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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국제공항에 비행기가 내리자마자 우리는 ‘장제스(蔣介石)의 나라’에 발을 들여놓았음을 실감한다. 타이완 사람들이 자신들의 건국 영웅을 좋아하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곳에서는 외지에서 온 사람들조차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 혹은 당당하게 도열한 - 그의 ‘스토리’들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다. 장제스 없이는 타이완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박물관과 영화 작품이나 한적한 시내 골목길의 찻집조차도 온전히 설명이 되질 않는다. 그러니 장제스나 타이완을 잘 아는 이들에게는 진부하기 그지없게도, 이번 타이베이 이야기 역시 장제스에서 출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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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패배자가 남긴 화려한 유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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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이베이를 방문하는 사람이 ‘반드시’를 넘어 ‘무조건’ 방문하는 장소인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의 복도에 섰다. 오랜 내부 공사를 마치고 이제 막 재개장을 한 박물관은 깨끗하고 쾌적하다. 세계 유수의 박물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자금성과 만리장성 빼고 중국의 보물은 모두 있다’는 설명이 중국인 특유의 과장된 수사법이겠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본토의 베이징과 시안(서안)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휘황찬란한 유물들이 전시실 안을 가득 채웠다. 고대 글자들이 빼곡히 새겨진 동항아리는 3천 년의 세월을 넘어 반진반질 윤이 나고, 부위별로 색이 다른 천연 옥을 가공해 녹색과 흰색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옥 배추’가 보여주는 정교함은 그간 잊고 있었던 중국이라는 나라의 스케일을 새삼 일깨워 주었다. 75만 점에 달하는 유물의 일부가 이 정도라면 자연스레 벽 뒤에 있는 것들에 대한 호기심도 높아진다. 장제스는 어떤 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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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 이 많은 유물들을 바다를 건너 도망쳐 오는 와중에도 챙겨올 생각을 했을까. 이들이 천문학적인 가치가 있다는 것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다. 하나 둘씩 팔기만 해도 마오쩌둥과의 힘겨운 싸움을 버텨내는 데 큰 힘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본토에서의 전쟁에서 패배를 예감한 장제스가, 그가 외딴 섬에서 세울 나라의 앞날을 걱정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들이 중국인임을, 그리고 언젠가 원래의 땅으로 돌아갈 날을 꿈꾸는 ‘주인’임을 잊지 않도록. 물론 그가 보물을 팔아 군자금을 마련했다는 소문이나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타이완 인들은 이런 가정을 들으면 화를 낼지도 모른다). 진실은 그 중간 어디쯤에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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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호한 동작으로 걸음을 옮기는 근위병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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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심에 우뚝 솟은 흰 집에서 장제스는 아직도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25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넓은 공원 한가운데 있는 거대한 대리석 건물은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그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중정기념당 이다. 중정은 장제스의 본명. 그의 나이와 같은 89개의 계단으로 지면과 맞닿은 기념당 안에는 75톤에 달하는 거대한 동상이 있다. 동상은 의자에 앉아 중국 본토가 있는 서쪽을 보며 이루지 못한 꿈을 꾼다. 동상은 항상 두 명의 근위병이 지킨다. 매 시간, 이들이 교대식을 할 때는 관광객도 기념당 안의 공기도 숨을 죽인다. 근위병들은 절도있게 딱딱 떨어지는 동작이 아니라 아주 느리고 완만한 동작으로 걸어오고 경례를 붙이고 다시 자리에 지켜선다. 경례를 위해 팔을 올렸다 내리는 데만 20여 초는 걸린다. 사실 이런 ‘느림’ 과 ‘끈질김’ 은 장제스보다는 그의 숙명의 라이벌인 마오쩌둥에게 더욱 어울리는 단어다. 국공합작의 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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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을 외면한 채 공산당 공격에 성급하게 매달렸던 그는 인내와 기다림으로 1만 2천 킬로미터의 대장정(大長征)을 성공으로 이끈 마오쩌둥에게 결국 패했다. 훤칠한 외모 및 군사ㆍ정치적 재능, 훌륭한 스승(쑨원)과 대단한 배우자(쑹메이링)와 카리스마까지 갖춘 그에게 부족했던 단 한 가지. 그 기다림과 느림의 동작으로 무장한 근위병들은 장제스의 망향(望鄕)을 지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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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와 슬픔의 도시, 지우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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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이완을 대표하는 영화감독 1순위에 주저 없이 ‘와호장룡’과 ‘브로크백마운틴’의 이안을 꼽는 사람이 많겠지만, 그보다 앞서 대만 영화를 세계에 알린 거장은 허우샤오시엔이다. 사랑과 소통, 가족의 해체 등 문화권을 초월한 주제들을 주로 다뤄온 이안 감독과 달리 허우샤오시엔은 인간과 역사 문제를 명징한 카메라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보다 타이완적인’ 영화에 천착했다. 그의 영화에는 타이완의 상처투성이 현대사와 수려한 자연이 녹아있고 현재를 살아가는 타이완 사람들의 고민이 엿보인다. 허우샤오시엔의 작품을 보고 타이완에 가고싶어진다거나, 최소한 이 ‘중국 아닌 중국’에 대한 관심이 생기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1989년에 그에게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안긴 영화 ‘비정성시(非情城市)’ 역시 타이완 사람들의 상처와 의식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는 영화다. ‘슬픔의 도시’라는 뜻을 가진 이 영화의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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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 배경도 장제스와 그가 이끈 국민당에 한쪽 끝이 닿아 있다. 영화는 박정희의 대한민국과 분위기가 비슷했던, 장제스의 타이완과 그 역사의 격랑에 떠밀려간 한 가족에 대해 이야기한다. 독립을 요구하는 원주민이 무차별 학살되고 생각이 다른 사람은 소리없이 제거되던 시절을 살았던 소시민들에게 도시 생활은 슬픔과 동의어였다. 이 암울한 시대, 불공정한 세상, 그러면서도 희망과 아름다움이 점멸하는 골목의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 허우샤오시엔이 선택한 장소는 타이베이에서 차로 두시간 정도 거리에 위치한 지우펀(九分)이었다. 타이완 섬 북쪽 해안이 내려다보이는 산중턱에 자리 잡은 이 조그만 도시에서 귀머거리 사진사 ‘문청’으로 분한 량차오웨이(양조위)는 사진관을 운영하고 배우자를 만나 사랑을 나누고, 그러다 끝내 어디론가 끌려간다. 좁은 언덕길과 계단을 따라 이어지는 지우펀의 이 골목길이 량차오웨이의 쓴웃음과 가장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허우샤오시엔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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쯔텅루의 녹두고와 롱산스의 촛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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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베이 시내에도 우리에게 친숙한 영화 촬영지가 있다. 신셩남로의 넓은 찻길에서 한걸음 물러나 앉은 등나무집에서 이안 감독은 ‘음식남녀(飮食男女)’를 찍었다. 쯔텅루(紫藤盧, Wistaria Tea House)는 일제 때 일본 관리의 기숙사로 쓰이던 건물로, 1980년대 타이완 민주화운동의 숨은 요람 역할을 한 찻집이다. 이름처럼 정원에는 등나무가 심어져 있고 그 아래 조그만 연못에서 물고기들이 노닐고 있어 도심에서 보기 힘든 분위기를 갖고 있다. 겉에서 보기보다 훨씬 큰 찻집 안에서는 젊은 대학생들과 외국인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차를 마시고 있다. 자유분방한 젊음의 기운과 차향기가 뒤섞인 이 분위기는 인사동 뒷골목의 그것과 닮은 듯하다. 1층 구석과 2층은 다다미방으로 되어있어 뜻 맞는 이들이 모여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기에 좋아 보인다. 공산화된 중국에서 망명한 문인들과 민주주의의 열망에 불타는 젊은 논객들이 20여 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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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에 모여앉아 잠시나마 너털웃음을 터트릴 수 있는 장소였을 터다. 타이완의 김지하나 김남주의 웃음소리를 저 다다미들이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창으로 햇살이 들어와 고풍스러운 탁자와 종이 랜턴을 잠깐 비추고는 사라진다. 순수하고, 그래서 자유로운 햇빛보다 한참 무겁고 투박한 독재의 굴레는 장제스 치하의 서슬 퍼런 시절에도 이 방의 창문을 타고 넘어오지 못했던 것 같다. 공기는 깨끗하고 우롱차는 고소하며 혓바닥에서 달콤하게 녹는 녹두고는 분방하게 대학생들의 웃음소리에 녹아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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