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밤, 파리 FRANCE

밤은 인간이 무의식에서 꿈을 꾸는 시간, 은은한 달빛 아래 수많은 예술적 영감들을 뿜어내는 모태의 순간이다. 1년에 한번뿐인 파리의 하얀 밤. 10월 4일 19시부터 10월 5일 아침 7시까지 12시간 동안 파리는 잠들지 않았다. 비디오 아트와 설치 전시, 대표적인 관광 포인트에서 펼쳐지는 독특한 프로젝션, 성당과 구청 앞의 밴드 공연, 노상에서 펼쳐지는 줄다리기, 타악기 주자들의 행진, 렉처, 연극 그리고 들뜬 표정으로 길을 나선 사람들. 겨울처럼 밤바람이 차가웠지만, 이곳의 밤은 뜨거웠다.

2002년부터 시작된 파리의 하얀 밤은 이제 명실상부한 파리의 행사로 자리 잡았다. 온갖 국적의 관광객들은 밤새 파리의 곳곳에서 펼쳐지는 볼거리들로 행복해했다. 모든 공연은 무료이며,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아티스트들을 파리의 명소에서 만날 수 있었다. 시내 곳곳에서 하얀 공 모양의 표지판이 달린 안내소를 찾으면, 포스터를 표지로 한 두툼한 안내 책자를 받을 수 있다. 뒷면의 심야노선도며 5군데의 중요 포인트-파리 북 역과 동 역, 리옹과 베르시 역, 몽파르나스와 생 제르망, 생 라자르 역과 샹젤리제, 마레 지구와 생 자크 탑-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둔 책자를 본 순간, 어디로 가야 좋을까 고민스러워졌다. 우선 마레지구와 생 자크 탑으로 향했다. 저녁 아홉 시, 샤틀레 역에서 내려 인파에 밀려 걸음을 옮겼다. 곳곳에서 알 수 없는 외국어가 들려오기에 주위를 둘러보니 외모만으로도 구분되는 동유럽, 혹은 북유럽 관광객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역에서 내려 생 자크 탑으로 향하는 길에 하얀 공 모양의 ‘하얀 밤(Nuit Blanche)’ 안내판이 눈에 띄었다. 시청 직원들이 안내책자를 쌓아두고, 나눠주고 있었다. 잠시 직원들에게 질문을 던졌더니, 정작 일하는 통에 자신들은 새벽 2시까지 아무것도 구경하지 못하지만, 그 이후에도 볼거리는 많다며 괜찮다고 했다. 안전요원들은 밤새 전시장소를 지키면서 혹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사고를 대비하느라 꼼짝도 못하는데, 그래도 그들보다는 낫지 않느냐며 여유롭게 웃어 보이는 직원은 “지난 2002년에 처음 행사를 시작했을 때보다 나날이 더 나아지고 있다고, 이날을 위해 참 오랜 준비를 했다고 실컷 즐기라.”라고 덧붙였다.
 시청 앞에서는 행위 예술가들이 폭죽을 들고 여러 묘기를 선보이고 있었다. 몰려든 사람들이 많아서 내가 여러 번 까치발을 딛고 동동거리자 한 무리의 소년들이 그들의 벤치를 양보해주었다. 이곳에 서서 보라면서. 이 하얀 밤을 즐기고자 파리 3존에서 시내로 나왔다고 했다. 샴페인 병을 내밀면서 권하는 그들은 DSLR로 사진을 찍어 줄 수 있겠느냐고 수줍게 물어왔다. 광장 한쪽에서는 줄다리기가 펼쳐졌는데, 어둡기도 어두운데다 지나치는 사람들이 이쪽저쪽 할 것 없이 줄을 잡는 통에, 한참 승부가 나지 않았다. 이기고 지는 데에 상관없는지 사람들은 줄을 놓고 자리를 뜨는 것을 아쉬워했다. 생 자크 탑에는 탑 속의 탑 모양으로 비디오 아트가 펼쳐지고 있었다. 영상만으로도 늘상 지나치면서 보았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탑이 되어버리다니. 그 옆에서 가면을 쓴 타악기 연주자들이 북을 치며 거리를 지나갔고 그들의 뒤를 수많은 사람이 구호를 외치며 따라갔다. 
4구의 구청 앞, 한쪽에서는 밴드의 공연이 역시 영상과 함께 펼쳐지고 있었다. 휠체어를 탄 사람들, 좀 나이 많은 커플들도 거리낌 없이 어깨를 들썩이며 무대 앞에서 춤을 추었고, 신이 난 보컬은 무대를 휘저으며 열창했다. 스크린을 방불케 하는 커다란 프로젝션 위로 애니메이션과 짧은 영화들이 지나갔다. 한쪽에서는 들여다보는 사람들의 모습이 다시 굴절되어 그대로 화면에 반영되는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신기해하는 관객들이 쉽게 작품 앞을 떠나지 못하는 터라 기다리는 줄이 무척 길었다. 두툼한 장막으로 가려진 전시실 한쪽에서는 빛과 이미지를 이용한 비디오 아트와 설치미술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밤이기 때문에 가능한 온전한 어둠, 그 공간 속에서 펼쳐지는 전시는 아주 특별한 분위기가 있었다. 붉고 흰  빛이 일렁이는 동안은 넋을 잃고 그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자정이 좀 넘어갈 때쯤 마레 지구에서 생 제르망 성당으로 건너오며 지나친 퐁피두 센터에서는 드뷔시의 선율이 들려왔다. 내장을 들어낸 것처럼 건물 안팎이 뒤바뀐 구조의 퐁피두 센터는 야간조명과 함께 더욱 빛이 났다. 파리와 리옹의 국립 고등음악원 학생들로 구성된 영아티스트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가까이에서 듣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지만, 생 제르망 성당으로 가려면 서둘러야만 했다. 날씨가 좀 덜 춥고, 시간상으로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센터 앞 광장 바닥에 자리 잡고 앉아 와인을 마셨을 거란 생각에 아쉬움이 더해졌다. 새벽 5시, 생제르망 성당 앞에서 야간선 버스를 타고 파리 동 역과 북 역에 들러 비디오 아트들을 보았다. 유로 스타며 테제베를 타려고 왔을 때와는 완연히 달라 보였다. 단지 비디오아트만으로도, 늘 지나치던 익숙하든 장소가 이렇게 특별히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것은 밤의 마법이었을까. 이 새롭고 아름다운 풍경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생 제르망 성당 앞에는 유난히 사람들의 줄이 길었다. 새벽바람이 무척이나 차가웠지만, 캐시미어 목도리를 칭칭 두르고 1시간 넘게 서성거리며 기다렸다. 드디어 패티 스미스(Patti Smith)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아들의 기타, 딸의 피아노와 함께 노래하는 그녀는 너무 멋졌다. 시적인 가사들을 다 옮겨 적지 못하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기타를 치다가 노래를 하고, 클라리넷을 불다가 나중에는 재킷을 벗어 던지고 좌중을 휘어잡던 그녀는 오랫동안, 파리에 오는 것을 꿈꿨다고 했다. 그리고 기대하지 않았던 ‘몽상가들’과 ‘라스트 데이즈’의 마이클 피트가 2부에 등장했다. 프로그레시브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실험적인 작품이었는데 그는 무대 오른쪽에서 구부정하게 몸을 구부린 채 기타 줄을 끊고, 소리 내어 긁기도 하며 기타로 낼 수 있는 모든 소리를 들려주었다. 얼굴을 덮는 단발에, 아주 편한 옷차림을 한 그는 수줍은 듯 관객들을 똑바로 보지 않았다. 패티가 그에게 마이크를 넘겨주자 오히려 그녀 쪽으로 다시 마이크를 돌려놓고 노래를 불렀다. 마지막에는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피플 해브 더 파워(People have the power!)를 외쳤고 그녀가 시키는 대로 박자를 만들어 손뼉을 치면서 절정에 달했다. 패티 역시 나중엔 흥이 나서 무대에서 내려와 사람들 손을 잡아주고 사람들은 노래를 따라 부르고 휘파람을 불며 환호했다. “파리지엔들이 거만하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군요. 당신들은 너무 뜨겁고 열정적입니다.”라며 패티는 아주 만족한 듯 공연을 마쳤다. 모두들 자리를 떠나지 않고 앙코르를 외쳤으나, 이미 시간은 새벽 4시 30분. 공연이 끝났다는 안내 방송이 무정하게 흘러나왔다. 
엄청난 인파 속에서도 내 커다란 카메라를 보고 알아서 자리를 비켜준 사람들, 학생증을 떨어트리고 급하게 뛰어가던 나를 쫓아와 카드를 쥐여주며 내 이름을 어설프게 발음하던 청년, 생 제르망 성당 앞에서 추위에 떨던 나에게 숄과 장갑을 빌려준 사람들이 있어서 이 밤을 더욱 오래 기억할 것이다. “당신은 파리를 좋아하나요?” 라고 장갑을 빌려준 뒷자리의 사람이 질문을 해왔다. “그럼요, 이 하얀 밤은 낮보다 훨씬 아름다워요.” 내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그들은 하이네캔 작은 병을 내밀며 건배를 청해왔고, 나는 호기롭게 친친! 을 외쳤다.
How to get there
문    의 www.nuitblanche.paris.f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