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에 왔다. 미안하지만 와이키키는 아니다. 친구 역시 하와이에 간다고 했을 때, 대뜸 와이키키부터 말했다. 여기는 하와이 아일랜드Island of Hawaii 다. 본래 이름보다 빅 아일랜드Big Island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 하와이 제도를 이루는 여덟 개의 섬 가운데 나머지 일곱 개의 섬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크다. 

그러니까 와이키키가 있는 오아후만 봤다면? ‘진짜 하와이’는 못 본 셈이다. 제주도보다 여덟 배나 넓다는 이 섬에 사는 사람은 20만 명이 채 되지 않는다. 사람이 사는 일부분을 제외한 거의 모든 공간은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았다고 보면 된다. 출발 전 짐을 꾸리며 예쁜 원피스보다 편한 티셔츠와 바지를 더 많이 챙긴 것도 이곳을 더욱 열심히 걷고 여행하기 위해서다. 

하와이 아일랜드를 더 신비롭게 만드는 건 변화무쌍한 날씨다. “지구에는 열대 다우에서 툰드라에 이르기까지 총 13개의 기후대가 있습니다. 그중 총 11개 기후를 이곳에서 만날 수 있죠.” 가이드는 잿빛 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하와이의 연평균 강수량은 지역에 따라 150밀리미터에서 3,800밀리미터까지 변화 폭이 크다. 해안 지역은 일반적으로 따뜻한 아열대 기후를 보이고, 고도가 높은 지역은 서늘하고 비가 많이 내린다. 

“하와이 아일랜드에 며칠만 있어 보면 하루 동안 사계절을 모두 경험할 수 있을 거에요” 하와이 아일랜드에서 십 년을 넘게 산 현지 가이드는 아직도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와 풍경이 낯설다고 말했다.

하와이 아일랜드는 크게 두 지역으로 나뉜다. 마우나케아Mauna Kea와 마우나로아Mauna Loa 산을 중심으로 오른쪽은 힐로Hilo, 왼쪽은 코나Kona다. 두 지역은 자동차로 고작 두 시간 거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기후대는 완벽히 다르다. 힐로는 10일 중 비가 내리는 날이 8~9일이고 연간 강수량은 3천밀리미터가 넘는다. 

반면 코나는 연간 강수량이 120밀리미터 남짓일 정도로 맑은 날이 대부분이다. 습기 가득한 공기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산맥에 부딪히고, 그 과정에서 구름과 비가 생기는데 이것이 아랫마을인 힐로에 비가 되어 내리는 것이다. 오아후섬의 에메랄드빛 바다를 뒤로하고 하와이 아일랜드의 힐로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가 뜨자마자 창밖은 하얀 구름으로 뒤덮였다. 힐로에 내렸을 때 비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힐로 여행 중 맑은 날씨를 본다면 당신은 운이 좋은 거예요. 힐로에는 1년 중 300일 정도 비가 내리거든요” 가이드의 말이 생각난 것도 이때다. 시내로 나가볼까 하다 호텔 레스토랑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쪽을 택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듣기 좋았고 코나 맥주도 맛있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비와 함께 시작하는 여행도 나쁘지 않다. 

비가 내리면 비가 내리는 대로 나름의 운치와 재미가 있지 않을까. 비가 오면 그것을 걱정하는 것보다, 비 맞는 걸 즐기는 편이 인생에는 훨씬 이롭다는 사실을 나는 여행을 통해 배웠다. 여행은 우리에게 긍정하는 법을 끝없이 가르쳐준다. 하와이 아일랜드에서 보낸 4일 가운데 한나절 빼고 내내 흐리고 비가 왔다. 

우리가 하와이에 기대했던 따사로운 햇살과 투명한 바다색은 만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오히려 이 섬의 민낯을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비 내리는 어두운 날, 화산은 더욱 경이로운 붉은 빛을 내뿜었고, 숲은 더 짙은 초록으로 깊어 갔다. 숲이 만들어내는 안개는 자연이 고요히 내뿜는 숨처럼 부드럽고 따뜻했다. 이른 아침이면 나는 창틈으로 들어오는 새소리에 잠이 깨곤 했는데, 그때마다 하와이 아일랜드에 온 것이 믿어지지 않아 베개를 꼭 쥐어보곤 했다. 이토록 신비로운 아침이 존재할 수 있다니요.

하와이 아일랜드의 꽃, 화산국립공원

어느 책에서 펄펄 끓는 용암을 찍은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지상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SF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더 놀라운 건 그 사진이 하와이였다는 것이다. 푸른 바다와 짙은 야자수 그늘이 드리워진,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하와이와는 전혀 다른 풍경. 나는 그 사진을 오려내 서랍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나는 마침내 하와이 아일랜드에 왔다. 첫날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한 일은 그 사진을 거울 위에 붙인 것이다. 하와이 아일랜드는 섬 자체가 거대한 화산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바다 밑에서 수백만 번이나 솟은 용암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섬이 하와이 아일랜드다. 2,800년 동안 쌓인 용암의 높이가 무려 9,600미터다. 

지금도 용암은 계속 흘러나오고 있다. 하와이의 화산을 직접 경험해보고 싶은 이들은 킬라우에아 화산국립공원Hawai'i Volcanoes National Park으로 향한다. 1,200미터 고지에 있는 이곳은 면적이 무려 4억 평에 달하는데, 이 가운데 240킬로미터 길이의 코스에 차와 도보로 접근이 가능하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차가 화산 지대를 통과하는 지역으로 킬라우에아 칼데라를 따라 킬라우에아 전망대, 토마스 A. 재거 박물관, 서스턴 라바 동굴을 지난다. 그 동안 창밖의 풍경은 화구, 사막, 열대 우림으로 모습을 계속 바꾼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전혀 다른 풍경에 자꾸만 차를 세우게 된다. 1980년 세계 보호지역, 198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됐다.

차를 이용한다고 해도 한 번의 여행으로는 공원을 모두 둘러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많은 여행자들이 분화구와 용암을 관찰한 후 박물관과 동굴을 방문하고는 이내 발길을 돌린다. 이글거리는 화산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토마스 A. 재거 박물관 앞. 킬라우에아 칼데라에 있는 할레마우마우 분화구Halemaumau Crater가 정면에 보인다. 

1983년 1월 3일 이후로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는 킬라우에아 산은 2.2만 제곱킬로미터에서 6만 제곱킬로미터 사이의 용암을 매일 토해낸다. 용암의 열기는 분화구 테두리를 붉게 데우고 멀리 구름까지 붉게 물들인다. 돌구멍에서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와 유황가스도 무시무시하다. 과학자들은 이런 현상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하와이의 도로는 굳은 용암 위에 나 있다. 도로 밖에 있는 돌은 용암이 흐르다 멈춰서 만들어진 것이다. 손에 쥐면 차가운 돌덩어리. 하지만 이 돌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2,400도의 마그마였다. 하와이 원주민들은 돌을 ‘아아’와 ‘파호이호이’로 나눠 부르는데, 아아는 뾰족한 돌을 파호이호이는 평평하게 생긴 돌을 말한다. 

하와이 아일랜드에 머무는 짧은 기간 동안 나는 세 번이나 화산을 찾았다. 하지만, 아직도 내게는 화산에 대한 갈증이, 더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가 남아있다. 맨틀과 외핵, 그리고 내핵으로 이루어진 지구라는 돌덩이. 그 돌덩이가 피처럼 품고 있는 붉고 뜨거운 용암. 어떻게 보면 지구의 피가 용암이고, 유황연기는 지구의 거친 숨소리가 아닐까. 

다음에 이곳을 다시 찾는다면 살아 꿈틀거리는 지구를 느끼기 위해 국립공원 안에 있는 호텔에서 며칠 동안 머물며 천천히 트레일을 걸어볼 생각이다. 하와이 아일랜드를 떠나는 날, 나는 오려 두었던 사진을 고이 접어 다시 트렁크에 넣었다. 그것은 내가 다시 이곳으로 오겠다는 약속이기도 했다.

펠레 여신의 분노

지난 2018년 5월 초, 하와이 아일랜드에 수차례의 강도 높은 지진이 일어났고, 그 지진의 영향으로 킬라우에아 화산이 마침내 폭발했다. 여행 당시 가이드는 분화구에서는 지금도 밤낮으로 용암이 끓고 있고 언제쯤 분화를 시작할지 알 수 없다고 웃으며 이야기했는데, 그것이 현실이 된 것이다. 

화산이 폭발하자 TV는 화산의 상황을 보여주었다. 용암이 흘러내렸고 주민들은 집을 떠나 대피했다. 인터뷰에서 기자가 현지 주민에게 화산이 언제쯤 멈출 것 같냐고 묻자 주민은 이렇게 대답했다. “펠레Pele 여신에게 물어봐야 알 수 있다”고. 하와이 아일랜드 사람들은 화산 폭발의 원인이 펠레의 분노 때문이라고 말한다. 

펠레는 불과 화산의 여신으로 하와이 원주민에게는 종교적인 존재이다. 13형제 중 하나로 태어났는데, 그녀의 여동생인 바다의 여신으로부터 질투를 사고 가족에게서 쫓겨나 하와이에 온다. 펠레는 집을 짓기 위해 화구를 팠고 그것이 새로운 보금자리인 킬라우에아였다. 펠레의 얽힌 많은 전설은 구전으로 전해온 까닭에 이야기가 조금씩 다르지만 많은 사람이 공통으로 믿는 것은 펠레가 여전히 킬라우에아의 분화구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펠레와 관련한 전설이 한 가지 더 있다. 신기하게 생긴 용암 암석이나 검은 모래 등 화산에서 나온 자연물을 절대 가져오지 말 것. 이것을 가져간 사람들에게는 펠레가 저주를 내려 불운과 불행이 끊이질 않는다고 한다. 실제로 암석과 모래를 몰래 가지고 간 사람들은 이것들을 하와이로 다시 돌려보낸다. 그들에게 벌이 내려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하와이로 오는 돌과 모래가 담긴 우편물은 적지 않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이번 폭발로 화산국립공원을 이전처럼 여행할 수 없게 됐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펠레의 분노는 여전히 수그러들지 않았다. 현재 카후쿠유닛을 제외하곤 국립공원의 거의 모든 곳이 잠정적으로 폐쇄됐다. 

화산 폭발 인근 지역인 푸나Puna에 위치한 숙박 시설도 운영을 중지한 상태. 이렇게 이야기하면 하와이 아일랜드가 화산과 용암으로 뒤덮인 무시무시한 존재인 듯 보이려나.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화산 인근 지역을 제외하고는 호텔, 공항, 다른 관광지는 모두 정상 운영 중이라는 사실이다. 하와이 아일랜드를 여행하면서 느낀 건 활화산이 이곳에서는 그다지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연의 창조와 파괴를 한 번에 경험할 수 있는 슈퍼스타였다.

 

화산국립공원을 여행하는 방법

화산을 여행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밤에 용암을 더 잘 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여행 중 하루를 빼 화산 국립 공원 이브닝 투어에 참여했다. 힐로에서 출발하는 투어는 오후 2시에 시작해 여섯시간 동안 이어진다. 첫 번째 목적지인 카라파나 라바Kalapana Lava는 무성하고 푸른 녹지가 용암으로 인해 검은 현무암 덩어리로 변한 곳. 

이곳을 시작으로 섬의 자연경관과 화산 관련 여행지를 하나씩 방문한다. 가이드 크리스틴과 함께 서스턴 라바 동굴Thurston Lava Tube도 함께 걸었다. “하와이 아일랜드에는 수천 개의 라바 동굴이 있어요. 라바를 단면으로 자르면 스위스 치즈와 같은 모양일 거예요” 열기가 강한 라바가 암반을 녹이며 느리게 흘러 동굴을 만든 것이다. 

하와이 사람들은 이런 굴을 ‘라바 튜브’라고 부르는데, 체인 오브 크레이터스는 왕복 길이가 61킬로미터에 달한다. 저녁 시간, 화산을 보러 가기 전 와이너리Volcano Winery도 방문한다. 이곳의 와인은 우리가 마셔오던 일반적인 와인과는 확연히 다른 맛이다. 포도 향보다 다양한 첨가물의 맛이 훨씬 더 강하다. 와인이라기보다 와인 향을 낸 과일 음료에 더 가깝다. 특히 구아바, 마카다미아 넛을 넣은 퓨전 와인은 의외의 독특한 맛 때문에 인기가 많다. 

“구름이 많고 늘 습한 힐로는 다른 지역의 와인과는 전혀 다른 와인을 만들어 내죠. 미네랄 한 느낌의 와인이 대다수인데, 좀 더 정제된 맛을 내기 위해 기계에서 4번 이상의 필터링을 거칩니다” 10여 개의 와인을 시음하고 마지막에는 마음에 드는 와인 한잔과 함께 비비큐 디너를 맛보았다.

식사를 하는 동안 어느덧 해가 저물고 우리는 투어의 하이라이트 인 킬라우에아 화산으로 다시 향했다. 해가 지고 만난 킬라우에아 화산은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화산이 폭발하고 있다는 것은 멀리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밤이 되어 어둠 속에서 터지는 화산은 한층 격렬하게 보였다. 뜨겁게 달아오른 지열이 볼을 닿고, 바람결을 타고 온 흙냄새가 콧속으로 스며 들었다. 때론 펑-하고 용암을 토해내는 소리가 귓가에 꽂히기도 했다. 

장대비가 쏟아졌지만 화산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용암이 높이 솟아오를 때마다 사람들이 쏟아내는 탄성이 어둠을 흔들었다. 헬기 투어도 해볼 만하다. 구름이 많고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은 헬기가 취소되는 경우도 빈번하니 사전에 반드시 확인할 것. 나 역시 오전 투어가 취소되고 오후에야 헬기를 탈 수 있었다. 걸어서 보는 것과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또 다르다. 문이 없이 진행되는 헬기 투어는 지구에서 가장 뜨거운 헬리콥터라고도 불린다. 

그만큼 용암에 가까이 간다는 뜻일 테다. 킬라우에아 화산 자락의 분화구에서 흘러나온 용암은 느리게 흘러간다. 헬기가 용암 위 120피트 상공까지 접근했다. 두려움은 사라진 지 오래다. 문이 없는 까닭에 매캐한 유황 냄새가 코를 찌른다. 헬기에서 내려다보면 하와이 아일랜드가 매년 조금씩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다. 킬라우에아 화산 지대에서 흐르는 이 용암은 바다를 조금씩 메우고 있다. 로열 가든스라는 예쁜 이름의 마을이 있었다. 하지만 이 마을은 2012년 킬라우에아 화산의 푸우오오 분화구에서 쏟아져 나온 용암에 덮여 사라져 버렸다.

당시 미 항공우주국 나사가 측정한 용암의 속도는 시속 6킬로미터. 지금은 용암 밭에 남아있는 잭 탐슨이란 사람의 집 물탱크로 그 흔적을 짐작이나마 할 수 있을 뿐이다. 하와이 아일랜드에서는 용암이 분화한 시기에 따라 구역을 부동산값을 매기는데, 오래전에 분화한 땅일수록 비싸다고 한다. 어쨌든 용암이 굳은 땅 위에는 사람들이 다시 마을을 일구고 살아간다. 하와이에 사람이 터를 박은 것은 1300~1600년 전으로 추정된다. 

척박한 화산섬에서 뿌리를 내린 악착같이 살아남아 이 섬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투어를 마치고 헬기는 방향을 돌렸다. 마을 너머로는 검푸른 태평양이 펼쳐진다. 고도를 높이자 하늘은 잠시 비를 흩뿌린다. 저 멀리 안개 속에서 무지개가 피어오른다. 비현실적인 현실이라고 할까. 여행은 우리가 믿을 수 없는 광경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해준다. 투어 성공을 축복이라도 해주듯이 무지개가 한층 선명해진다.

힐로 다운타운 탐방

화산국립공원과의 접근성이 좋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라, 힐로는 도시 그 자체만으로도 아주 멋진 곳이었다. 힐로는 하와이 아일랜드의 다운타운이자 하와이 제2의 도시. 다운타운이라고는 하지만 풍경은 오래전 시간에서 멈춘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올드타운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다. 미국 본토에서온 사람들 역시 힐로가 1930년대 미국 본토의 풍경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힐로에는 100년이 다 돼가는 건물이 많다. 

수백 년 된 나무로 만든 이 건물들 대부분이 국가 사적지로 등록되어 있으며 미술관, 상점, 식당 등이 들어서 있다. 여행에서 가장 즐거운 일 중 하나는 현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일 아닐까. 다운타운에서 샌들 가게 굿 어스 샌들Good Earth Sandals의 주인 케빈은 1년반 전 캘리포니아, 포틀랜드를 거쳐 이곳에 왔다. IT 회사에서 일하다 은퇴 후 여유로운 삶을 찾아온 그의 몸은 서핑으로 새까맣게 탔다. 샌들은 3년 전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단순한 모양의 샌들이지만, 그는 가죽과 고무 밑창을 꼼꼼히 비교하고 스트랩과 비즈를 골라준다. 샌들을 만드는 도중 힐로의 자랑을 늘어놓는 것도 빼놓지 않는다. “조용하고 정겨운 마을이지만 이곳을 둘러싼 자연은 다이나믹 그 자체죠” 그는 하와이 아일랜드에서 시작한 제2의 인생에 아주 만족하고 있다. 

힐로에는 하와이 아일랜드의 역사를 볼 수 있는 곳이 몇 있다. 퍼시픽 쓰나미 박물관Pacific Tsunami Museum은 1946년과 1960년 쓰나미로 인해 힐로가 내륙으로 옮겨진 역사가 기록돼 있다. 특히 힐로 다운타운의 100년 넘는 건물들은 수차례의 이러한 자연재해를 견딘 건물들이라 더 의미가 깊다. 라이먼 박물관Lyman Museum은 미국 선교사들이 1839년에 지은 가옥 위에 들어섰다. 

이밖에도 각종 수공예품 상점, 주얼리샵, 하와이안 셔츠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의상샵, 1925년에 지은 팰리스 극장Hilo Palace Theater 등 과거와 현대를 넘나드는 장면들이 모두 다운타운에 모여 있다. 다운타운 거리를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마주할 수 있다. 낮 시간에 찾은 힐로 다운타운은 에너지가 넘쳤다. 

파스텔톤으로 칠해진 건물들은 남미의 어느 도시를 걷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오래전 보았던 미국 영화에도 이런 풍경이 등장했던 것 같다. 아름다운 색깔로 페인트칠 된 힐로의 거리를 사람들은 활기차고 밝은 표정으로 걸어 다녔다. 무엇 하나 과하지 않고 어색하지 않은 풍경. 원래부터 있어 왔던 것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힐로의 거리에는 낯선 여행자의 마음을 포근히 감싸 안아주는 뭔가가 있는 것 같았다. 걷다 보면 그냥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거리. 하루키가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라는 책에서 “스니커를 신고 길을 걷노라면 나이를 먹는 것 따위 눈곱만큼도 두렵지 않은 기분이 든다”고 했는데, 힐로의 거리를 걸으며 그 문장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먹고 마시며 다운타운 걷기

수요일 아침에는 다운타운의 파머스 마켓Hilo Farmers Market을 방문했다. 지역 농산물을 비롯해 빵과 각종 식료품, 꽃, 공예품 등을 살 수 있는 곳이다. 평일에는 몇몇 상점만이 문을 열지만, 수요일과 토요일에는 약 200개에 달하는 상점이 모두 문을 연다. 과일, 채소, 허브 등 하와이의 식품 물가는 미국 본토보다 2배 이상 비싸지만, 이곳에서는 꽤 괜찮은 가격으로 살 수 있다. 

게다가 모두 현지에서 직접 기른 것들이라 하나같이 신선하다. 길 건너편에는 핸드메이드 공예품과 각종 예술 작품을 파는 상점들이 있는데, 만든 사람이 직접나와 판매하는 경우도 많아 이들과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다. 파머스 마켓이 열리면 간이 상점들도 부쩍 활기를 띤다. 아침 시간,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바비큐를 굽는 쪽으로 향한다. 

바비큐 가게에 도착하니 기다리는 사람이 꽤 많다. 데리야키 소스가 잔뜩 뿌려진 바비큐의 향이 시장 곳곳에 퍼져 장 보러 나온 이들을 불러들였으리라. 밥과 샐러드, 구운 바비큐 요리가 도시락처럼 나오는 플레이트는 전형적인 하와이 음식이다. 숯불에 갓 구운 고기는 맛이 없을 수가 없다. 그릇은 금세 바닥을 드러낸다. 배가 부르니 그제서야 시장을 돌아볼 마음이 생긴다.

저녁식사를 위해 찾은 곳은 문 앤 터틀Moon&Turtle이다. 해산물 중심의 요리를 내는 식당이다. 매일 메뉴가 바뀌고 하와이안, 미국식 가정식 음식을 선보인다. 베트남 엄마와 폴란드계 아버지를 둔 셰프 마크는 이렇게 말한다. “제가 준비한 아라 밸리에는 하와이의 문화가 들어있습니다. 아라 밸리는 로컬이 아주 좋아하는 생선이지만 저는 프렌치 스타일로 요리했어요. 

이 이탈리안 링귀니에는 하와이 사람들이 좋아하는 소시지를 넣었죠. 어때요, 완벽한 퓨전이죠? 마치 하와이 문화처럼요” 퓨전 음식은 가끔 과한 조합으로 음식의 밸런스가 맞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곳의 요리는 애피타이저부터 따뜻한 가정식 요리까지 모두 훌륭하다. 

다음에 하와이 아일랜드에 가도 주저 없이 선택하고 싶은 곳이다. 오후 8시가 넘어가면 다운타운의 식당과 상점들은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한다. 길에는 가로등도 없어 가벼운 산책 정도가 아니라면 돌아다니기가 조금은 부담스럽다. 바는 고사하고 투박한 펍조차 몇 개 없는 이곳에서 저녁을 즐기는 방법은 그다지 많지 않다. 

사방이 고요한 하와이의 밤. 마치 어느 낯선 행성에 혼자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조용한 시간일까. 휴대폰 전원을 꾹 눌러 끈다. 멀리 새소리가 들리고 파도 소리가 귓전에 떨어진다. 역시 섬을 즐기기에 가장 적합한 시간대는 뭐니 뭐니 해도 한밤중이다. 

덜 붐비고, 공기도 깨끗하고,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 말끔하게 정렬되어 있다. 그러고 보니 세상이란 정말 복잡하게 생겼다. 세상이 바다와 해변, 호텔과 레스토랑만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모든 사람의 인생이 훨씬 심플해지지 않았을까. 하와이의 밤은 심플하게 깊어가고 있다.

 

Information

코코넛 섬

힐로 베이에 위치한 섬. 전체를 도는데 걸어서 15분이면 충분할 정도로 크기가 작다. 로컬들의 좋은 산책로이자 피크닉 장소다. 섬까지는 다리가 연결돼 있다. 바깥에서 바라보는 섬의 모습도 아름답다.

릴리우오칼라니 정원

하와이 왕국의 마지막 여왕인 릴리우오칼라니의 이름을 따서 만든 정원. 일본 신사에서 자주 보던 토리이가 서 있다. 토리이를 지나면 지붕이 있는 아치형 다리가 있는데, 이 두 가지 덕분에 정원은 동양적인 분위기가 물씬 난다. 코코넛섬과 가깝고 힐로베이를 마주보고 있다. 일본 외 국가에서 가장 큰 일본식 정원으로 힐로 베이 근처 호텔에서 머문다면 한 번쯤 방문해볼 만하다.

아카카 폭포 주립공원

힐로 코스트의 아카카 폭포 주립공원에서는 135미터 높이의 아카카폭포와 30미터 높이의 카후나 폭포를 볼 수 있다. 특히 아카카 폭포는 하와이에서 가장 유명한 폭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폭포의 경관만큼이나 숲을 걷는 무성한 열대 식물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쿠아베이

하와이 아일랜드의 일몰 명소로 꼽히는 곳. 날씨가 좋은 날이면 이 섬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래사장과 물빛을 볼 수 있다. 코나 공항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다.

하푸나 비치 파크

수영, 스노클링을 즐기기 좋은 해변. 미국에서 선정한 ‘베스트 해변 10위’ 안에 든 곳인 만큼 하와이 아일랜드 여행자들에게 인기 있는 곳이다. 코나에서 멀지 않고 골프 여행지로 유명한 코할라 해안을 따라 자리한다. 음식점, 피크닉 장소, 샤워시설을 완벽히 갖춘 것이 특징.

마우나케아 천문대

하와이에서 가장 아름다운 밤하늘을 볼 수 있는 곳은 바로 이곳 마우나케아 천문대다. 맑은 날이고 구름이 없어야 갈 수 있다. 사륜구동 차량이 아니면 오르내리기 힘들다. 하지만 시간을 들인 만큼 아름다운풍경을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른 오후에 출발해 선셋과 별을 보는 것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