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삶은 계속 된다 How to discover Kota Kinabalu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왔다. 한 번의 멈춤이나 회귀 없이 적정한 속도로 움직이던 시간의 룰은 말레이시아의 끝, 사바 땅에도 어김없이 적용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흐르는 시간은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종종 대면하곤 하는 시간의 궤적은 코타키나발루에서 역시 마주하게 된다. 카다잔의 옛 문화를 재현하고 있는 몬소피아드 문화촌에서, 그리고 오늘의 사바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 터전에서.

 몬소피아드 문화촌

차로 불과 30분이나 달렸을까. 코타키나발루 도심을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풍부한 열대림 사이로 뻗어 있는 한적한 시골길로 접어들었고, 드문드문 서 있던 농가의 모습마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쯤, 밑둥이 굵은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천장을 올린 건물에 닿았다.
몬소피아드 문화촌(Monsopiad Cultural Village). 시내에서 그리 멀지는 않지만 휴양지로서의 코타키나발루를 찾는 사람들이 많은 터라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이곳은 인적이 드물어 찻길에 접한 입구조차도 조용한 침묵에 덮여 있다. 지금이야 간혹 바람에 나무 이파리들이 부딪치며 내는 소리와 찌르륵거리는 풀벌레소리를 제외하면 한적하기 그지없지만 몇 세기 전만 해도 이 지역은 사바 주에서 터를 잡고 생활하던 용감한 무사들의 땅이었다. 사바 주의 전통 부족 중 하나였던 카다잔(Kadazan)의 문화는 지금도 코타키나발루와 사바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의 근간이 될 정도로 번성했었지만 막상 그들의 흔적은 많이 남지 않았다.
1996년에 문을 연 몬소피아드 문화촌은 카다잔 족이 사용하던 생활도구와 전통 가옥을 재현해 놓고, 그들의 민속춤과 음악, 사냥법 등을 재연하는 퍼포먼스 등을 통해 카다잔들이 살아왔던 삶의 자취를 보여주는데, 사바에서는 유일하게 카다잔의 문화를 보존하고 있는 곳이다. 현대에 맞게 수정하거나 꾸미지 않고 원형에 가깝게 카다잔의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는 데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한 가지 흠이라면 말레이시아 정부나 사바 주 차원이 아닌, 개인이 관리하는 곳이어서 입장료가 다소 비싼 편이라는 점.

 카다잔의 삶 속으로

문화촌으로 들어서면 카페테리아에서 나눠주는 웰컴 티를 한잔씩 마신 뒤 문화촌 투어가 시작된다. 그리 넓지 않은 곳이어서 투어라고 하기는 어색하지만 스태프와 함께 문화촌의 구석구석을 돌아보는 동안, 그들의 역사라던지 풍습에 대한 설명을 들려준다. 문화촌 건너편의 나무로 된 2층 건물이 투어의 첫 번째 코스. 별 특징 없어 뵈는 건물의 끽끽대는 나무 계단을 밟고 2층으로 올라서면 그저 휑한 여백이 눈에 담긴다. 장독대에 있으면 어울릴 듯한 항아리 몇 개가 바닥에 놓여 있고 벽에 군데군데 걸린 낡은 액자 정도가 고작이다.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려니 스태프가 천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뭔지 보란다. 바싹 마른 나무줄기와 하얀 바가지 같은 것들이 엮인 채 달려 있는 듯한데, 실제 해골이란다. 300여 년 전, 타민족의 침입으로 큰 데미지를 입은 카다잔 족이 멸망해가던 찰나에 몬소피아드(Monsopiad)라는 전설적인 인물이 나타나 적을 물리치고 적장의 목을 베었단다. 그의 승전을 기념하며 적장의 목을 매달아 둔 것이 전해오는 것이다. 지금의 문화촌 역시, 카다잔의 영웅이 된 몬소피아드를 기리며 그의 이름을 따 몬소피아드 문화촌이 되었다는 것이 스태프의 설명.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도 어느새 몸에 밴 살인의 습성은 몬소피아드를 황폐하게 만들었고 급기야는 부족에 의해 축출당하기는 했지만 그의 후손들은 아직까지 그를 기리고 카다잔의 전통을 보존하며 문화촌을 관리하고 있다.
물론, 살벌한 살인의 추억이 카다잔의 전부는 아니다. 다시 민속촌으로 돌아와 안마당으로 들어서면 게임장이다. 지금은 거의가 자취가 사라져버렸지만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사바 지역 사람들에게서 사랑받던 놀이감이 모여 있다. 대나무 장대에 발을 얹고 균형을 잡아 걸으면 된다며 타이트한 스커트를 입은 스태프가 시범을 보이는데 전혀 힘들지 않아 보인다. 어렵지 않으니 한번 해보라며 대나무 장대를 건네주는데 연습 없이는 아무래도 불가능할 것 같아 그냥 스킵. 이번에는 나무로 만든 새총을 건네준다. 진흙을 뭉쳐 단단하게 만든 것으로 2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걸린 나무 토막을 맞추면 된다는데 생각보다 어렵다. 조준을 잘 해야 목표물을 맞힐 텐데, 조준은 커녕 단단한 고무줄을 제대로 퉁겨낼 수가 없으니 진흙덩이가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기 일쑤다. 서너번 시도했지만 성과가 없어서 역시 그냥 패스. 세 번째는 도구부터 인상적이다. 속이 빈 굵고 긴 쇠막대 끝에 깃털이 날린 바늘을 넣어 과녁의 그림을 향해 후- 부는 바람총이 기다리고 있다. 노루며 비버, 새, 도마뱀 등의 그림이 그려진 과녁을 향해 바늘을 날리려니, 쇠막대가 워낙 길어 내 폐활량으로 가능할까 싶었는데 웬걸, 제대로 가서 꽂힌다. 너도나도 쇠막대 끝에 입술을 대고 후후 불어대서 그런지 유독 반질거리는 막대에 입을 대려니 순간 멈칫하게 되긴 하지만 이미 알아버린 사냥의 즐거움은 그 후로도 바늘을 세 번 더 날리게 만들었다.
단순해 뵈지만 직접 해보기 전엔 절대 그 재미를 짐작할 수 없었던 카다잔의 놀이기구 앞에서 한참 시간을 보내다가 민속춤이 재연될 공연장으로 향한다. 얇은 나무 막대를 이리저리 솜씨 좋게 엮어 전통 농기구며 악기를 만드는 아주머니를 지나 걷다 보면 민속촌 뒤로 흐르는 모욕(Moyog) 강이 모습을 드러낸다. 강폭은 그리 넓지 않은데 요즘은 비가 많은 철이라 그런지 수량이 꽤 많아 보인다. 강바닥에 진흙이 많은지 물색이 짙은 황톳빛이다.

 삶이 녹아든 몸짓

한국인의 몸 속에는 혈액 말고도 한이 함께 흐른다 그랬던가. 우리의 전통 몸짓과 노랫가락을 지배하던 것이 한이었다면, 카다잔의 춤사위는 그들의 삶의 모습을 표출하고 있었다. 사냥을 응용한 몸짓, 연인에게 구애하는 청춘 남녀의 몸짓, 풍족한 먹거리를 선사해 준 대자연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몸짓은 굳이 가장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표출되는, 극히 인간적인 움직임이다.
화려한 색상의 전통복장을 차려입은 무희들이 섬세하고 교묘한 손짓과 발짓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으면, 상체를 노출한 채 얼굴과 몸에 분장을 한 남자 무용수들이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움직이며 무대가 울리도록 강한 몸동작을 선보인다. 좁은 무대이지만 용맹스러운 카다잔의 모습이 그들의 몸짓에 투영되는 순간이다. 한 번의 공연에 네 가지 정도의 댄스를 선보이는데 음악과 몸짓이 생소하긴 하지만, 지루하지만은 않으니 괜한 걱정은 버릴 것. 관람석에까지 내려온 무희가 좌중을 돌아보고는 픽업한 사람을 무대 위로 데려가 간단한 춤사위를 가르쳐 주는 등 무용수와 관람객들이 함께 어울리는 퍼포먼스가 기다리고 있다. 눈의 호사만으로도 즐거울 수 있겠지만, 내 몸으로 카다잔의 몸짓을 직접 재연하는 재미 또한 색다르니 무용수가 당신의 팔을 잡으면 못 이기는 척 한번 따라 가볼 것.

 오늘을 사는 사람들

몬소피아드 문화촌을 나와 다시 코타키나발루 도심으로 접어드니 잠시 차가 막힌다. 같이 갔던 일행 말고는 타인의 흔적을 볼 수 없었던 한적한 시골길에서 몇 백 년 전의 문화체험을 하고 돌아나온 지 채 몇 분이 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현대식 건물이 늘어서 있고, 자동차가 꽉꽉 들어찬 도로의 풍경에 살짝 당혹스럽다.
5분만 더 가면 숙소라는데 이렇게 꽉 막힌 길에서 한참을 기다릴 바에야 차라리 걷자 싶어 도로로 내려선다. 도로 안쪽으로 작은 좌판이 오밀조밀 들어서 있고, 열대과일이 수북하게 쌓인 걸 보니 시장이 있는 골목을 통과하는 중이었나 보다. 그러니 이렇게 막힐 수밖에. 간혹 동남아 지역으로 출장을 가거나 여행을 할 때, 하루 일정이 끝나면 한 봉지 가득 사서 호텔로 돌아오곤 하던 망고스틴이며 리치, 람부탄이 반가워서 가게 앞으로 다가섰더니 어디서 왔냐고 묻던 과일가게의 젊은 주인이 생소해 뵈는 과일을 하나 까서 내민다. 뱀의 비늘 같은 겉껍질 속에 연노란 빛을 띠는 과육이 들어 있는데, 사과를 씹을 때와 비슷한 식감에 복숭아씨만큼 큰 갈색 씨가 중간에 들었다. 사락(Salak)이라는 생소한 이름까지 알려주는 그의 친절에 한 봉지 사들고 갈까 싶기도 했지만 숙소까지 걸어야할 걸 고려하면 아무래도 고생할 것 같아 언제인지 모를 ‘다음’을 기약하며 돌아섰다.
과일과 채소, 그리고 각종 액세서리를 팔던 시장을 지나자 갑자기 시야가 넓어지며 항구가 나타난다. 공터 뒤로 가득 펼쳐진 바다 저쪽으로 가야 섬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떠 있고, 그 뒤로 마누칸이며 사피 섬 역시 눈에 들어온다. 저녁 무렵이 가까워졌는지 수평선의 색깔이 조금씩 붉게 바뀌더니 어느 틈엔가 선명한 일몰이 수평선 쪽으로 조금씩 가라앉고 있다. 넋을 놓고 바다를 보고 있다가 돌아나오려는데 휑한 공터에 언제 그렇게 몰려왔는지 포장마차가 빼곡하게 들어섰다. 이제 막 불을 지핀 화로에 석쇠를 얹고 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생선이며 새우를 구워내는 통에 해 질 녘의 항구는 연기로 가득차고 고소한 냄새가 사방에서 피어오른다. 손바닥보다 큰 새우와 랍스터를 연방 구워내는가 하면 오징어와 게, 이름 모를 온갖 생선들까지 화로 위에서 고소하게 구워지고 있다. 이 어시장의 좋은 점은 바다에서 갓 잡은 생선에 양념을 하지 않고 곧바로 구워내 즉석에서 먹을 수 있다는 점. 메뉴판을 포장마차 기둥에 떡하니 붙여놓긴 했지만 부르는 게 값임은 당연한 일.
여럿이 둘러 앉아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생선과 새우 접시를 앞에 두고, 손가락으로 밥알을 꼭꼭 다져가며 먹는 현지인들의 테이블이 더 푸짐한 걸 보며 분명 그들은 특별 대우를 받은 거라며 시샘어린 눈길로 바라만 보다가 왁자지껄 시끄럽지만 공기 중에 싱그러운 생기가 떠도는 시장을 돌아 나왔다. 보는 것만으로도 침을 꼴깍 삼키게 만들던 싱싱한 새우구이 대신 밀가루 반죽에 잘게 썬 채소를 넣어 튀겨내어 기름이 줄줄 흐르던, 3개에 1링깃 밖에 하지 않던 불량식품을 검은 봉지에 담아든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