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ow Travel

삶을 유영하는 느린 여행

한시도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사회 속에서 여행은 휴식이다. 그러나 막상 여행자들은 휴식을 위해 떠난 여행에서도 일상에 만연한 성급함을 버리지 못한다. 급한 발걸음을 멈추고 숨 가쁜 삶에 잠시 스톱을 외치자. 나 자신과의 투명한 만남을 위한 슬로 트래블과 함께.

글 김수현 기자 사진 박지영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며 한 번이라도 제대로 쉬어본 적이 있었는지 생각해보자. 지금에 와서야 ‘그때가 좋았었지’라는 생각을 들게 하는 학창시절도 누군가에게는 치열한 경쟁의 연속이었을 테다. 한편으로는 나를 제외한 모두의 시간이 딱 하루만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는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상상을 했던 걸 알고 나니 씁쓸하면서도 안타까운 기분을 지울 수 없더라. 여유롭게 혼자만의 시간을 누리고자 여행을 떠나지만 어깨에 걸쳐진 무거운 배낭은 여행자의 걸음을 빨라지게 하는 마력을 지녔다. 여기 한 여자가 있다. 진땀을 빼며 관광지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기 바쁜 여행과는 정반대인 슬로 트래블을 추구하는 박지영 작가는 말한다. 많이 보기 위해 욕심내지 말고 천천히 걷고, 먹고, 쉬면서 생각하는 여행을 즐기라고. 두 달간 비에이의 세컨드 홈에 살며 느리게 사는 재미에 푹 빠진 그녀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일상을 버리고 나를 찾은 비에이에서의 두 달

여행 전날 짐을 싸며 항상 같은 고민에 빠진다. 이것도 필요할 듯싶고 저것은 없으면 안되니 쓸법한 물건 모두를 챙긴다. 빵빵해진 캐리어를 보며 모자란 것 보다야 풍족한 게 낫다며 스스로 위로하지만 정작 돌아온 후에는 입지 않은 옷, 쓰지 않은 물건을 다시 제자리에 두는 수고로움을 매번 반복하곤 한다. 짧은 여행을 위한 짐가방 하나를 싸면서도 작은 물건 하나 두고 가는 것을 이렇게나 걱정하는데, 지금껏 유지해온 일상에서 오랜 기간 멀어지는 건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일일 테다. 박지영에게 세컨드 홈의 이주민을 모집한다는 비에이관광청의 소식은 신데렐라 앞에 나타난 호박마차였다. 그러나 반신반의로 지원한 서류가 합격하자 그녀와 남편은 한 달간 매일같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만 했다. 여행 자체는 좋았지만 두 달간의 이주체험을 위해 많은 것을 버려야만 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더 흐르기 전에 모험을 해보고 싶었던 그녀는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짧은 준비 끝에 남편과 함께 비에이로의 여행을 떠났다. 도착하기 전까지 부부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우리 미친 거 아닐까’였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세컨드 홈에서의 두 달은 그녀에게 새로운 삶의 지표를 열어주었다. 이전에 직장인의 신분으로 주말과 연휴, 휴직기간을 이용해 다녀온 여행에서는 찾지 못했던 진정한 나를 발견했기에 선택은 옳았다.

이주체험 기회를 얻은 건 분명 행운이다. 그러나 더 큰 행운은 느긋하게 삶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발견했다는 데에 있었다. 낯선 공간에 도착한 그들은 새로운 환경 앞에서 현지인이 되기를 자처했다. 낮에는 자전거로 주변을 산책하고 작은 카페에 앉아 햇살을 즐겼으며, 밤에는 오후에 장을 본 재료로 신선한 요리를 만들어 소박하지만 풍요로운 시간을 보냈다. 정해진 이주기간이 지난 후에도 부부의 여행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렌터카를 이용해 2주간 천천히 홋카이도를 돌며 자연 속에서 캠핑을 즐겼다. 삶의 여유와 용기를 얻고 한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현재 1인 출판사 ’수프’를 세우고 <비에이로부터>, <슬로 트래블 노트> 등 느린 여행과 관련한 에세이를 펴내며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고 있다. 시골 생활의 경험이 없던 탓에 벌레와의 사투가 가장 힘들었다는 박지영의 여행은 느리지만, 느리기에 눈 앞에 있는 작은 것에서도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여유를 담고 있다. 

슬로 트래블, 슬로 라이프

슬로 트래블은 경쟁과 스피드 두 단어로 정의할 수 있는 현대 사회에서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와 별다를 바 없는 삶에 일침을 가한다. 1999년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그레베에서 출발한 느림 운동은 일상생활 안에서 느리게 살기와 느리게 먹기를 추구하는 움직임이다. 당시 그레베의 시장이었던 파울로 사투르니니는 마을 사람들과 세계를 향해 생산성 지상주의와 환경을 위협하는 바쁜 생활태도를 몰아내자고 호소했다. 처음에는 주민들의 많은 반발을 샀다. '느림'이란 발전하는 사회에 역행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슬로우가 단순히 패스트의 반대말이 아니며, 불편함이 아닌 자연에 대한 인간의 기다림이란 사실을 거듭 강조한 끝에 주민들은 서서히 마음을 움직였다. 현재 슬로시티의 수도라 불리는 그레베에서는 대형 승용차나 패스트푸드점을 찾을 수 없다. 그래서인지 이곳에는 독특한 사람도 많다. 30년간 정육점을 운영하며 단테의 신곡을 외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천 년째 대를 이어오며 올리브밭을 가꾸는 농부도 있다. 속도보다는 삶의 질을 강조하는 느림 운동은 금세 유럽 전역으로 퍼졌고, 전통과 자연을 보존하는 슬로 라이프를 추구하며 긍정적인 발전을 이루는 지역 또한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이제는 여행방식에서도 슬로우의 개념을 적용해 삶의 여유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하나라도 더 많은 관광지를 보는 것을 목적으로 삼던 바쁜 여행이 아닌 자연 속에 살면서 고유의 먹거리와 지역문화를 체험하고 마음의 고향을 찾아가는 여행. 박지영 작가는 슬로 트래블을 떠나기 위해서 약간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이야기 한다. 그동안의 여행에서 여유를 방해해왔던 모든 습관을 버리는 것. 빼곡히 적어놓은 볼 곳, 먹을 곳, 준비물 리스트도 함께 말이다. 물론 이것들이 아예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의존하거나 얽매이지 않는게 중요하다는 거다. 인터넷상의 정보도 좋지만 때로는 직접 부딪혀보기도 하고, 현지 주민들을 통해 얻는 것이 더 생생하고 좋은 경우가 많다. 그녀는 우연히 만나는 즐거움을 놓치지 않고 싶기에 슬로 트래블을 선호한다. 물론 금전적인 문제를 무시할 수는 없다. 가끔은 큰 돈을 들여 떠난 여행이기에 여러 곳을 돌지 않으면 손해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 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행은 그 자체로, 매 순간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관광이건 휴식이건 어떤 식으로든 확실한 보상을 준다고 그녀는 말한다. 비단 해외 이주 프로그램을 통해서만이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어느 곳에서든, 어떤 방식으로든 느린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인생에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필요해질 때, 휴식과 용기를 얻고 싶을 때야말로 마음의 여유를 두고 여행을 떠날 시기다. 기간을 길게 잡는다면 당연히 많은 비용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들어가는 비용과 시간 이상으로 내면의 자신이 추구해왔던 삶에 가까워질 기회가 생기기에 더욱 값진. 이것이야말로 특별한 삶을 만드는 특별한 여행, 슬로 트래블의 진정한 매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