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와 아프리카가 맞닿는 곳 Melted Africa Melted Egypt

아스완은 해질녘에서야 붐비기 시작한다. 필레 신전과 아스완 하이댐으로 단체 관광을 떠났던 관광객들이 속속 돌아오느라 거리는 분주하고, 중부의 룩소르로 향하는 나일 크루즈선들이 하나둘씩 선착장을 떠나면 룩소르에서 내려온 크루즈선이 빈 선착장을 메운다. 낮과 밤에 따라 선착장의 분위기가 바뀌고, 그 선착장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드는 아스완은 묘한 곳이다.

 아프리카와 이집트의 문화가 절묘하게 녹아든 아스완

석양이 내릴 무렵, 하얀 돛대를 단 펠루카가 강변의 선착장으로 돌아온다. 주황빛이 짙어지는 하늘과 함께 나일 강마저 주황빛으로 반짝이기 시작하면 선착장에 길게 늘어서서 대기 중인 크루즈선들도 차례로 불을 밝힌다. 줄을 맞춰 크루즈선으로 돌아오는 사람들, 해지기를 기다렸다는 듯 이제야 어슬렁어슬렁 거리로 나서는 이집트인들로 인해 선착장은 술렁이기 시작한다.이집트 남부 누비아(Nubia) 지방의 중심도시 아스완(Aswan)의 저녁 무렵 풍경이다. 관광객을 태우고 룩소르와 아스완 간을 나일강을 통해 이동하는 나일 크루즈의 종착지가 아스완이다보니 선착장은 항상 붐비고, 관광객이 모여 있는 선착장 주변에는 마차꾼이며 그저 관광객을 구경하려는 현지인의 모습도 종종 보인다.
아스완과 아부심벨 등이 속한 누비아 지방은 이집트의 가장 남단에 있다. 카이로에서는 물론이고 고대 신왕국 시대의 수도였던 룩소르에서도 떨어져 있고, 아래로 수단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이 지역은 이집트의 여느 지역과는 좀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 누비아 지방은 이집트가 왕국으로 번영하기 전까지 흑인들이 지배하던 땅이었다. 그들의 영향으로 아프리카의 색채가 강한 누비아는 지금까지도 생활 풍습이나 사람들의 생김새가 이집트의 여느 지역과 조금 다르다. 아랍인보다는 흑인의 비율이 높고, 사견이지만 이집트 다른 지역에 비해 아직은 때가 덜 묻은 듯한 순박한 사람들이 많아 푸근하게 기억되는 곳이기도 하다.

 나일과 함께 흐르는 아스완

메마르기만 한 이집트에서 인류의 문명이 발원한 데는 나일 강의 역할이 컸다. 주기적으로 범람하는 나일은 건조한 대지를 적셔주었고, 범람의 시기가 늘 일정했기에 그 주기를 토대로 태양력과 기하학, 건축술, 천문학까지 발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나일 강 위를 오가는 다양한 크루즈 프로그램이 관광객들의 인기를 얻으면서 관광대국 이집트의 주요 수입원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는 것이다. 누비아의 아스완 역시 상황은 다르지 않다. 나일 크루즈의 종착지인 아스완은 언제나 현지인보다 더 많은 수의 관광객들로 붐비고, 선착장을 따라 상권이 형성되었으며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코스인 누비아 박물관이나 미완성 오벨리스크가 발견된 채석장 역시 선착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선착장에서 도보로 15분 남짓이면 닿는 채석장은 그리 특별하지는 않다. 여느 채석장의 풍경과 다를 바 없지만 이곳이 특별히 주목받는 이유는, 미완성인 채로 버려진 오벨리스크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태양신앙을 상징하는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는 많은 수가 선진국의 박물관으로 옮겨졌고, 이집트 현지에도 그리 많은 수가 남아 있지는 않다. 피라미드, 스핑크스와 더불어 이집트를 대표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오벨리스크는 이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도시 전체가 유적지인 룩소르에 많은 신전과 왕의 장제전이 있지만, 룩소르 지역의 돌은 주로 라임스톤이어서 건축용으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단단하고 강해 오래도록 무너지지 않을 석재를 찾던 옛사람들은 아스완에서 화강암지대를 발견하게 되고, 이곳에서 오벨리스크를 만들어 룩소르로 운반하거나 채석장에서 캐낸 석재를 룩소르로 옮겨가 신전을 지은 것이다. 아스완의 채석장에 길게 누워 있는 오벨리스크는 3면의 모양이 다듬어진 상태로 나머지 한 면은 아직 바위에서 분리되지 않았는데, 제조 과정에서 균열이 발견되어 완성을 앞둔 채로 버려진 것이다. 지금 측정된 길이만 해도 41미터에 달해, 만약 완성되었다면 가장 큰 오벨리스크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채석장을 나오면 지척에 누비아 박물관이 있다. 이집트인이기에 앞서, 누비아인임에 긍지를 갖고 있는 이 지역 사람들의 삶과 문화, 그리고 그들의 역사를 볼 수 있도록 꾸며진 전시공간이다. 카이로의 피라미드 유적지나 룩소르의 왕가의 계곡, 핫셉수트 장제전에 비해 입장료가 비싸긴 하지만, 아스완에 있는 박물관임을 실감할 수 없을 만큼 모던한 느낌으로 구성되어 있다. 넓은 정원을 지나 실내로 들어서면 전시실 입구에서부터 람세스 2세의 입상과 눈이 마주친다. 이집트의 어느 지역에서건 그의 흔적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누비아의 문화를 전시해 놓은 박물관에 단 하나 있는 파라오의 조각상 역시 람세스 2세다. 아스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아부심벨에 그의 대신전이 있으니, 여기서 보게 되는 것도 그리 어색하지는 않지만 역시 이집트에서는 그의 영역을 벗어나기 힘듦을 또 한 번 실감한다.
어떤 순서대로 관람해야 할지의 고민은 비교적 수월하게 해결된다. 전시관 1층 중앙홀에 선 람세스 2세의 입상을 중심으로, 시대의 변천사에 따라 닮은 듯 다르게 조금씩 변해가는 누비아의 모습을 테마별로 모아 두었으니 오른쪽 혹은 왼쪽으로 천천히 따라 돌기만 하면 된다. 누비아의 대지를 보여주는 모형을 필두로 피라미드 시대, 쿠시왕국 시대, 그리스도교 시대, 이슬람 시대에 대한 설명과 그 시대의 흔적을 보여주는 유물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특이한 부분은 유네스코 전시코너. 1960년대에 아스완 하이댐이 건설되면서 아부심벨 대신전과 아스완의 필레 신전 등 아스완 남부의 신전들이 수몰위기에 처했을 때 도움을 준 유네스코와 관련한 기록이다. 당시에 도움을 준 나라의 리스트와 지원 금액, 신전 이전 과정 등이 사진과 함께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예측했듯 우리나라는 그 명단에 빠져 있다. 12시간이나 비행해야 닿는 먼 나라이기는 하지만, 인류적인 차원의 문화 사업에 동참했더라면 후손으로서 참 뿌듯할 뻔 했었는데 말이다.

 여신을 향해 가는 길

앞서 잠깐 언급되었던, 누비아 일대의 신전들을 수장시킬 뻔 했던 아스완 댐을 지나 필레 신전(Philae Temples)으로 향한다. 1945년에 그리스의 건축가가 디자인했다는 아스완 하이댐은 폭 360미터, 높이는 111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댐으로, 수단, 르완다, 콩고, 탄자니아, 에티오피아, 기니 등 무려 아프리카의 9개국이 댐과 접한다하니, 규모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하다. 선조들의 건축술을 신전에서 발견할 수 있다면, 아스완댐은 후손들이 자랑하는 최고의 현대 건축물인 셈이다. ‘보안상의 이유’라는 명목으로 댐을 통과하는 그 긴 다리에 멈춰보지도 못 하고 차는 달린다. 사진 촬영도 물론 금지.
필레 신전으로 들어가려면 다시 한 번 배를 타야 한다. 나일강변의 크루즈 선착장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은 선착장에 수십 대의 통통배가 포개지듯 정박되어 있고, 어느 배에나 올라타도 목적지는 동일하다. 이시스 신을 모신다하여 이시스 신전이라고도 불리던 필레 신전은 원래 필레 섬에 위치했었다. 그러다 아스완 하이댐이 건설되면서 유네스코의 도움으로 지금의 아질리카 섬에 자리잡은 것이다. 신전을 구성하는 모든 돌에 번호를 매겨두었다가 해체하고, 지금의 위치로 옮겨온 다음 번호에 따라 재조립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쳤다지만 신전의 기품이나 부조의 정밀함은 시간의 흐름을 무색하게 만든다.
필레 신전에서는 재미있는 부조를 찾을 수 있다. 이집트인들은 오빠인 오시리스 신과 결혼한 이시스 신이 이 곳에서 아들 호루스 신을 낳았다고 믿고 있는데, 신전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건물의 벽에 이시스가 호루스를 출산하는 장면과 품에 안고 젖을 먹이는 듯한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 새겨져 있다. 호루스 신이 태어난 곳이라 여기는 때문인지 건물에는 ‘탄생의 집(Birth House)’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실제로 이집트 여인들 사이에서는 이곳에 와서 부조를 만지고 가면 아이를 낳는다는 속설이 유명하다하니, ‘돌사자의 코를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라는 유의 속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했었나보다. 
필레 신전에서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그래피티. 사실 말이 좋아 그래피티지, 먼저 이곳을 다녀간 유럽 사람들의 낙서자국이다. 그리스어, 불어, 영어 등 다국적 언어로 구성된 낙서는 불국사의 석탑에 하얀색 수정액이나 검정 사인펜으로 흘려쓴 ‘누구는 누구를 좋아한대요’ 하는 차원이 아니라, 아예 고대 이집트인의 흉내라도 내듯 신전 벽에 깊숙이 새겨져 있다. 주로 1800년대에 새겨진 듯 보이는 낙서는 기자에서 아스완까지의 여정에 대한 기록을 새긴 것도 있고, 그저 자신의 이름을 새긴 흔한 낙서도 있다. 3천 년을 견뎌내 온 신전을 망쳤으니 괘씸죄에 해당할 노릇이지만, 그 낙서도 이미 200여 년의 세월을 넘어오고 있으니 다시 몇 백 년이 지난 훗날 언젠가는 역사의 한 가닥으로 남을지도 모르겠다. 원래 역사가 그런 거 아니던가. 아주 사소하고 평범한 무언가에 시간이 차곡차곡 쌓이고 덮여서 완성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