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ic Zagreb & Happy Split 다른 좌표 위의 두 도시를 말하다

우리에게는 어느 틈엔가 먼 이야기가 되어버린 전쟁의 기억이 아직 가시지 않은 발칸반도. 그 중간 쯤 크로아티아가 있다. 역사 교과서에서나 등장하는 소재가 아닌, 피부에 와닿도록 가까운 과거에 전쟁을 치르고 마침내 자유를 얻은 크로아티아에는 이제 푸릇푸릇한 평화의 공기가 대기 곳곳에 스며 있다. 아직은 그늘을 채 벗어나지 못한 자그레브에도, 아드리아 해의 넉넉한 미풍에 한층 여유로워진 스플리트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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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중간은 힘들다. 여기에 치이고 저기에서 밀리고, 사방에서 밀려오는 갖은 압박에 맞서 혼자 굳건하게 설 수 있는 입지를 다지기까지는 끝도 없는 시련을 견뎌야 함은 당연지사. 우리나라만 봐도 그렇다. 아주 오래전부터 중국과 일본 사이에 낀 채 서로 툭탁거리며 살아왔고, 지금까지 그 툭탁임은 네버엔딩 과제로 남아 있다. 북으로는 슬로베니아와, 동과 남으로는 헝가리, 세르비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까지 많은 나라와 살을 맞대고 있는 크로아티아 역시 낀 나라로서의 상처와 아픔은 숙명처럼 따라왔다.
번갈아가며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 주위 강대국들의 지배를 받아오다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민족과 문화, 언어가 다른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등 주변국들과 함께 유고슬라비아라는 이름으로 한 나라가 되었고, 1990년대 후반에 와서야 독립을 하게 되기까지 5년에 걸친 지루한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만큼 어렵고 힘들었던 시간을 보낸 후 맞은 달콤한 자유의 시절이니만큼 크로아티아의 요즘은 더욱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일 테지만.

오랜 수도 자그레브
운 좋게도 자그레브(Zagreb)는 그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살짝 비켜갈 수 있었다. 크로아티아의 수도이지만 남부의 두브로브니크나 스플리트가 쏟아지는 폭탄으로 하염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을 때, 정말 하나님이 보우하사 자그레브는 다섯 번 정도의 공습만으로 그쳤단다. 하지만 전쟁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인근의 유럽국가로 피신했었고, 안정을 되찾고 있는 요즘에서야 떠난 사람들이 하나둘씩 돌아오고 있다.
오랜 시간동안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지배를 받았던 탓인지, 가지런히 기대선 단조로운 색채의 외벽에 좁고 긴 창이 난 건물들이 줄지은자그레브의 낡은 시가에는 오스트리아의 분위기가 얼핏 배어 있다. 어금니와 송곳니 즈음에서 한순간 빛을 발하는 금니처럼, 빛이 바래고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건물들 사이에 선명한 색상으로 빛나는 새 건물도 가끔 눈에 띈다. 자그레브 혹은 크로아티아를 통틀어 전쟁의 피해를 입었는지 운 좋게 피해갔는지 구분하는 쉬운 방법 중 하나로, 가급적 도시의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 이곳에서 유독 눈에 띄는 새 건물은 전쟁 후에 지어진 것이다.
전쟁은 이미 끝이 났으나 지중해 지역 사람들(엄밀하게는 아드리아해에 가깝지만) 그 특유의 ‘올웨이즈 해피’한 듯한 여유는 찾아볼 수 없는, 다소 경직되어 보이는 표정의 사람들이 유독 큰 키로 성큼성큼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거리를 따라 걷다가 트램이 오가는 큰 광장에 닿았다. 자그레브 번화가의 중심이 되는 반 엘라치차 광장(Trg Joship Jelacica)이다. 광장에는 자동차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서 간혹 지나가는 자전거를 제외하고는 자그레브의 이곳저곳을 연결하는 트램이 바삐 오가고 사람들만 가득하다.

중세의 모습을 간직한 언덕
엘라치차 광장의 중심에는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르는 반 엘라치차(Ban Josip Jelacica) 장군의 동상이 서 있다. 헝가리로부터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위해 싸우던 독립용사였던 그의 동상이 서 있는 광장의 명칭도 자연스레 그의 이름에서 따라왔다. 자유를 염원하던 크로아티아인들의 정신이 담긴 엘라치차 장군 동상의 얼굴은 비엔나를 연상시키는 주택가와 번화한 쇼핑 스트리트와 오피스가 밀집한 곳을 향하고 있고, 그 뒤로는 나지막한 언덕이 시작되며 자연스레 어퍼 타운과 로어 타운으로 나뉘는 경계가 되었다.
지금의 유럽을 볼 수 있는 모던한 분위기의 로어 타운에 반해 고즈넉한 중세 마을의 모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어퍼 타운은 시간도 멈춰가는 듯 고요하다. 유럽 대부분의 나라가 그들의 전통을 많이 변형시키지 않은 채 그 모습을 이어오고 있지만, 오후의 햇살 아래에서 더 붉게 빛나는 크로아티아 전통 양식의 납작한 삼각 지붕은 한껏 이국적이다.
어퍼 타운은 원래 2개의 작은 마을로 나뉘어 있었다. 반 엘라치차 광장 뒤편으로 얕게 흐르던 사바(Sava) 강을 경계로, 일반인들이 살아가던 왼쪽의 그라덱(Gradec) 마을은 13세기에 와서 터키인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마을 주위에 성을 쌓으며 요새화 되었고, 성직자들이 살던 오른편의 캅톨(Kaptol) 역시 16세기에 마을 외곽에 성을 쌓으며 두 개의 마을로 분리되었다. 그러다 1880년에 자그레브에 큰 지진이 발생하면서 두 도시를 가르던 벽과 마을의 많은 부분이 무너져 내리고, 얕은 강이 메워지면서 마을의 경계도 자연스레 사라지며 지금 자그레브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캅톨과 그라덱
광장 주위 혹은 어퍼타운 근처라면 어디에서도 보일 만큼 우뚝 솟은 고딕 양식의 쌍둥이 첨탑으로 상징되는 스테판 성당(Cathedral of St. Stephen)은 얼마 남지 않은 캅톨 마을의 유산이다. 화려한 금빛으로 빛나는 성모마리아가 서 있는 성당 앞터에는 목을 한껏 뒤로 젖힌 채 첨탑을 올려다보는 사람들, 자그레브 지도를 꺼내들고 위치를 확인하는 사람들이 서성인다. 무려 105미터에 이르도록 긴 첨탑을 가진 성당은 13세기에 세워졌다. 국민의 85퍼센트가 로마 가톨릭인 크로아티아인들에게 오랜 역사를 지닌 스테판 성당은 단순한 종교적 공간이 아니라 성지인 셈이다. 성당 입구로 들어서면 무려 1천 년 전, 성당을 지을 당시의 상황을 기록해둔 크로아티아의 고대 언어가 아직 선명하게 새겨져 있어 성당의 긴 역사를 말해준다. 제단 앞바닥에는 스테피낙(Kardinal Alojzije Stepinac) 대주교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 비(非) 로마 가톨릭 교도들에 대한 지독한 박해를 가하면서 세계적으로 논쟁의 중심에 섰었지만 그의 사후, 크로아티아인들에게는 정신적 지주로 남은 인물로, 크로아티아 출신의 세계적인 조각가 메슈트로비치(Mestrovic Ivan)는 그를 기리는 의미로 무릎 꿇고 기도하는 스테피낙 주교의 머리를 쓰다듬는 예수의 모습을 대리석에 조각해 성당에 기증하기도 했다.
성당을 나서 앞으로 곧장 걸으면 두 블럭을 채 못가 낮은 노천카페가 늘어선 골목에 닿는다. 중세시대에는 얕은 강이 흐르며 캅톨과 그라덱의 자연 경계가 되었던 곳이 지금은 카페와 레스토랑 골목으로 변모한 것이다. 카페가 늘어선 골목 앞 공터는 그저 휑하게 비어 있지만 아침이면 싱싱한 활기로 가득 찬다.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매일 아침 7시면 공터에 장이 서기 때문. 자그레브에서 가장 유명한 돌락(Dolac) 시장에서는 집에서 직접 만들어다 파는 신선한 치즈에서부터 지중해의 햇살과 아드리아해의 바람을 맞으며 통통하게 과육이 차오른 청포도, 토마토, 오렌지와 갖가지 야채를 사고팔며 자그레브의 아침을 연다.
하나같이 연노란 돌벽의 집에 붉은 지붕을 얹은 어퍼 타운은 얼핏 보면 카페 골목 이쪽이나 저쪽이나 그다지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평범한 농부와 아낙이 살아가던 그라덱 마을은 엄격하고 정숙한 수도자의 마을 캅톨과는 닮은 듯 조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언덕도 높고, 마을 곳곳에서 언덕과 강을 연결하던 돌계단도 곳곳에 숨어 있다. 화려하게 장식된 스테판 성당이 캅톨을 대표한다면, 그라덱 마을에는 멀찍이서도 지붕의 알록달록한 타일이 눈에 들어오는 마르크스 교회(St. Mark's Church)가 있다. 13세기에 지어진 후 지금까지 개보수를 반복하며 스테판 성당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담고 있는 교회는 종교적으로나 그 위치로나 그라덱과 캅톨의 대비를 보여준다. 교회 지붕에 그려진 휘장은 각각 크로아티아가 달마티아(Dalmatia), 슬라보니아(Slavonia), 크로아티아(Croatia)의 세 지역으로 나뉘었던 시절, 그리고 자그레브를 상징하는 문장으로 19세기에 교회를 보수하면서 색색의 화려한 타일로 그 문양을 만들었는데, 복잡한 주변국들과의 관계 속에서 크로아티아라는 이름으로 뭉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마르크스 성당에서 마주 보이는 골목길 한쪽에는 역시 평범한 이들의, 하지만 평범하지 작품을 전시해 둔 미술관(The Croatian Museum of Naive Art)이 있다. 특별히 미술교육을 받았다거나 천재로 소문이 난 유명화가가 아닌, 자그레브와 크로아티아에서 살아가던 농부와 어부 등 평범한 사람들이 그린 그림들이다. 유독 겨울이 배경인 작품이 많은 것도 일년 내내 바쁘게 일하다가 일손이 줄어드는 겨울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그림을 그릴 시간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다 할 교육도 받지 못한 이들이지만, 그들은 그림을 통해 많은 것을 표출하고 담아낸다. 유리 뒷면에 피사체를 반대로 그려낸 그림, 선이나 면, 채색 없이 도트로만 자연과 사람을 표현해 낸 그림, 추상적이거나 정밀하게 사물을 묘사한 그림 등 그저 ‘네이브 아티스트의 작품’이라는 데서 오는 선입견은 미리 버려둘 것. 제한 없이, 그저 마음과 생각을 담아낸 그림은 한층 다양하고 자유롭다.

“엄청났지. 비 오듯 쏟아졌다고.”
늦은 점심을 먹으려고 들렀던 해산물을 파는 작은 레스토랑에서 역시 전쟁에 대해 물었을 때, 파이프를 입에 문 채 쉴 새 없이 연기를 내뿜으며 담배를 피워대던 주인아저씨는 말했다. 불과 10여 년 전, 유고슬라비아로부터의 독립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뤘으면서도 스플리트(Split)에는 그 흔적을 찾기 힘들다. 건물이야 새로 지으면 그만이지만, 표정에는 얼핏 어두운 그림자가 비췄던 자그레브에서와 달리 스플리트 사람들은 마냥 온화하다.
잔잔한 물결이 끊임없이 넘실거리는 아드리아의 푸른 바다와 온기 머금은 햇살 때문이었을까. 이야기를 하는 중간에도 식사를 마친 손님에게 일일이 포옹하며 인사하고, 레스토랑 입구에 손님의 그림자가 비치면 얼른 다가가 “배고프지? 네 명이구만, 저기 앉아.”하며 변죽 좋게 손님을 맞던 레스토랑 주인처럼 스플리트는 어느 틈엔가 전쟁의 상처도 기억도 조금씩 잊어 가고 있었다.

오랜 황제의 도시
크로아티아에서 두 번째로 큰 스플리트의 항구에는 푸른 바다와 대비되며 눈부시게 빛나는 하얀 대리석이 깔린 바닷가의 산책로가 뻗어 있다. 군데군데 야자수가 서 있고 그 뒤편으로 바다를 향하도록 의자를 놓은 노천카페가 길게 늘어선 모습만 보자면 영락없는 어느 바닷가 휴양 도시같지만 스플리트는 전형적인 고대 로마 시가의 모습을 갖춘 곳이다.
그리스도교를 박해하기로 악명 높았던 로마의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 황제가 집권을 끝낸 후, 조용한 말년을 보내기 위한 곳이 스플리트였다. 지중해에서 온화한 바람이 불어오고, 앞으로는 아드리아의 잔잔한 바다가 넘실거리는 스플리트는 그에 딱 맞는 곳이었던 것. 황제는 이탈리아와 그리스에서 들여온 대리석과 스플리트 앞바다의 섬에서 채취한 석회암으로 장장 10년에 걸쳐 스플리트 항구에 궁전(Diocletian's Palace)을 지었다. 바다를 향하는 외벽의 길이가 215미터, 다른 면이 180미터로 궁이라기보다는 요새에 가깝도록 큰 규모로, 현존하는 로마 유적 중 가장 크고 보존 상태가 좋다는 이 궁전은 성문을 중심으로 동쪽은 황제의 거처, 서쪽은 신하들과 군사들의 공간으로 분리되었지만 황제가 죽고 지금에 이르며 궁터 내부에 사람들이 모여살기 시작해 지금은 2천 여 명의 사람들의 거주지가 되었다.
현지인들과 스플리트를 찾는 관광객들이 노천카페에 앉아 느긋한 오후를 보내는 산책로는 18세기에 와서야 매립되었다. 궁이 지어질 당시만 해도 바다에 바싹 붙도록 벽을 세워 바깥 외벽에 파도가 철썩이곤 했었다는데, 지금은 스플리트를 찾는 이들이 관광을 시작하고 끝내는 곳임과 동시에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으로 향하는 정문도 이곳으로 났다. 산책로에 서서 궁의 외벽을 바라보면 로마의 흔적이 느껴지는 둥근 아치창이 군데군데 나 있고, 그 아래로 난 좁은 문으로 들어서면 궁전 내부로 통한다. 황제를 알현하려는 신하나 손님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군사들이 부지런히 오갔을 거리에서 다양한 기념품을 파는 숍으로 변한 아케이드를 따라 곧장 걸으면 메인 스퀘어에 닿는다. 사람들을 모아놓고 황제가 연설을 하거나 인사를 받았을 단좌는 내부로 연결되는데, 둥근 돔지붕은 전쟁을 겪으며 폭격에 파손되어 지금은 그 뚫린 틈으로 파란 하늘이 올려다 보인다. 매년 여름이면 오페라 ‘나부코’가 열린다는데, 철이 지나서인지 4명으로 구성된 아카펠라 그룹이 서서 관광객이 들어올 때마다 절묘한 화음을 이루며 아카펠라 곡을 선보일 뿐이다.
광장을 기준으로 오른쪽의 화려한 성당은 원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영묘였던 곳이다. 화려하고 웅장했던 그의 사후 안식처는 아이러니하게도 중세에 와서 그리스도교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그리스도교를 박해하고 수많은 사람을 사자우리에 던져 넣은 황제의 야멸참에 분개한 크리스천들이 그의 시신은 어디엔가 유기하고 그의 손에 죽음을 맞은 성자들의 모습을 재현해 두었다. 성당 내부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지만, 화려한 프레스코와 대리석으로 만든 설교단, 아름다운 조각품에 관광객들은 기회만 있으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궁전 내부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면서 곳곳에 작은 골목길이 만들어지고, 궁전을 중심으로 스플리트의 중심 시가가 발전한 터라 외곽 부분에는 궁전과 외부의 경계가 모호하다. 아담한 레스토랑과 분위기 좋은 바, 명품숍과 약국까지 궁전 내부에 있다며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곧 외부 광장으로 연결되고, 바다로 이어진다. 궁전의 북문을 향해 걸으면 거대한 청동 조각상 앞에 유독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 자그레브에서 언급되었던 천재 조각가 메슈트로비치의 작품, 그레고리 주교의 조각상(Gregorius of Nin). 동상의 왼쪽 엄지발가락을 만지면 행운이 온다는 얘기 때문에 너도나도 한 번씩 만지고 지나가는 통에 유독 그 발가락만 반질반질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기회를 놓칠 세라, 성큼 앞으로 다가가 발가락을 쥐려니 동상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발가락 한 마디가 손에 꽉 찬다. 발가락을 움켜쥐고 소원을 빌었는지, 행운을 바랬는지 기억이 가물거린다. 소원이건 행운이건 어느 모퉁이에선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그 무엇을 또한번 바래본다.
해 질 무렵, 성당의 종탑으로 올라섰다. 어른 두 명은 절대 함께 오를 수 없을 비좁고 어두운 통로의 가파른 돌계단을 지나 종탑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데 웬걸, 길은 멀고도 가파르다. 그리 단단해 뵈지 않는 손잡이에 의지하고 저 위로 보이는 종탑으로 오르려니 다리가 살짝 떨리고 이마에 식은땀도 쭈뼛. 하지만 계단을 밟을수록 눈 아래로 보이는 스플리트 시가의 붉은 지붕들과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 풍경에 걸음이 빨라진다. 가뿐 숨을 몰아쉬며 마침내 꼭대기에 닿았을 때, 사방으로 난 창을 내려다보려니 눈 닿는 곳마다 포토제닉하다. 아드리아 해를 건너 이탈리아를 오갈 대형 크루즈선이 정박한 항구, 끊임없이 이어지는 빨간 지붕의 물결, 그 지붕 위에 드리우는 종탑의 그림자까지. 황제가 살던 시절의 스플리트도 이렇게 평화롭고 아름다웠을까.

메슈트로비치의 은신처
섹시한 피아니스트 막심 므라비차(Maksim Mrvica), 이종격투기 스타 에밀리아넨코 표도르(Emelianenko Fedor), 또 누구? 최소한 지금까지 그리 친숙하지 않은 나라인 크로아티아와 연결시킬 수 있는 이미지는 그리 많지 않다. 우리에겐 생소하지만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조각가 메슈트로비치(Mestrovic Ivan)는 크로아티아를 대표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아이콘이다. 대부분의 천재들이 사후에야 겨우 진가를 인정받던 것과 달리, 그는 운 좋게도 살아 생전에 이미 세계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유럽과 북미를 오가며 다양한 작품활동을 하고, 그의 이름을 단 전시회도 세계 곳곳에서 개최되었으며, 크로아티아 곳곳에 그의 작품을 남기며 크로아티아인으로서의 존재감과 자부심을 인정받곤 했었다.
그런 그가 말년의 안식처로 정한 곳이 스플리트로,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터를 잡았다. 미켈란젤로가 즐겨 사용했다는 이탈리아산 카라라 대리석을 사용해 만든 현관에 서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나는 푸른 아드리아 해가 정면으로 보이고, 뒤로는 나지막한 언덕이 집을 감싸듯 서 있는 멋진 곳(우리나라의 풍수로 봐도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이다.)에 그리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아하고 운치 있는 2층 주택을 지었지만 안타깝게도 고작 8~9년 살았을 뿐이다. 10년이 채 되지 않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스위스를 거쳐 다시 미국으로 이민한 후 타국에서 생을 마감하며 스플리트와의 인연은 끝나는 듯 싶었지만, 다행히 그걸로 끝은 아니었다. 집은 그의 작품을 전시해 둔 아담한 갤러리로 변모했고, 집 뒤 언덕에서 영면을 취하고 있으니 그와 스플리트와의 긴 인연은 이제 시작되는 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