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새로운 발견 - 뚜르드몽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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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5월호] 대륙분류 : [북아메리카] 국가분류 : [멕시코] 도시분류 : [멕시코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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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STORY] 오늘의 멕시코시티_City Walking

선보기는 죽기보다 싫어하면서, 내 여행을 남에게 턱턱 맡기는 건 왜일까? 프로필 쫙 읊는 연애는 시시하다면서 사진기에 도시의 프로필만 요약해 담아오는 건 왜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걸까? 만날 때마다 양파껍질 벗기듯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흥미진진한 연애처럼, 한걸음씩 신중하게, 그리고 우직하게 걸어야 그 도시의 참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벽에서 길 찾기

멕시코시티에 그만의 독특함을 선사하는 것은 도시 곳곳에 그려진 유명 화가들의 벽화들이다. 멕시코시티에서 벽화는 20세기 혁명을 이끌었던 정신적인 버팀목이었다. 한 세기 전,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일었던 ‘인디헤니스모(Indigenismo, 라틴아메리카 토착민 문화의 부흥을 꾀하고자 하는 운동)’의 물결은 멕시코시티에도 예외 없이 흘러들어왔다. 1900년 우루과이의 저널리스트 호세 엔리케 로도는 ‘아리엘(중세 전설 속 공기의 요정)’이란 책을 발간하며, 아리엘을 ‘정신을 위해 물질을 기꺼이 희생하는 엘리트’라 정의했는데, 여기서 파생된 ‘아리엘주의(Arielismo)’가 인디헤니스모 운동의 뿌리라 할 수 있다.

멕시코의 초대 문화부 장관 호세 바스콘셀로스(Jose Vasconcelos)는 이 같은 흐름에 발맞추어, 멕시코 벽화 운동을 후원했는데, 이 때 이 운동을 이끈 주요 인물들이 바로 디에고 리베라,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였다. 그중에서도 디에

고 리베라는 ‘식인귀’라는 독특한 별명과 끝을 모르는 여성 편력으로 악명을 떨친 독특한 화가다. 멕시코 중부의 광산도시 과나후아토에서 태어난 그는 포르피리오 디아스 독재기였던 1886년에 태어나 산 카를로스 아카데미에서 엄격한 미술교육을 받았다. 이후 1906년 정부 장학금을 받아 스페인에서 공부하다가, 1908년부터는 예술의 중심지였던 파리로 거처를 옮겨 유명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명성을 쌓았다. 비슷한 시기, 과달라하라에서 태어난 오로스코는 멕시코시티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오로스코는 부모의 반대로 그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농업학교에 입학해야 했는데, 어느 날 폭발 사고로 왼손을 잃고 전업 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한편 시케이로스는 디에고와 마찬가지로 산 카를로스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다가 정부 장학금을 받아 유럽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의 그림체는 오늘날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그래피티를 연상케 하는데, 이는 피록실린이란 자동차 도색용 물감을 사용했기 때문인 듯하다.

멕시코 벽화 운동의 주요 인물이었다는 사실 외엔, 공통점을 전혀 찾을 수 없을 만큼 개성이 강했던 세 화가. 알라메다 공원 동쪽 끝에 자리한 국립예술원(Palacio de Bellas Artes)에 가면 이들의 작품을 모두 만나볼 수 있다. 네오클래식과 아르누보 스타일이 혼합된 이 건물은 1905년 이탈리아의 건축가 아다모 보아리(Adamo Boari)가 시공했고, 멕시코 혁명 이후 페데리코 마리스칼(Federico Mariscal)이 완성했다. 지반이 약해 건물이 처음보다 1미터 정도 아래로 내려앉긴 했지만, 다행히 큰 손상은 입지 않았다고 한다.

1층의 예술서점에선 멕시코 주요 화가들의 작품집들을 만날 수 있다. 2층에서는 루피노 타마요의 ‘멕시코의 오늘’과 오로스코의 ‘카타르시스’, 디에고 리베라의 ‘멕시코인들의 축제’가 방문객을 맞는다. 대리석 계단을 사뿐히 지르밟고 3층으로 올라가면 시케이로스의 ‘새로운 민주주의’, 디에고 리베라의 ‘십자로의 사람들’과 같은 걸작들이 이어진다. 국립예술원 내부에선 다양한 공연과 전시가 열리며, 주중에는 12시, 주말에는 1시와 2시에 가이드 투어가 진행된다.

낭만과 휴식, 호사를 누리다

국립예술원 앞 가리발디 광장은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햇볕을 쬐는 사람들로 붐빈다. 마리아치와 오르골 연주자들이 이런 명당을 놓칠 리 없다. 덕분에 내리쬐는 햇살과 사람들의 열기에 신나는 연주가 더해져, 이 광장엔 언제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어느 봄날 오후 특유의 달뜬 공기가 맴돈다.

캠퍼스의 낭만을 느끼며 벽화를 감상해 보는 건 어떨까? 글쎄, 낭만까진 아니더라도 풀밭 위에 누워 뒹굴 거리며 낮잠 한 숨 자고나면 적어도 피로는 풀려있을 게다. 게다가 눈을 뜨면 바로 앞에 거장의 작품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떡하니 서 있으니, 이만한 호사도 없다. 낭만과 휴식, 호사를 한 번에 누릴 수 있는 이곳은 바로 멕시코시티 남부에 자리한 멕시코국립대학(UNAM)이다.

저 멀리서부터 시선을 잡아끄는 거대한 사각형 건물, 중앙도서관 외벽에는 멕시코 벽화운동을 이끈 혁명가인 후안 오고르만이 그린 벽화가 그려져 있다. 아일랜

드 부모를 가진 멕시코인, 후안 오고르만은 르 코르뷔지에에게 건축을 사사하고, 서른 살 무렵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섬세한 장식과 복잡한 패턴, 세부묘사가 돋보이는 그의 그림은 멕시코의 레타블로스(Retablos, 교회에 봉헌하기 위해 만든 조그만 그림)를 닮았다. 대학 맞은편,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때 건축된 올림픽 스타디움엔 디에고 리베라가 만든 미완의 작품이 남아 있다.

마법이 내린 주말시장 코요아칸

나른한 오수를 즐겼다면, 흥겨운 음악이 있는 떠들썩한 장터로 걸음을 옮겨 보자. 이그나시오 아옌데(Ignacio Allende) 거리와 카바요 칼코(Caballo Calco) 거리 사이의 광장에선 코요아칸 주말시장이 열린다. 사람 키만큼 높이 쌓아올린 옥수수 더미, 연한 보라색과 핑크색의 솜사탕, 돼지비계 튀김, 꿀에 절인 각양각색의 전통 과자들, 달콤한 설탕이 뿌려진 츄라스코, 밀가루에 꿀을 섞어 만든 과자 오블레 셀코(Oble Celco), 옥수수가루로 구워낸 둥글넓적한 옥수수빵, 크림을 잔뜩 붓고 그 위에 색색의 가루를 뿌린 바나나 튀김. 종류도 다양한 각종 군것질거리의 파도를 넘어 한 무리의 노인들이 열정적으로 탱고와 살사를 추는 광장 한가운데로 홀린 듯 빨려든다. 마리아치의 연주에 흥겹게 온 몸을 들썩이는 시민들 사이에서 눈 아래 푸른 눈물 자국 한 방울 찍고 입가에 커다란 미소를 그려 넣은 피에로가 곡예를 펼치고, 아코디언 연주자가 불협화음을 조화롭게 흩뿌리는, 어느 일요

일 오후의 코요아칸은 난폭할 정도로 매력적이다.

해가 저물면 천막 아래 켜진 불빛은 점점 더 진해진다. 반짝이는 노란 빛은 현실의 견고한 벽을 어이없이 무너뜨린다. 어디에선가 끊임없이 음악이 흘러나온다. 멀쩡한 피사체들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기다란 빛의 곡선을 그리며 함께 움직이는 것도, 주말 시장의 마법이다. 비록 그것이 사실은 졸음 가득한 눈에 고인 눈물 때문일지라도.

끝없이 이어진 좌판 위엔 신기한 물건들이 수북하다. 금방이라도 뼈를 달그락거리며 인사할 듯한 해골 인형은 이방인의 눈에 특히나 기이하게 비친다. 그러나 한두 점포가 아닌, 시장 전체에서 이 기괴한 인형들과 계속 맞닥뜨리다보면 낯섦은 이내 친근함으로 바뀌게 된다. 단 몇 시간 만에 이렇게 느꼈을 정도니, 멕시코인들에게 해골인형은 바비인형보다 더 친숙한 존재가 아닐까? 멕시코에서 죽음은 일상적인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유쾌한 비일상, 특별한 축제로 여기는 지도 모르겠다. 매년 11월 1일이면 ‘죽은 자를 위한 축제’까지 연다니 말이다. 각양각색의 해골들 사이, 앙상한 몸매를 드러내는 드레스에 화려한 깃털장식을 두르고 여기에 커다란 모자까지 맞춰 쓴 멋쟁이 아가씨 해골(?)이 눈에 띈다. 아니, ‘마른 모델 추방 캠페인’이 벌어진다는데, 멕시코에선 해골만큼 마르는 게 트렌든가 싶지만, 사실 그 원형은 멕시코의 유명 판화가 호세 과달루페 포사다(Jose Guadalupe Posada)가 그린 해골 여인 ‘카타리나’라고 한다. 풍자화 속에 등장했던 이 해골 여인이, 마른 몸이 절대 미의 기준이 된 21세기, 이 세상에 또 다른 블랙 유머를 던지는 듯해 슬며시 웃음이 난다.

푸른 심장 차풀테펙

멕시코시티의 중심 소칼로에서 광화문의 대로를 연상시키는 개혁의 거리 ‘레포르마(Reforma)’를 따라 가다보면 거대한 공원 ‘차풀테펙(Chapultepec)’이 나온다. 차풀테펙 공원 입구에선 1847년 미국과의 전투에서 죽어간 어린 영웅들(Ninos Heroes)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동상이 방문객들을 맞는다. 공원 내에는 국립인류학박물관을 비롯해 역사박물관, 차풀테펙성, 현대미술관 등 대규모 박물관들이 들어서 있다. 공원 안에선 밝은 검정색 모자를 쓴 군인들이 도열해 의장 훈련을 하고 있다. 새된 나팔 소리와 힘찬 북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이내 되돌아온다. 운동하는 노인들이 있는가 하면, 커다란 오토바이를 타고 공원을 질주하는 사람도 보인다. 소풍을 나왔는지, 두 줄로 선 아이들이 나란히 언덕을 오른다. 언덕 위엔 차풀테펙 성이 자리하고 있다. 이 성은 오스트리아의 황제 막스밀리아노가 살던 곳으로,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인다. 건물 1층엔 스페인 정복기의 역사가 자세히 그려져 있다.

세공이 잘 된 날렵한 스페인식 장도며, 눈길을 빼앗는 골동 단총들, 화구가 넓게 벌어진 장총들이 도열해 있는 전시실을 지나면, 금으로 장식된 화려한 식탁이 놓인 방에 닿는다. 황금마차, 금장 세공품들, 화려한 드레스, 깃털 달린 부채, 고급스런 카메라,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은화와 보석들은 당시 지배계층의 사치스러운 생활양식을 보여준다. 반면 같은 층에 전시된 벽화가 오고르만의 작품과 판화가 포사다의 그림에선 300여 년간 착취와 약탈에 시달린 원주민들의 아픔이 느껴진다. 1층의 야외 정원에 서면 차풀테펙 공원의 녹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 도시를 숨쉬게 하는 푸른 심장이 바로 차풀테펙인 셈이다.체스판처럼 보이는 흑백타일이 깔린 차풀테펙성 2층. 높은 문 너머로 보이는 목욕실과, 거실, 식당은 마치 거대한 인형의 집 같다. 검은색 그래드피아노와 금실로 수놓은 푹신한 의자, 반짝이는 샹들리에가 있는 살롱에선 코르셋으로 허리를 꽉 조이고, 패티코트로 치마를 한껏 부풀린 귀부인들이 하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떠들썩한 파티를 벌였을 것이다.

마음 쉴 언덕을 오르다

마지막으로, 멕시코시티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의 고향으로 여기는 과달루페에 들러보자. 천주교 신자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만큼 잘 알려진 순례지인 과달루페는 멕시코시티와 멕시코인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1531년, 원주민 후안 디에고(Juan Diego)는 미사를 보기 위해 멕시코시티의 테페약 언덕에 올라갔다가 갈색 피부의 성모 마리아를 만나 ‘이곳에 성당을 지으라.’는 계시를 받는다. 물론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세 번째 나타난 성모가 한 겨울 붉은 장미를 후안 디에고에게 들려 보내자, 그제야 사람들은 성당을 짓기 시작했다. 멕시코 국민 대부분이 카톨릭으로 개종하게 된 건, 아마도 이 갈색 피부의 성모 때문일 것이다. 테페약에 아스텍의 여신인 토난친(Tonantzin)을 모시던 신전이 있었다는 사실도 토템에 익숙해 있던 민심을 흔들었다. 이후 멕시코 정부는 12월 12일을 성모 발현일로 정했고, 로마교황도 1895년에 과달루

페 성모를 인정했다. 이어 2002년 7월에는 처음 성모를 만난 원주민 후안 디에고도 성자의 반열에 올랐다.

테페약엔 5개의 성당이 있는데, 구성당과 신성당에선 오전 8시부터 오후 7시 사이, 365일 매 시간 미사가 열린다. 구성당은 2천 명, 1976년에 지어진 신성당은 2만여 명을 수용할 만한 크기다. 테페약 언덕 꼭대기에 자리한 구성당에 오르는 길. 푸른 넝쿨이 감긴 수십 개의 아치를 지나다 보면 어딘가에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온다. 테페약 언덕 꼭대기에서 바라본 멕시코시티의 풍경은, 몽마르트 언덕에서 바라보는 파리만큼이나 고색창연하다. 거대한 우주선을 연상케 하는 신성당의 천장은 육각형의 벌집 모양으로 장식돼 있고, 오른편엔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돼 있다. 정면에는 나무 십자가가 걸려 있고, 그 아래엔 성모가 찍힌(그려진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형상이 찍혔다고 한다) 천이 걸려있다. 가까이서 보고 싶다면 고개를 바짝 들어야 그 모습을 비스듬하게나마 두 눈에 담을 수 있다. 무빙벨트 위에서 성모상을 바라보는 이들의 눈엔 종종 감동이 어린다. 아예 눈물을 폭포처럼 쏟는 이도 있다. 성당 뒤편엔 구부러진 십자가가 놓여 있다. 1921년 성당 안에서 터진 폭탄 때문에 활처럼 휜 것인데, 신기하게도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던 ‘성모가 새겨진 천’은 전혀 상처입지 않았다고 한다. 과달루페에는 무릎으로 기어 참배하는 슬행자(膝行者)들이 많다. 신성당 뒤편의 너른 광장에서 그런 참배자들을 몇 명 만났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 성당을 향해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무릎이 다 까지도록 슬행을 계속하는 참배자들. 이들이 기도하는 대상은 과연 성모 마리아일까, 아니면 고대의 여신 토난친일까? 어느 쪽이면 어떠랴. 지친 몸과 마음을 잠시 쉬일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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