸 나열하면 너무 많은데 대표적인 몇 가지가 초콜릿과 와플, 감자튀김이다. 초콜릿은 안에 크림이나 견과류 등을 채워 넣고 초콜릿을 씌워 만드는 프랄린 초콜릿이 대표적이다. 유명한 브랜드가 많지만 ‘초콜릿 네이션’과 다양한 공방 등 여러 도시를 거치며 만난 초콜릿 모두가 한국에선 먹어보지 못한 맛이었다. 벨기에에서 한해 생산되는 초콜릿은 14만 톤 이상이고 벨기에 사람이 1년에 소비하는 초콜릿은 1인당 약 8kg에 이른다고 하니 벨기에를 초콜릿 네이션이라고 불러도 손색없겠다.
와플도 벨기에의 자랑인데 아토미움이 건설된 1958년 브뤼셀 만국 박람회 당시 모리스 페르메르슈(Maurice Vermersch)가 관광객을 위해 처음 만들어 팔았다. 예상외의 인기를 얻은 와플은 1962년 미국 시애틀에서 처음 선을 보이며 아메리카 대륙에 알려졌고, 이후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최초의 벨기에 와플에는 이스트를 사용했는데 현재는 보통 베이킹파우더를 사용한다. 벨기에에서 만들어졌지만, 오늘날엔 북아메리카에서 주로 아침 메뉴로 와플을 섭취한다. 주식이 되다 보니 토핑도 다양해졌는데 휘핑크림, 설탕, 과일, 초콜릿, 버터와 마가린을 시작으로 과일이나 바닐라 아이스크림 등과도 함께 먹는다. 오늘날 햄버거와 같은 패스트푸드의 기본 사이드 메뉴가 된 감자튀김도 벨기에가 원조다. 1680년경 벨기에 뫼즈강에 살던 사람들이 물고기의 수확량이 줄어들자 감자를 잘라 기름에 튀겨 먹었다는 기록을 시초로 본다. 햄버거를 시킬 때 워낙 흔하게 먹었던 음식이라 당연히 미국이 원조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놀랍다. 벨기에 감자튀김은 간이 세지 않고 감자를 크게 잘라서 튀긴 게 특징이다. 하지만 오늘날엔 세계 공통의 모양과 비슷하다.
▲ 다음글
|
유네스코가 인정한 문화유산, 벨기에 맥주
벨기에 맥주에 관한 설명을 듣고, 국내에서는 맛보기 힘든 서로 다른 7가지 종류의 맥주를 마셔봤다. 맛보기로 소량만 마시는 건 아쉬워서 한 종류 한 종류 충분히 따라서 마셨다. 분위기와 벨기에라는 지역적 이점도 있었겠지만 ‘다·르·다!’ 목 넘김과 마시고 난 뒤 입안에 남는 잔향이 달랐다. 모두 보리와 밀로 만든 맥주인데 종류마다 각자의 특징이 명확히 구분될 정도로 차이가 느껴졌다. 벨기에의 2,000여 종의 맥주가 전부 다를까? 궁금증마저 생겼다. 게다가 람빅은 별천지였다. 분명 맥주라고 듣고 마셨는데도 맥주 맛이 전혀 나지 않는다. 사과 주스 같기도 하고, 와인 같기도 하고, 감식초 같기도 하다. 양조장마다 맛을 개발하면서 맛과 향을 넣었기 때문인데 지금까지 마셔봤던 맥주와 전혀 달랐다. 한국의 지인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맛이다. 벨기에 맥주는 만들기에 따라 맛과 향은 물론 도수도 제각각이라고 한다. 위스키나 진처럼 높은 도수의 맥주도 많다고 하니 앞으로는 벨기에 맥주를 찾아다니며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조금 취하고 있었지만 깊어져 가는 즐거움과 비례했다.
오후엔 보트에 올라 도시를 돌아봤다. 아침에 물길을 걸으며 본 도시와는 확연히 다르다. 물 안에서 물 밖을 보는 기분은 마치 백조가 돼서 유유히 물장구를 치며 도시를 조망하는 느낌이다. 물 위로 놓인 다리들 아래로 통과할 땐 시대를 건너는 기분도 들었다. 브뤼헤를 무대로 하는 예쁜 이야기의 동화가 하나쯤 있어도 좋을 것 같다.
인근의 베긴회 수녀원은 높다란 나무로 둘러싸인 묘한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이곳은 1200년경 펼쳐진 베긴 운동과 함께 생겨났다고 한다. 이곳의 수녀들은 수녀원에 들어와서도 세상과 단절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며 살았다고 한다. 그렇다 보니 전쟁이나 질병으로 남편을 잃은 여성과 결혼 하지 않은 여성들도 이곳에 머물며 생활하다가 떠나기도 했다고 한다. 멋지고 따뜻한 곳이다. 점심을 겸해서 할브만(De Halve Maan) 맥주 양조장을 찾았다. 이곳은 레스토랑을 운영하면서 한편으로 브뤼헤 전통 맥주의 양조법을 계승하며 널리 알리고자 브루어리도 갖추고 있다. 과거의 공법과 당시의 재료 등 작은 박물관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시설을 잘 갖춰 놨다. 맥주 맛도 좋았지만 짧은 시간 브뤼헤 맥주를 주제로 공부라도 한 듯 좋았다. 겐트에서 박찬 씨에게 들었던 벨기에 맥주의 부록 같은 느낌도 든다.
Antwerp
다이아몬드는 덤이고, 루벤스를 들여다보자. 그는 1577년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열 살이 되던 해에 가족의 고향인 안트워프로 돌아왔다. 예술가들은 가난한 시절을 경험한 사람이 많은 데 반해 루벤스는 안트워프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가난을 경험한 적이 없다고 한다. 심지어 화가로서 성공도 빨라 살아있는 동안 부귀와 영화를 누린 몇 안 되는 예술가 중 하나다. 어릴 때부터 미술에 소질을 보여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던 그는 23살인 1600년 본격적인 미술공부를 위해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난다. 그리고 8년간 로마와 베네치아 등지에서 고대미술과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당시 이탈리아 바로크 화가였던 카라바조(Caravaggio)와 카라치(Carracci)의 화풍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그림에 접목했다. 이때부터 이탈리아와 유럽에서 명성을 얻기 시작한 루벤스는 돌연 안트워프로 돌아와 알베르토 대공의 궁정화가가 됐다.
동화에서 네로가 금화 한 닢을 주고 봤던 그림이 루벤스의 '성모승천'이었고, 평소에 보고 싶어 했지만 커튼에 가려져 보지 못하다가 죽기 전 보았던 그림이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였다. 어찌 보면 잔혹 동화처럼 느껴지지만, 당시 시대 상황을 묘사한 내용이라 가슴이 더 아린다. 사실 벨기에를 떠나오는 비행기에서 몇 시간으로 요약된 애니메이션을 보며 눈물을 훔쳤다. 만화 속에서 네로가 간절히 원했던 걸 나는 너무 쉽게 얻은 것 같아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 메인페이지 | 회사소개 | 정기구독 | 뚜르드몽드 기사검색 | 커뮤니티 |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