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itvice Lakes National Park 숨 쉬는 발칸의 땅

5시간 동안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의 구석구석을 함께 걸었던 가이드는 굽이굽이 이어지는 호수에 요정이 살고 있다고 했다. 물이든 숲이든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듯 거대한 자연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에서는 흔히 이런 유의 신화적인 스토리가 생겨나게 마련이지만, 플리트비체를 보고 있으면 그게 정말일 듯 싶기도 하다. 사람의 인적이 없는 밤, 깊은 산 속 호수에서 정말 요정이 달빛을 쐬러 나올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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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뚜르드몽드 창간 12주년 기념 인터뷰를 위해 뮤지컬 음악을 담당하는 박칼린 감독을 만났더랬다. 뮤지컬 ‘헤어스프레이’의 종연을 앞두고 휴가를 준비하던 중이던 그녀는 어릴 적부터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이 다가 아니라던 어머니의 먼 출장길을 늘 함께 했고, 덕분에 미국에서든 한국에서든 가족과 함께 혹은 그녀 혼자 훌쩍 떠났다 오곤 하던 습관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했다. 한국의 아기자기한 산과 들도 좋지만, 로키 산맥의 줄기와 그랜드캐니언 등 미국의 광활한 자연에서는 한국의 산천에서 느낄 수 없는 거대한 힘을 받게 되는데 그녀가 음악을 맡은 뮤지컬이 흥행에 성공하고, 음악감독으로 점차 인지도를 얻어가며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뻣뻣해질 때 쯤 그 거대한 자연의 영역에 들어서면 자신도 모르게 겸손해진다고 했다. 누구라도 할 수 있을 법한, 그리 특출난 얘기는 아니었으나, 무한자연의 영역에서 한층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그녀의 얘기는 인터뷰가 끝나고 몇 개월이 지나도록 어디에서든 ‘그랜드캐니언’의 얘기를 접할 때면 자연스레 그녀를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오래된 국립공원이자 최대의 비경이라는 플리트비체 국립공원(Plitvice Lakes National Park)에 닿았을 때, 자연스레 또 그녀를 떠올렸다. 바짝 마르기만 한 그랜드캐니언의 무한자연에 압도되었던 그녀가 이곳 플리트비체에 온다면 또 한 번 물과 숲의 기운에 압도되지 않을까. 바닥까지 들여다보이는 동남아시아 인근의 바닷물과는 또 다른, 터키석 색이 나는 물감을 잔뜩 풀어놓은 듯한 청록색 호수가 층층이 폭포를 지나는 동안 호수에서 개울로, 개울에서 다시 호수로 모습을 바꾸며 끝도 없이 이어지다가 공원의 경계에서 슬그머니 수량이 줄어들며 개천으로 바뀌는 것도 묘하지만 풍부한 물과 삼림이 있는 덕에 온갖 동식물이 서식할 수 있는 보금자리 역할을 하는 이곳은 크로아티아에서, 그리고 발칸반도에서 자연의 숨결이 가장 생생하고 가깝게 느껴지는 곳이다.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
수도 자그레브(Zagreb)를 출발한 지 거의 두 시간 만에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입구에 닿았다. 자그레브와 아드리아 해에 위치한 항구도시 자다르(Zadar)의 중간 쯤, 보스니아와의 국경과도 접해 있는 공원은 크로아티아의 동서남북 어디에서나 공평하게 정중앙 쯤 자리잡고 있다.
크로아티아에 있는 총 8개의 국립공원 중 가장 오래되고 규모도 큰 이곳이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순수 자연의 땅이던 플리트비체가 크로아티아를 대표하는 관광지로 떠오르게 된 것은 1896년, 공원 부지 내에 첫 호텔이 생긴 이후부터다. 그 후 이 지역을 보존, 발전하려는 모임이 생겨나며 체계적인 관리를 받아오다가 1949년에 크로아티아 최초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다시 30년이 지난 1979년에 유네스코 세계 자연 유산 리스트에 등재되며 발칸반도와 크로아티아를 잇는 비경을 보려는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는데, 인근 유럽에서 플리트비체를 찾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면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원시림 중 한 곳이라는 말이 과장은 아닌 듯싶다.

16개 호수의 장대한 하모니
3량의 버스가 연결된 트레인에서 내려선 곳은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호수의 수원이라 할 수 있는 프로스찬스코 호수(Proscansko Jezero)가 치기노바츠 호수(Ciginovac Jezero), 오크루그라크 호수(Okrugljak Jezero)로 나뉘는 경계인 하류 인근의 제3 스테이션이다. 한국에서 지금껏 살아온 기자에게는 어느 샌가 물은 항상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거라는 고정관념이 생겨버렸는데, 플리트비체에서는 반대로 남에서 북으로 물이 흐른다. 남쪽의 비엘라(Bijela) 강과 츠르나(Crna) 강에서 흘러온 물이 플리트비체의 원류가 되는 프로스찬스코(Proscansko) 호수를 이루고, 호수는 다시 하류의 호수와 폭포로 연결되며 플리트비체의 절경을 이루는 것. 자연이 잘 보존된 곳 치고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지만, 플리트비체를 두고 굳이 절경이다, 비경이다 온갖 수식어를 갖다 붙이며 치레를 하는 데도 물론 이유는 있다. 프로스찬스코 호수의 맑고 풍부한 물은 계단식으로 이어지는 16개의 호수와 92개의 크고 작은 폭포를 지나며 8킬로미터에 걸쳐 길게 이어지고, 호수의 전체 면적만 해도 200 헥타르, 주변의 삼림까지 합하면 3만 헥타르에 해당하는 광활한 지역에 온갖 종의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으니,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그 하나로 온전히 자연의 보고가 되는 셈이다.

플리트비체의 워킹 투어
남에서 북으로 점차 지대가 낮아지는 이곳에서는 걸어서도 충분히 공원을 돌아볼 수 있는데, 워낙 지역이 광활하다보니 호수를 가로지르는 보트와 그 둘레를 운행하는 트레인이 운행된다. 호수를 기준으로 그 주위를 에워싸고 세 곳의 트레인 스테이션과 보트를 탈 수 있는 부두 역시 세 곳이 있다. 물론 어떤 코스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소요되는 시간은 달라지고, 가이드 없이도 충분히 돌아볼 수 있도록 공원 곳곳에 색을 달리한 안내 표지판이 마련되어 있으니 자신이 의도하는 바에 맞도록 코스를 선택해서 그 표지를 따라가기만 해도 빠르면 3시간, 늦어도 5시간이면 플리트비체 완전 정복이 가능하다.
기자가 프로스찬스코 호수 앞의 제3 스테이션에 선 것도 나름 치밀한 계획을 세운 뒤다. 입구에서부터 가장 지대가 높은 3스테이션까지는 트레인을 타고 올라간 다음, 당연히 점차 지대가 낮아질 북쪽을 향해 걸어가다가 어퍼 레이크(Upper Lakes)와 로어 레이크(Lower Lakes)의 경계 쯤 되는 부분에서는 보트를 타고 가장 넓은 코즈악 호수(Kozjak Jezero)를 건너기로 한 것. 온전히 내 걸음으로만 일주한다면 더 기억에 남겠지만, 어쩌랴. 으레 그렇듯 주어진 시간은 제한되어 있는 것을.
본격적인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의 투어가 시작될 제3 스테이션에는 스테이션임을 알리는 나무 표지판이 서 있고, 옅은 베이지색의 갈대가 울창한 길 사이로 나무 인도교가 깔려 있다. 나중에 워킹투어 구간을 끝까지 걷다 보면 알게 되겠지만, 공원 전체를 통틀어 사람들이 걸어 다닐 수 있는 구간에는 모두 나무 인도교가 깔려 있어 굳이 이정표를 보지 않아도 길을 잃지 않도록 하는 또 다른 상징이 된다.
200헥타르에 이르는 호수 지대를 통과하며 하류로 내려가려다 보니 가끔은 호수와 얕은 개울 위를 가로, 세로로 가로지르도록 나무다리가 놓인 곳도 있고, 폭포를 옆에 두고 나란히 걷게 되기도 한다. 수량이 풍부한 프로스찬스코 호수는 아래로 거듭해서 흐르며 치기노바츠(Ciginovac), 오크루그라크(Okrugljak), 벨리코(Veliko), 그라딘스코(Gradinsco) 호수 등 어퍼 레이크 지역의 수원이 된다.
플리트비체의 호수에는 다량의 석회암 성분이 포함되어 있어 물의 색이 푸른 옥빛을 띤다. 물속의 이끼가 탄산칼슘 성분을 흡수해서 확장되며 제방을 이루고, 수중생물이 그 외벽을 덮고 자라나며 자연스레 폭포를 이루다보니 수원지에 가까운 상류 지역은 물살이 센 편이다. 개울과 폭포로 연결되며 긴 구간을 흐르는 호수는 물속에 포함된 탄산칼슘이 계속적으로 석회 침전물을 만들어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의 호수는 지금도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변하는 것은 호수의 경관 뿐이 아니다. 깊은 호수의 물빛 역시 계절과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 여름에는 파랬던 물색이 겨울에는 더욱 깊어지고, 하늘색에서 연한 초록빛으로, 진한 파랑에서 잿빛으로 변하는 등, 물속 미네랄과 유기체 함량에 따라 색을 바꾼다. 비가 많이 내려 외부의 진흙이 호수에 유입되거나, 햇빛이 내리쬐는 각도에 달라서도 달라지곤 하는데 대개는 호수 바닥에 쌓인 탄산석회로 인해 청명하기 그지없는 터키옥빛을 낸다.
계속 내리막길이 이어지고, 급격한 경사가 없어서 상부 호수를 따라 내려가는 길은 그리 힘들지 않다. 가끔 반대편에서 위를 향해 올라오는 사람들과 마주치게 되곤 하는데, 아래에서부터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올라오는 그들 대부분이 노년층의 관광객들이어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내리막길이어도 서너 시간동안 걸으려면 다리가 아픈데, 만약에라도 보트를 먼저 타려는 성급한 욕심에 산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우는 범하지 마시길.
모퉁이를 돌고, 고개를 넘어설 때마다 풍경을 달리하며 연방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어퍼 레이크 지역을 3시간 반 쯤 쉼없이 걸었을 때, 드디어 코즈악 호수(Kozjak Jezero)에 닿았다. 사실, 바닥까지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옥빛 호수와 물에 잠긴 고목, 사람의 손을 탄 적이 없는지 인기척이 느껴져도 피하지 않는 물고기 떼와 청둥오리 무리를 구경하다 보면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실감도 나지 않지만 말이다. 크로아티아어로 ‘크다’라는 의미를 가진 코즈악(Kozjak)은 그 이름처럼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에서 가장 큰 호수다. 어퍼 레이크와 로어 레이크의 중간 쯤, 그 경계에 위치한 터라 이곳에서 보트를 타고 호수를 건너면 그때부터는 국립공원의 하부가 시작되는 셈이다. 하부로 내려오면 바닥이 훤히 보이는 호수에서 유영하는 숭어와 더 빈번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청둥오리에만 맘을 뺏기기 쉽지만, 공원에는 불곰, 늑대, 오소리, 여우 등의 야생동물을 비롯해 부엉이, 뻐꾸기, 청둥오리, 왜가리 등 160 종 이상의 조류가 서식하고 있다. 다음 일정이 촉박하지만 않으면 옥빛 호수만 들여다보지 말고 하늘과 숲과 발밑의 잔디에도 고루 시선을 주며 천천히 발길을 옮길 것.
코즈악 호수에서부터 시작되는 로어 레이크는 밀라노바크 호수(Milanovac Jezero), 카루데로바츠 호수(Kaluderovac Jezero)로 이어지는데, 이 지역은 어퍼 지역에 비해 호수의 규모가 작고 수량이 줄어들며 수심도 얕아지다가 메인 게이트 근처의 코라나(Korana) 강과 사스타프치 호수(Sastavci Fall)에 이르면 인근 라임스톤 지역의 지반에 흡수되어 눈에 띄게 수량이 줄어든다. 페리에서 내린 후 메인 게이트에 이르는 한 시간 남짓한 거리에 78미터의 높이로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내에서 가장 긴 폭포라는 벨리키 슬랩(Veliki Slap)을 만나게 되기는 하지만 어퍼 레이크 지역에서 감탄만 연발하며 놀랐던 가슴을 진정시키며 플리트비체에서의 워킹투어를 마무리할 시점이기도 하다.
취재팀의 카메라에 담긴 플리트비체는 이제 막 단풍이 시작되는 10월 초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겨울에도 그리 춥지 않은 곳인 만큼 늦게까지 단풍을 볼 수 있는 크로아티아는 축복받은 땅이다. 이웃 발칸반도의 나라보다 국토는 작지만(슬로베니아를 제외하고) 아드리아 해를 온전히 끼고 있는 것도 그렇거니와, 거대 자연의 들숨과 날숨이 교차되는 플리트비체 국립공원까지 크로아티아의 영역에 있으니 이웃 나라들의 부러움 섞인 원성쯤은 기꺼이 감수할 만도 하다. 단풍이 예쁘게 물들어가는 이 가을에, 플리트비체의 절경은 더욱 빛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