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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9월호] 대륙분류 : [아시아] 국가분류 : [대한민국] 도시분류 : [청주]
기사제목
[INFIELD] 가까운 곳에서 즐기는 일탈
| 되풀이되는 일상은 지루하고, 모든 지루함이 그렇듯 일상 역시 사람을 무뎌지게 만든다. 이 일상에 색채를 부여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여행을 떠난다. 평소에는 보지 못하고 손쉽게 스쳐 버리는 것들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다. 물론 멀리 있는 도시나 해외여행도 좋겠지만, 쉽게 떠나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가까운 충북으로 떠나보는 건 어떨까? 가까운 곳에서 놀라운 경험을 맛볼 수 있을 테니. |
 금속활자로 청주를 찍어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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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사람들에게는 예의를 차리면서도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무심해지기 쉽다. 나만 해도, 밖에서 하는 것의 반의반만큼만 집에서 했다면 엄마 얼굴의 주름이 반으로 줄었을 것이다. 여행지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내가 방문했던 여행지는 늘 낯설고 먼 곳들이었다. 그래서 충북으로 떠나는 발걸음에는 큰 기대감은 없었다. 물론, 그 마음은 서울을 떠난 지 한 시간 만에 바뀌었지만. |
| 청주에 들어서는 관문인 청주 인터체인지에서 도심까지, 4차선 도로가에 총 6킬로미터에 걸쳐 줄지어 늘어선 플라타너스가 푸르다. 아직 여름의 빛을 잃지 않은 새파란 이파리들이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고, 이파리 새로 쏟아지는 햇살이 환하게 부서진다. 어쩐지 낯익은 듯 해 기억을 더듬어보니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최민수가 오토바이 뒷좌석에 고현정을 앉히고 속력을 내어 달렸던 그 길이다. 이 도로의 춘하추동을 담은 사진이 어느 사진전에선가 대상을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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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나도 웹서핑 중 국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는 이름으로 얼핏 사진을 접한 기억이 있다. 새싹이 돋아나는 연두색의 길, 지금 내가 바라보는 짓무를 정도로 푸른 길 그리고 노랗게 물든 낙엽 길과 눈으로 덮인 길까지, 어느 계절에 만나더라도 아름답다는 말에는 이견을 달 수 없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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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한가운데 위치한 직지삼경 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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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목적지는 가로수 길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직지심경박물관이다. 청주 한가운데에 위치한 박물관은 포근한 숲에 둘러싸인 아늑한 건물이다. 문을 들어서는 내 눈을 잡아끄는 것이 직접 금속활자로 책을 만들어보는 체험코스. 도우미들이 만드는 과정을 도와준다는 말에 한 번 들러보았다. 직접 한지를 뜨고, 금속 호라자로 인쇄하는 작업은 만만치 않다. 잉크가 번지고, 어떤 부분은 선명하게 찍히지 않는다. 활자를 찍은 후에 표지에 능화 모양을 넣고 엮는 과정까지 다섯 단계를 마치자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다. 약식으로 만들었고, 그나마도 도우미들이 친절하게 도와주었음에도 이렇게 힘들었는데 800년 전 사람들이 이 책을 찍어냈다니. 그러나 감탄은 도서관을 둘러보면서 안타까움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어렵게 만들어낸 직지의 상권은 전해지지 않고, 첫 장이 떨어진 하권만 프랑스에 있다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
| 1999년 라이프지에서 밀레니엄을 맞아 그동안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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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 큰획을 그은 인물 100명을 선정했다. 나폴레옹과 알렉산더 대왕, 아인슈타인까지 쟁쟁한 경쟁자를 뛰어넘고 1위를 차지한 인물은 금속활자를 발명한 구텐베르그였다. 금속활자 덕분에 이전까지는 손으로 베껴 썼던 성서를 여러 권 찍어낼 수 있게 되었고, 그렇게 대중에게 보급된 성서가 서양 문명의 핵심 기독교를 빠르게 전파시켰기 때문이다. 르네상스도 종교개혁도, 산업혁명까지 모두 구텐베르크에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직지 심경은 구텐베르크의 것보다 무려 78년이나 앞선다. 이걸 잘 산렸다면 세계의 중심이 우리나라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과거를 향한 '어쩌면' 이라는 가정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안타까운 상상을 쉽게 거둘 수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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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청호에 잠긴 누군가의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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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에 있는 문의문화재단지는 대청호가 정면으로 보이는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다. 1981년에 완공된 대청댐 때문에 수몰될 뻔한 문화재와 가옥들을 고스란히 옮겨서 만들었다는 설명을 들으며 대청호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물 아래 고스란히 잠겨 있을 누군가의 이야기들이 들리는 것 같다. |
| 모든 것을 옮겨오지는 못했겠지만 다행히도 오리 고인돌을 비롯한 선사유적에서부터 문산관, 전통가옥에 주막까지 수몰될 뻔했던 것들이 9만 9천 평방미터 크기의 문의 문화재 단지에 보존되어 있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초가집. 얼기설기 엮은 사립문을 열고 궁색하게 만든 초가삼간으로 들어선다. 초가집의 살림 수준은 지붕으로 가늠할 수 있는데, 볏짚이 두꺼울수록 잘 사는 집이다. 지붕의 재료인 볏짚은 장작 대신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가난한 집이라면 떌감으로 쓰느라 지붕을 엮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붕이 높을수록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다. 내가 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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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 집은 지붕이 높으니 비교적 살림이 나은 곳이었나 보다. 양반들이 살았던 기와집 앞에는 부정한 것을 쫓아준다는 호랑이의 그림이 걸려 있다.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면 문바로 옆에 하인들이 기거하던 행랑채가 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행랑채에 온돌이 있느냐 없느냐로도 양반이 좋은 주인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추운 겨울, 하인들이 따뜻한 온돌에서 미적거리다가 문을 늦게 열어주는 경우가 있어, 성미가 고약한 양반은 아예 행랑채에서 온돌을 빼 버렸다고 한다. 문의문화재단지에 옮겨놓은 행랑채에는 온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여기 살던 양반은 마음씨가 고왔나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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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꽃마을에서 즐기는 아름다운 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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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내면 남단, 은적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청원연꽃마을은 흔히 생각하는 시골과는 조금 다르다. 아름다운 집들은 아일랜드의 시골 마을을 연상시키고, 마을 곳곳에서 분홍, 흰색과 노랑의 연꽃이 아름답게 피는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2007년 전국 농촌마을 가꾸기 경진대회에서 농림부 장관상을 수상했다는 이 마을의 특산물은 수련인데, 이것을 이용해 만든 연잎밥과 한과, 칼국수, 차 등이 유명하다. |
| 연잎밥은 공이 많이 들어가는 음식이다. 호두와 은행, 잣, 대추 등 14가지 정도의 잡곡을 넣어 50분간 밥을 짓고 10분간 뜸을 들인다. 이것을 재료가 고루 섞이게 잘 지은 후, 연잎에 싸서 다시 50분간 찌고 10분간 뜸을 들여야 완성된다. 반찬으로 나오는 연꽃 지짐이와 신선한 나물 반찬을 곁들여 먹으니 건강해지는 기분이 든다. 그간 더위 먹어가며 고생한 나 자신에게 선물을 준 느낌이다. 밥을 먹은 뒤에는 백련으로 만든 차를 한 잔 마셔본다. 새벽 다섯 시에 딴 연꽃을 급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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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동시켰다는 연꽃차는 산뜻하면서도 달짝 지근한 뒷맛이 혀에 착 감긴다. 물을 부으면 서서히 피어나는 연꽃의 모습을 감상하며 즐기니 더욱 감미로운 이 차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맛이 나는 차'라는 별칭을 붙여주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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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꽃마을에서 차로 30분을 가면 청남대를 만날 수 있다. 따뜻한 남쪽의 청와대라는 의미의 청남대는 원래 대통령의 전용 별장이었다. 2003년 4월에 노무현 대통령이 충청도에 기증하여 민간에 개방된 지금은 별장보다는 공원의 느낌이 더 강하다. 안내원의 설명에 따르면, 대통령 숙소의 유리는 도청을 막기 위해 청진기를 대면 음악이 나오게 설계되었다고 한다. 무슨 음악이 나오는지 궁금했지만 민간에 넘어가면서 더 이상 음악은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안타까웠다. 서울 1945, 제5공화국, 영웅시대, 효자동 이발사 등 여러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였던 이곳은 대통령의 숙소 이외에도 미니 골프장, 낚시터, 야생화 단지 등의 볼거리가 있다. 모든 곳이 아름답지만 특히 대청호를 바라보며 즐길 수 있는 오각정 방향 산책코스를 추천해주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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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 속에서 단단해지는 증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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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에서 20분 거리에 위치한 증평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증평 장뜰 시장이다. 이곳에 전국 최초로 대장간부분 기능 전승 1호로 선정된 최용진 씨가 운영하는 전통 대장간이 있기 때문이다. 자그마한 대장간 근처에 다가서자 불기운이 후끈하게 얼굴에 닿는다. 화덕에 불을 피우고 쇠를 달궈 망치질한 후 담금질하는 전통 방식을 사용해서, 대장간 가운데에 활활 타는 화덕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전통 방식 그대로 만든 농기구와 칠지도, 생활도구 등이 있는데 전국 무속인들의 방울이나 칠지도, 창 등을 도맡아 만드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농기구와 식도, 문고리 등 다양한 물건이 빼곡하게 들어찬 대장간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물건이 있었는데, 키 위에 작은 크기로 만든 전통 농기구 장식품이었다. 우리 고유의 생활도구나 농기구, 무기류를 축소시킨 상품으로 2005년 관광 공예상품 공모전에서 은상을 받은 제품이라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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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평의 특산물은 홍삼이다. 증평의 장이 익어가는 마을에서는 실제로 된장이나 간장, 고추장을 담그는 것 외에도 홍삼을 쪄서 구증구포를 만드는 것 역시 체험할 수 있다. 구중구포는 말 그대로 인삼을 아홉 번 쪄낸 홍삼을 가리키는 말인데, 아홉 번을 쪄내고 나면 인삼의 사포닌 성분이 두 배로 증가된다고 한다. 인삼은 열이 많은 사람에게 해로워서 주의해야하지만 홍삼은 모든 체질에 잘 받는다는 말에 나 역시 홍삼을 하나 맛본다. 아홉 번이나 불기운을 견뎌낸 홍삼, 불에 달구어 두드려낸 대장간의 물건 모두 열을 가함으로 더나은 존재가 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어쩌면, 몇 번의 여름을 더 거치고 나면 나 역시 더 단단하고,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새로운 고민을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출발할 때보다 가볍게 느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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