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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그 암호를 풀어라

튀니지는 이슬람 국가다. 국민의 98퍼센트가 무슬림이고, 양떼나 낙타는 자주 볼 수 있지만 돼지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어딜 가나 기도 시간을 알리는 높은 종탑과 모스크를 만날 수 있는 곳. 튀니지를 여행하며, 나는 ‘이슬람’이란 단어를 생전 처음 접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슬람은 어디에 있든 하루에 다섯 번은 꼭 기도를 올려야 하는, 조금은 까다로운 종교라고만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을 수 없으니 돼지고기 삼겹살을 즐겨 먹는 한국에선 잘 먹히지 않겠단 생각도 잠깐 했다. 히잡을 쓴 여자들은 왜 그 나풀거리는 족쇄를 벗어던지지 않는 걸까? 종종 이런 궁금증이 고개를 들긴 했지만, 역시 단순한 호기심일 뿐이었다. 한국에선 좀처럼 접해볼 수 없었던 ‘이슬람’이란 단어는, 튀니지를 여행하는 내내 풀기 어려운 암호처럼 주위를 맴돌았다.

금요일, 요지경 속 나불 시장
튀니지에서 나불(Nabeul)은 시트러스의 도시라고도 불린다. 감귤과 오렌지, 레몬, 그레이프 프룻 등 시트러스과의 과일 생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금요일이면 시장은 발 디딜 틈 없이 붐빈다. 때맞춰 찾아간 금요일의 장터는 생각보다 규모가 훨씬 컸다. 2킬로미터 쯤 되는 길을 따라, 가죽으로 만든 신발과 쿠션 커버, 흰색으로 칠해진 지중해풍의 새장, 낙타 모양의 식기와 재떨이, 진한 향료와 향초 세트, 이구아나와 거북이까지, 각양각색의 아이템들을 파는 작은 가게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거대한 아치형의 메디나 입구에서, 짐 하나 들고 서울역에 떨어진 시골처녀처럼 눈이 둥그레져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자니, 꽃으로 두른 모자를 쓴 사람이 자스민 꽃 한 송이를 건넨다. 얼떨결에 받아들면 바로 1디나르(약 1천 원)를 내야 한다. 시장 안에서 사진이라도 한 장 찍으려고 포즈를 잡으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두 “1디나르.”를 외친다. 물론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신나는 쇼핑을 위한 액땜(혹은 입장료)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편하다.
시장 초입에 자리한 어느 가게 안. 한 상인이 작은 못과 망치로 찻잔 받침 크기의 금빛 접시 위에 사막을 지나는 낙타를 새기고 있다.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으면 무심하게 “이름이 뭐요?” 묻는다. 대답하면 바로 접시 위에 이름이 새겨지고, 얼결에 그 접시의 임자로 낙점된다. 가격은 역시나 1디나르. 재밌는 구경을 하고 기념품까지 챙겼으니 손해는 아니지만, 넋 놓고 있다간 정말 눈뜬 채로 코를 베일 수도 있겠다 싶어 바짝 긴장한다. 쇼핑을 위한 수업료가 만만찮다. 두리번거리며 걷는데 전통 과자를 가득 실은 수레 앞에서 주인이 시식을 권한다. 이번에는 살짝 피해볼까 하다가, 다른 건 몰라도 먹는 재미는 놓치지 말아야지 싶어 얼른 손을 내민다. “1디나르?” 의심어린 눈초리로 물으니, 그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는다.
시트러스와 더불어 나불에서 많이 생산되는 제품 중 하나는 도기이다. ‘천원 숍’처럼 웬만한 도기류는 모두 1디나르에 판매하는 가게가 있는가 하면, 너른 광장에 도자기를 펼쳐놓고 “싸요, 싸요.”를 외치며 남대문 시장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한다. 가게에서 판매하는 도자기들은 그 크기나 모양은 거의 비슷하지만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싼 값에 좋은 물건을 사려면 발품을 많이 팔아야 한다. 시간을 들여 한 곳 한 곳 꼼꼼하게 비교해보는 게 가장 좋긴 하지만, 주어진 시간이 단 10분이라 해도 나불은 예외 없이 흥미진진한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다문화를 품은 성곽 도시, 수스
번잡한 나불의 금요 시장을 뒤로하고, 이번에는 이슬람 문명의 발자취를 좇아 수스(Sousse)로 향했다. 기원전 6세기경 한니발의 거점이었던 수스는 이후 시저에 대항해 싸우던 폼페이우스의 주둔지가 되었고, 2세기에는 로마 황제 트라얀(Trajan)의 지배 하에 ‘풍요로운 도시(Fertile City)’라고 칭해졌을 정도로 번영했다. 이후 반달족이 북아프리카의 패권을 장악하면서 얼마간 우네리코폴리스(Hunericopolis)라 불렸고, 이어 비잔틴 점령 시기에는 유스티니아노폴리스(Justinianopolis)로 개칭됐다.
수스는 7세기 아랍의 오크바 이븐 나파(Okba Ibn Naf뎎)가 점령하면서 이슬람화 되었고, 이후 12세기엔 노르만족이, 16세기에는 스페인군이, 17세기에는 프랑스군이 차례로 주둔했다. 지난한 역사는 이 지역에 여러 겹의 문화를 덧입혔지만, 2차 대전 때 수차례 폭탄세례를 받으면서 안타깝게도 그중 다수가 연기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마을을 철통같이 수호하던 성벽만은 다행히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데, 성벽 한쪽에 지어진 망루(Ribat) 꼭대기에 서면 성 바깥의 풍경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달동네처럼 다닥다닥 지어진 낮은 주거지 너머로 또 다른 망루가 우뚝 서 있다. 825년 아글라바이 대왕이 주변국의 동태를 살피고 적의 침입을 후방에 알리기 위해 축조했다는 망루들 중 하나다. 모로코에서 알렉산드리아까지 해변을 따라 지어진 이 망루들은 초기에 무슬림들의 커뮤니티 하우스로 쓰였다고 한다.
이 지역은 하마멧에서부터 길게 이어진 아름다운 해안 덕분에 유럽인들이 많이 찾는 휴양지로 손꼽힌다. 해안에 형성된 리조트 타운 안쪽의 프라이빗 비치에서 한가로이 책을 읽거나 따스한 바다에 몸을 담그고 물놀이를 즐기는 이들은 대부분 5~60대의 유럽인들. 리조트에 머물지 않는 일반인들은 해안에 발을 들이기도 힘들다. 지중해의 투명한 바다는 깊이 들어갈 수록 코발트빛을 띠다가 지평선에 가까워지면 짙은 남색으로 변해간다. 푸른 바다 위로 화려한 색감의 패러슈트가 따스한 공기를 잔뜩 머금은 채 둥둥 하늘을 난다. 따스한 바람과 햇살, 살짝 데워진 바닷물, 흰 구름이 점점이 떠 있는 하늘을 수놓는 패러슈트. 한가로운 휴양지의 전형(Idea)이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일 게다.

이슬람 4대 성지, 카이루완
튀니지 중부에 자리한 카이루완(Kairouan)은 순례객들이 주로 찾는 그랑모스크를 포함해 무려 125개의 모스크가 있는, 북아프리카 최대의 이슬람 성지다. 건강한 무슬림이라면 생애 한 번은 메카에 다녀와야 하는데, 카이루완의 사원을 네 번 방문하면 메카에 한 번 다녀온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고 한다. 물론 검증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만큼 중요하고 의미 있는 곳이란 뜻일 게다.
어느 곳에서든 입장권을 사면 카이루완 내의 주요 관광명소 일곱 군데를 모두 둘러볼 수 있는데, 여유가 없어 두세 곳만 가보기로 했다. 먼저 모하마드의 절친한 친구가 묻혀 있다는 ‘시디 아비드(Sidi Abid)’ 사원부터 들렀다. 그는 648년 카이루완에서 36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죽었는데 후에 이곳으로 이장했다고 한다.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로 쓰이던 이 건물은 사원으로 바뀐 이후부터 예언자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1년에 한 번 일반인들에게 문을 여는데, 학생은 무료로 머물 수 있다. 사원은 나불에서 만든 꽃무늬 모자이크와 시리아에서 가져온 기하학적 문양의 타일, 그리고 레바논에서 마감해온 목재 등 최고급 재료로 꾸며졌다. 또 흰색으로 칠한 둥근 모스크 안쪽에는 자잘한 문양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예배 시엔 신도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이 미랍(Mirab)이라고 불리는 방에서 메카를 향해 절을 하고, 다른 신도들은 그를 따라 기도를 올린다는데, 아쉽게도 내부는 구경할 수 없었다. 모스크에는 무슬림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 문화가 꽃 피운 그랑모스크(Grand Mosque)는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건축가 시디 오크바(Sidi Okba)의 작품이다. 1만 명이 한꺼번에 예배를 볼 수 있고, 꽉 찼을 때는 야외 광장에 5천 명을 더 수용할 수 있단다. 시디 아비드 사원에 비해 장식이 덜하고, 건물 모양도 네모반듯하니 정갈한 느낌을 준다. 로마 유적지에서 가져온 420여 개의 기둥들이 굳건하게 지붕을 받치고 있는데, 그 모습이 종종 이전의 문명에 기대어 새롭게 발흥하는 역사의 생리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사원 한쪽엔 매일 다섯 번 씩 기도 시간을 알리는 종탑(Minaret)이 홀로 높이 솟아 있다. 첫 번째 종은 태양이 뜰 때, 두 번째는 정오 경, 세 번째는 점심 식사 후, 네 번째는 태양이 질 때, 마지막은 저녁 식사 후에 울린다. 예전에는 모하젠(기도자를 모으는 사람)들이 매번 종탑 위에 올라 직접 종을 울렸지만 지금은 현대화되어 버튼 하나만 누르면 된다고 한다. 그랑모스크 중앙의 우물 역시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대신 야외에 샤워시설을 마련해 두어 기도 전 손과 얼굴, 발을 씻을 수 있게 했다.
카이루완에서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메디나 안의 ‘비르 바로우타(Bir Barouta)’다. 물고기와 코란이 한 줄로 꿰어진, 행운을 부른다는 장식이 달린 입구를 지나니 낙타가 우물 주위를 빙빙 돌며 지하수를 퍼 올리고 있다. 이 물은 메카와 이어져 있다고 해 무슬림들에겐 ‘성수’로 여겨진단다. 낙타 목에는 이곳을 방문한 여성들이 행운을 바라며 걸어둔 수십 장의 스카프가 걸려 있었다. 주인이 ‘잠자, 자쓰라’라는 특이한 소리를 내자 잠시 멈춰 섰던 낙타가 다시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흰색과 푸른색으로 칠해진 천장이 빙빙 돈다. 우물물로 목을 축이고 기도를 올린 사람들의 얼굴엔 밝은 미소가 떠오르는데, 눈을 가린 채 우물 주위를 한없이 맴도는 낙타는 그저 애처롭기만 하다.
비르 바로우타는 카프리카(Cafrica)라는 카페와 이웃하고 있다. 좁고 길쭉한 카페 안에는 손님이 제법 많다. 유명 관광지 바로 옆이지만 커피는 2.3디나르로 그다지 비싸지 않다. 카이루완 메디나 밖의 또 다른 카페 사브라(Cafe Sabra)는 마을 사람들이 단골로 찾는, 말하자면 동네 선술집 같은 곳이었는데, 동양인이 신기한지 셔터를 누를 때마다 수십 명에 달하는 카페 손님들의 부리부리한 눈은 일제히 카메라를 향했다.
카이루완은 카펫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여성들이 집안에서 카펫을 만들면, 남성들이 가지고 나와 장터에서 판매한다. 이 지역 여성들은 처음 만든 카펫은 무조건 이슬람 성전에 바치는데, 성인의 생일에는 그렇게 모인 카펫들을 모두 바닥에 펼쳐둔다고 한다. 카펫의 품질과 사이즈에 따라 가격은 다양할 테지만 여기서도 흥정은 기본이다. 20디나르였던 카펫 가격이 바로 옆 가게에서 5디나르로 폭락하기도 하니 말이다.

비잔틴의 마지막 흔적 
어린아이들이 좁은 골목을 달린다. 자전거와 오토바이도 쌩쌩 스쳐가고, 여기에 또 말이 끄는 수레까지 유유히 지나간다. 탈 것이 많아선지 골목 한쪽엔 사이클리스테(Cycliste)란 간판을 단 바퀴 수리점도 보인다.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진 성벽 도시 네프타(Nefta)의 무너질 것 같은 낡은 건물 안에서, 로마 시대에 문을 열었다는 고릿적 가게들은 오늘도 여전히 성업 중이다. 비잔틴 양식이 시작된 터키에서는 거듭된 침략과 전쟁으로 더 이상 이 같은 메디나를 찾아볼 수 없단다. 이런 희소성 덕분에 이곳은 1~2년 내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예정이다.
기원후 500년경, 로마가 기독교화 되면서 문 밖에 십자가를 그렸는데, 네프타 성벽 안에는 지금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예전에는 문들이 모두 야자수로 제작되었다는데, 지금은 녹슨 철문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듯했다. 다행히 얼마 전부터 문화유산 보호 정책이 시행되면서 이같은 철문들은 다시 전통적인 건축 양식을 살린 야자수 문으로 대체되고 있다.
네프타의 골목을 걷다 고교 음악 교사인 호크 엘 아베스(Hoch El Abbes) 씨를 만났다. 그는 오래된 집을 수리해 음악 박물관 겸 카페를 열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튀니지의 전통 음악을 알리고 있다. 지난 3월엔 이곳에서 ‘그늘의 도시(La Cite des Ombres)’라는 영화를 촬영하기도 했단다. 그는 먼저 한 쪽에만 낙타 가죽을 씌운 타발(Tabal)이라는 튀니지 전통 북을 들고 알제리와 모로코, 레바논, 이집트, 그리고 튀니지의 전통 음악을 차례로 연주했다. 손님들은 그와 함께 북을 두드리며 즉석에서 그럴싸한 타악 협주를 해냈다. 그는 이어 염소가죽으로 만든 5현 악기 빈디어(Bindier)의 소리도 들려주었다.
그와 함께 전통 음악을 연주하면서 문득 올해 초 들렀던 가회동의 한옥 호스텔을 떠올렸다. 종종 한옥 대청마루 위에서 가야금 연주를 한다던. 전통 음악만큼 그 나라의 특성을 숨김없이 고스란히 간직한 텍스트가 또 있을까. 언젠가 이 생경한 리듬을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될 지도 모른다. 여행의 추억은 오선지 위로 빼곡한 음표들처럼 줄지어 흘러나오리라. 로마 시대부터 문을 열었다는 어느 가게 안에서, 나는 그렇게 튀니지를 흥겨운 리듬의 음표 안에 새겨 넣었다.
초기에는 이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이 50여 명에 불과했다는데, 지금은 1,500명 가까이로 늘어났다. 땅을 소유하지 못하고, 하루 벌어 하루 먹는 빈곤층이 절대 다수다. 그건, 300년 전까지도 노예제가 성행했다는 이 지역의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흙벽 사이를 걷다보면 시간은 금세 수백 년의 시간을 건너 옛 모습을 복원한다. 시장은 다시 북적이기 시작하고, 길가 어느 둔덕 위에 나란히 선 노예들은 체격 조건과 나이에 따라 차례로 팔려 나간다. 녹슨 철문도 자취를 감춘다. 금빛 투구를 쓴 로마인들이 발걸음도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하고, 터번을 두른 아랍 상인들도 골목을 누빈다.
그렇게 상상의 가루를 마구 날리며 성곽을 한 바퀴 돌아보았을 무렵, 골목이 끊어지고 야자수 숲이 나타났다. 푸른 숲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선 모스크의 둥근 지붕이 저무는 햇볕을 받아 반짝였다. 이 건물은 비잔틴 군대가 주둔하고 있던 6세기 경까지 카톨릭 성당으로 쓰이다가 터키 지배 이후 모스크로 바뀌었다고 했다. 흙빛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나프타에선 그렇게 둥근 모스크와 십자가가 공존하고 있었다.

사막의 관문, 토쥐르
토쥐르(Tozeur)로 가는 길. 풍경은 점차 색을 잃어갔다. 사막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다. ‘황량함’이라는 단어를 절감하고 있는데, 초록빛 야자수가 무성한 오아시스가 나타났다. 사막의 관문이라 불리는 제리드(Jerid) 지역의 주도, 토쥐르에 도착한 것이다. 제리드는 아랍어로 ‘야자수의 나라’를 뜻한다. 튀니지에서는 125종의 대추가 재배되는데, 그 중 가장 품질이 좋은 것은 오아시스 주변에서 자라는 야자대추로, 2년 가까이 보존할 수 있어 대개 수출용으로 분류된다. 토쥐르 공항은 시내에서 불과 5분 거리에 있어 이 지역에서 재배한 채소와 과일은 막 재배한 싱싱한 상태 그대로 유럽 각지로 보내진다. 사막 근처라 농산물을 재배할 수 있을까 싶지만, 땅이 원체 비옥해 물만 길어 올 수 있으면 농사는 어렵지 않단다.
마을 안쪽, 다르 쉐라이트(Dar Cherait) 호텔에 짐을 내렸다. 아랍-안달루시안 스타일로 꾸며진 호텔 내부는 보기 드물게 화려했다. 한편 객실로 이어지는 복도는 안달루시아 지역의 집들처럼 미음(ㅁ) 자 모양으로 가운데가 뻥 뚫려 있었다. 잠시 숨을 돌린 후, 복식 문화 박물관인 다르 쉐라이트를 찾았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곳은 다르 쉐라이트 호텔과 소유주가 같다. 호텔 경영자는 이곳의 유지로, 박물관은 그가 살던 집을 개조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박물관에서는 300년 전 만들어진 왕자의 침대며, 화폐 변환 이전에 사용되었던 100년 전의 금화, 판사와 귀족들이 주로 입었던 고급스런 비단옷 같은 진귀한 전시품들을 통해 이들의 문화를 엿볼 수 있다. 금실로 수놓은 남성용 결혼 예복과 여성용 드레스도 눈에 띈다. 예전에 튀니지에서는 결혼시 남성은 은제 목걸이와 머리장식, 브로치 등 보석이 담긴 상자를 구입해 보냈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여성은 직접 짠 카펫을 선물했다고 한다. 박물관 내에는 이 같은 복식자료 외에도 결혼식 전날 행운을 부르기 위해 헤나로 손과 발을 까맣게 물들이는 장면이라거나, 장관들이 체스를 두는 모습, 코란을 가르치는 학교의 풍경 등 튀니지 사람들의 생활상이 생생하게 재현돼 있다.
멀지 않은 곳에 튀니지 자연사 및 문화사를 다룬 테마파크 착왁(Chak Wak)이 있다. 테마파크 안에는 수억 년 전 우주가 생성될 무렵부터 지금까지 일어난 갖가지 사건들을 차례로 전시해 두었다. 초반에는 주라기 시대에 살던 다양한 공룡들과 온 몸에 숭숭 털이 난 원시인 모형 등 진화론에 바탕을 둔 역사가 펼쳐지고, 중반부터는 에덴동산과 노아의 방주, 홍해를 가른 모세까지 성경 속의 주요 일화들이 그려진다.
종교를 다룬 전시관에선 이집트와 그리스, 인도, 중국 등 세계 각지의 신과 종교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이슬람 국가는 종교에 대해 완고한 편인데, 이처럼 다양한 신들을 인정하는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다. 테마파크의 마지막 주제는 문명사다. 이 전시관에서는 포에니 전쟁을 이끈 한니발의 카르타고 군부터 아기 예수를 영접하기 위해 떠나는 동방박사들로 대변되는 기독교, 비잔틴과 오스만투르크, 그리고 아랍의 코란까지, 튀니지 역사의 줄기를 이루는 굵직한 사건들을 돌아볼 수 있다.
나불에서 시작해 수스와 카이루완, 네프타를 거쳐 토쥐르까지 이어진 길고 긴 여정 이후, 암호처럼 모호하기만 했던 종교 이슬람은 그 두꺼운 베일을 한꺼풀 벗었다. 그 안으로 살짝 엿보이던 이슬람의 맨 얼굴은 낯선 여행자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던 튀지니 사람들의 순수한 미소와 닮은 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