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새로운 발견 - 뚜르드몽드

발행구분

[2007년 12월호] 대륙분류 : [유럽] 국가분류 : [핀란드] 도시분류 : [헬싱키]

기사제목

[COVERSTORY] 바람이 실어온 슬픔의 역사

핀란드어로 ‘카리알라’, 스웨덴어로 ‘카렐렌’이라고 불리는 곳. 카렐리아는 여러 개의 이름만큼이나 여러 나라의 지배를 받았다. 러시아의 카렐리아 공화국과 레닌그라드 주, 핀란드의 남카렐리아와 북카렐리아 지역으로 나뉜 지금, 카렐리아에선 여전히 슬픔의 노래가 들려온다.

핀란드, 그 첫인상은

요엔수로 가는 비행기 안. 창밖으로 바라본 핀란드는 온통 가을색이다. 빽빽한 나무 사이로 점점이 뿌려진 호수 안에는 기계에서 막 뽑아낸 솜사탕 같은 흰 구름이 담겨있다. 11시 17분. 비행기가 구름 아래로 다이빙하기 시작했다. 짙은 수증기 사이로 뿌옇게, 그러다 다시 선명하게 숲이 펼쳐진다.

요엔수로 향하는 국내선 좌석에는 번호가 없었다. 버스처럼 아무 곳에나 앉는 시스템이 낯설었지만 좌석은 꽤 편안했다. 핀란드의 첫인상만큼이나.

크림 빛이 도는 천으로 덮인 원목의자와 밝고 부드러운 조명,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헬싱키 공항에는 훈훈함이 감돌았다. 거기에 유럽 커피 소비율 1위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나라답게 넘실대는 커피향이 더해져 더 바랄 것이 없을 만큼 아늑한 기분이었다. 문득 핀란드는 평생 함께할 친구 같은 나라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든다. 생각 없이 뭉쳐 놀 때보다는 어렵

고 힘든 일이 있을 때 더 힘이 되고, 그래서 시간이 지날 수록 더 고맙고 소중해지는, 그런 친구 말이다.

핀란드 사람들은 일년에 2~3주 정도는 호숫가에 지어진 통나무집에서 시간을 보낸다. 유명 디자이너든 한 나라의 수상이든 벌이가 시원찮은 사무원이든 동등하게. 그리고 일 년에 두어 번쯤은 누구나 땅 밑에 묻힌 것처럼 고독과 바꾼 고요를 만난다.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대신 호수에서 노를 젓고, 영화관을 찾는 대신 까만 밤 일렁이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그렇게 그들만의 천국을 만끽한 후, 그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다시 성실하고 근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그들처럼, 자연 가운데서 적막을 맛보고 싶었다. 마치 예전에 이번 중간고사가 끝나면 꼭 이 영화를 보고 저 음식을 먹어야지 했던 것처럼, 이번 마감이 끝나면 이 옷을 사고 저 책을 읽어야지 하는 것처럼, 핀란드에 가면 시베리안 허스키가 끄는 썰매를 타고 통나무집에서 하루를 보내야지, 마음먹었다.

하지만 시험이 끝나고 보려했던 영화는 끝나있고 먹으려던 음식이 뭐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던 것처럼, 마감이 끝나면 옷을 사러 달려 나가는 대신 입던 옷으로도 충분하다며 자기최면을 걸고 침대머리에서 읽으려던 책을 꼭 붙들고 스르르 잠드는 것처럼, 늘 계획한대로 살게 되는 것은 아닌지라 핀란드에 간다고 시베리안 허스키가 목줄을 메고 내게 달려오거나 고요와 적막을 선사할 통나무집이 짠, 하고 등장하진 않을 거라 마음의 준비도 단단히 해두었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게으른 기자를 맞은 것은 근면함을 갑옷처럼 두른 핀란드 인이었고, 덕분에 시베리안 허스키의 목덜미를 부여잡고 얼굴을 비비대 보진 못했지만 안개가 내린 호숫가의 통나무집에 가볼 순 있었다.

호숫가 통나무집 사리란

전형적인 핀란드인인 가이드는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리면서 전화 통화도 하고 메시지도 보냈다. 그 와중에 길이 헷갈린다며 지도도 펼쳐 봤다. 1시간쯤 지나자 고속도로를 벗어난 4인승 푸조가 한적한 흙길로 접어들었다. 풀 냄새와 나무 냄새가 물씬 나는 숲.

사리란은 요엔수에서 32킬로미터, 폴비야르비에서는 16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하니니에미(Haninniemi)의 비니야르비(Viinij?vi) 호숫가에 위치한 통나무집 숙소다. 나무를 곱게 다듬어 글씨를 새겨 놓은 입구를 지나 낙엽 쌓인 마당에 들어서자 산타클로스처럼 혈색이 좋은 주인아주머니가 일행을 맞았고, 시베리안 허스키는 아니지만 덩치 좋은 양치기개 콜리도 달려와 왕왕 짖었다.

깊고 진한 벽돌색 건물 위에 흐린 전나무색 지붕이 올려져 있는 본채는 마치 빨간머리 앤이 살던 녹색지붕 집처럼 따스하고 편안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주인

부부가 살고 있는 이곳에는 아침이면 잘 구운 빵 냄새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식당과 파스텔 톤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방, 폭신한 털로 덮인 원목의 거실이 있다. 주인아주머니는 이르면 4시부터 일어나 부지런히 사리란의 아침을 깨운다. 핀란드 닭은 어떻게 우는지 모르겠지만 ‘꼬꼬댁’이든 ‘쿠쿠두들두’든 어쨌거나 새벽 닭 우는 소리보다도 일찍.

5개의 통나무집들은 이곳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호숫가에 지어져 있다. 우리가 묵을 통나무집엔 커다랗고 깔끔한 부엌, 페치카가 놓인 널찍한 거실, 작은 방 두 개와 화장실 하나, 그리고 말로만 들었던 핀란드식 사우나가 있었다. 감탄하고 있는 사이, 아주머니가 통나무집으로 찾아왔다. 양 손 가득 음식이 잔뜩 든 바구니를 든 채였다. 아주머니는 눈 깜짝할 사이에 저녁식탁 위에 스무 가지가 넘는 음식을 차려냈다. 토마토, 오이, 피망 등 싱싱한 야채는 물론이고, 야생버섯과 연어, 청어, 오븐에 구운 옐로비트와 당근, 쌀과 호밀로 만든 빵인 카렐리안 피로그, 체리소스와 클로드베리로 만든 디저트와 얇게 빚어 구워낸 ‘피라까(Pirakka)’가 담긴 크고 작은 접시들은 식탁 위에 넓게 퍼져 엉덩이를 들어올려 상체를 쭉 뻗지 않으면 도저히 맞은편에 놓인 음식을 먹을 수 없을 정도였다. 거하게 저녁을 먹고 말잔치를 벌이느라 이곳에 오기 전 꿈꾸었던 적막과 고요에 잠길 틈은 없었다. 그러나 안개가 뿌옇게 내린 다음 날 아침, 호수까지 이어진 호젓한 외길을 걷는 사이 아주 잠깐이었지만 고요가 스쳤다. 공연히 웃음이 났다. 온 얼굴의 근육이 만장일치로 ‘그래도 좋다’ 허락한 꽤 흐뭇한 미소였다. 통나무집의 커다란 창문 안쪽엔 여전히 매일 크리스마스인양 풍족하게 차려진 음식과 활활 타오르는 페치카의 열기가 남아있을 터였다.

동방 정교의 중심, 하이나베시 발라모 수도원

아침 일찍 사리란을 나서 발라모 수도원으로 향한다. 발라모 수도원은 100여 년간 러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1970년 사이에 재건된 동방 정교(Orthodox) 수도원이다. 핀란드인 대부분이 루터파 신자이지만, 적어도 카렐리아 지역에서는 동방 정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루터파 못지않다. 당시 발라모 수도원에서는 러시아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인근 주민들과 접촉이 많지 않았다. 일반인들에게 개방된 것도 최근의 일이다.

미사는 보통 아침 6시와 저녁 6시에 두 시간씩 하루 두 번 열리는데, 마침 보호의 성자인 에리스의 축일이어서 11시 쯤 열린 미사에 참석할 수 있었다. 루벤스의 그림에서 본 듯한 성스러움이 내려앉은 성당 안. 제일 앞줄에선 네 명의 신자들이 악보를 펼쳐놓고 성가를 부르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푸른 도포를 두른 수도사가 성경 구절을 읽었다. 탄산이 다 빠진 콜라처

럼 싱겁고 단조로운 음으로. 그가 읽기를 마치면, 그때마다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양손을 공손하게 다잡은 여성들이 일정한 가락으로 회답한다. 땡. 땡. 땡. 원형의 유리 천장 위에서 깨질 듯한 종소리가 떨어져 내린다. 묵직한 단조의 음계와 쨍그랑거리는 종소리가 부딪히자 묘한 긴장감이 인다.

수도원을 둘러싼 크고 작은 건물들은 도서관과 문화센터, 전시장 등이다. 핀란드 유일의 종교 서적 도서관은 3만여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으며, 문화센터에서는 그림과 아이콘, 조각의 복원도 이뤄진다. 전시장에 가면 지난 20여 년간 이곳을 거쳐 간 이들이 그린 성화들을 둘러볼 수 있는데, 은이나 진주, 돌, 뼈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 일반 성화와 다른 독특함이 느껴진다.

발라모에는 20명의 수도사와 70명의 근무자가 상주하고 있고, 연간 120~200명의 자원봉사자가 들른다. 이들은 벌꿀로 초를 만들거나 리셉션에서 안내를 맡기도 하며, 농장 일을 돕거나 수도원 내의 카페와 레스토랑, 기념품 가게, 와인 숍에서 일하기도 한다. 수도원을 안내해 준 피르꼬 씨도 자원봉사자였다. 1년 동안 이곳을 찾는 방문객은 15만 명이 넘는다. 독일과 영국, 스웨덴과 프랑스에서 온 사람들이 대부분. 단기 체류자들은 아파트나 원룸에 머물게 되는데, 수도원을 둘러싸고 있는 평온한 자연이 한 눈에 들어오는 숙소의 창문가에 서니 일부러라도 시간을 내 머물고 싶어진다.

일로만치에서 만난 카렐리아

카렐리아 지역의 민속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일로만치로 가는 길. 차를 타고 한 시간 여를 달리는 동안 양 옆으로 내내 호수가 이어지고 있다. 창문을 열지 않아도 저 먼 곳에서부터 불어오는 청명한 바람이 느껴진다. 카렐리아의 중심인 요엔수에서 동쪽으로 7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일로만치의 전통 마을(Bardic Village)에서 가장 먼저 마주친 건 ‘칼레발라’였다. 의사이자 민속학자였던 엘리어스 뢴로트가 구전되어 오던 노래들을 한데 묶어 출간한 책으로, 칼레발라는 ‘영웅의 땅’이라는 의미다. 이 땅에서 수많은 영웅들이 모험을 떠나고 지혜를 겨루고 사랑을 찾아 헤맨다. 핀란드인들은 어릴 때부터 극적이고 웅장한 대서사시 칼레발라를 들으며 자란다. ‘옛날 옛날에’로 시작하는 베드타임 스토리인 셈이다. 그들이 감성적이면서도 현실적이고, 낭만적이면서도 냉철한 것은 칼레발라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들이 들려주는 고대 핀란드의

이야기는 찬란하고 다채로워, 어둠이 계속되는 겨울조차 여름 밤 불꽃놀이처럼 화려하게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칼레발라는 ‘칸텔레(Kantele)’라는 이름으로 먼저 출간되었다. 칸텔레는 핀란드의 전통 현악기로, 이곳에서는 매년 여름(6월부터 8월 사이) 칸텔레 공연이 열린다. 8월 중순 이후부터는 주말에만 공연이 있다. 단체 관람객의 경우 미리 예약하면 별도로 기획된 공연을 볼 수 있다. 이 마을에서 가장 큰 통나무집인 '파르파이 홀(Parppei Hall)'에 걸린 문장에는 세 개의 칸텔레가 그려져 있는데, 이들은 각각 즐거움과 슬픔, 운명을 상징한다. 파르파이는 1800년 경 이곳에 살았던 야꼬 파르파이(Jaakko Parppei)의 이름을 딴 것.

전통 문화 센터 내의 레스토랑 ‘파르파인피르티(Parppeinpiirti)’에선 피라카(Piirakka, 보리나 쌀을 재료로 만든 파이)나 바트루스카(Vatruska, 쌀과 버섯, 연어로 만든 요리) 같은 북카렐리아 전통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서부지역이 스웨덴의 영향을 받아 스토브를 주로 사용한 반면, 슬라브족의 지배아래 있던 동부 지역에서는 오븐을 사용해 부드러운 빵과 다양한 파이를 구워냈다. 또 선지와 소시지를 재료로 한 요리가 많았던 서부와 달리 동부에서는 17세기까지 이 지역을 장악했던 동방 정교의 영향으로 요리에 버섯과 야채, 생선을 많이 사용했다.

피라카의 장인

오븐의 열기로 공기가 따뜻하게 데워진 부엌에선 80세가 넘은 리트바 할머니가 무서운 속도로 파이의 일종인 피라카를 구워내고 있다. 그녀는 여름이면 하루에 300개씩 피라카를 만들고, 한 시즌이면 총 8천여 개의 디저트를 만든다. 장인이라는 칭호를 주어도 아깝지 않은 실력이다.

레스토랑 맞은편에 지어진 건물은 카렐리아 지역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바즈홀(Bard’s Hall)‘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른쪽 한 가운데에 커다란 오븐이 있다. 9명이 장정들이 함께 잘 수 있을 정도의 크기다. 카렐리아에선 온 가족이 한 방을 썼는데, 연장자만이 이 오븐 위에서 잘 수 있었다고 한다. 문을 통과하면 맨 처음 손을 씻는다. 이 때문에 지금도 바즈홀 입구에는 손을 씻는 물통과 수건이 나란히 걸려있다. 케스파이크(Kespike)라고 불리는 이 수건에는 나무와 아이들, 운을 불러오는 새(lucky bird) 등 삶에 대

한 의미 있는 상징들이 앞뒷면으로 똑같이 수놓아져 있다. 단 실수한 부분이 꼭 하나 있어야 했는데, 이는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겨울철이면 여성들은 더 바빠졌다. 울, 버터, 리넨 등을 만들어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바즈홀 한편에는 각 나라의 언어로 출간된 다양한 버전의 칼레발라가 전시돼 있다. 칼레발라를 엮어낸 의사 뢴로트는 두 번에 걸쳐 책을 냈는데, 일로만치는 두 번째 버전부터 등장한다.

야외에는 작은 나무집들이 서너 채 정도 있는데, 그 중 하나는 1970년대 ‘후후스(Huhus)’에 서 옮겨온 마텔리 쿠이발라타르(Mateli Kuivalatar) 생가다. 마텔리는 핀란드 전승민요를 주로 불렀던 가수로, 뢴로트가 칼레발라를 집필할 때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마텔리 생가 안에는 당시 그녀가 부르던 노래가사를 속기한 뢴로트의 친필 노트도 남아있다.

경계의 양쪽을 들여다보다

일로만치에서 다시 기수를 동쪽으로 돌려 요엔수로 향한다. 창밖으로 화가라면 털썩 주저앉아 그림을 그리고 싶어질 법한 풍경들이 휙휙 지나간다. 그러나 해가 지기 전 카렐리쿰 문화센터(북카렐리아 박물관)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에 브레이크 대신 가속 페달을 연신 밟는다.

카렐리쿰에선 ‘경계의 양쪽(Both side of the Border)’이라는 제목으로, 북카렐리아의 역사에 대한 전시가 한창이었다. 1818년 핀란드 전쟁시 사용한 용품들과 핀란드가 스웨덴에서 러시아로 넘어가던 1807년의 유물들,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 피터지게 싸웠던 1918년경의 기록도 있다. 종이와 자작나무로 만든 신발이나 모자, 옷, 가방, 그리고 감자 캐는 법이나 산나물로 음식을 만드는 법을 적은 노트는 전쟁으로 인한 생활고가 얼마나 심했는지 보여준다. 핀란드처럼 커피 소비율이 높은 나라의 대통령이 “커피가 없습니다.”라고

국민에게 호소했을 정도니 당시의 물자난은 꽤 심각했던 모양이다.

어딘가에서 구슬픈 칸텔레 가락과 함께 나이 지긋한 한 여인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농사를 짓고 실을 자으며 부르던 노래. 이들에게 음악은 삶의 일부였으리라. 그들의 민속음악은 어느 촌부가 부르는 구성진 우리네 가락을 닮은 것도 같다. 그래서일까? 경계의 양 쪽에서 그저 노래로 슬픔을 다독였을 이들을 생각하자 알싸한 슬픔에 코가 찡해졌다.

▲ 다음글

전세계를 누비는 메이드인 핀란드

▼ 이전글

디자인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