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acy of History
and Charm
역사의 유산을 만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 중 하나는 프랑스 화가 밀레의 만종이다. 가을걷이를 끝낸 저녁, 고개를 숙인 채 기도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수확을 마친 기쁨과 경건함을 동시에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동안 켜켜이 쌓인 시간의 결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봉화에서도 이런 기쁨을 만날 수 있다. 

중앙고속도로 영주 나들목에서 36번 국도를 타고 봉화에 들어선다. 이미 울긋불긋한 봉화는 가을의 절정을 지나 겨울을 향해 치닫고 있다. 백두산에서 출발한 백두대간의 마루금이 동서로 나뉘다가 비로소 남북으로 갈라지는 이곳은 산세가 주변을 둘러싸 포근한 느낌이다. 전체 면적의 80퍼센트 이상이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산림이 눈 안에 들어온다. 처음 오는 곳인데도 고향에 온 것만 같다.

이몽룡의 러브스토리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경북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 301번지, 이몽룡의 모델이 된 인물이 살았다는 계서당이 보인다. 계서당 앞 논에서는 누렇게 익어가는 벼의 추수가 한창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마치 물결처럼 흐르는 것만 같다. 쌀이 나무에서 자라는 것으로 안다는 요즘 아이들보다는 낫겠지만, 실제로 나도 추수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낯선 기분이다. 곳곳에 널어놓은 낱알들이 햇빛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고, 계서당 옆에 선 감나무에서는 감이 익어간다. 채 다 따지 못한 감들이 까치밥으로 붉게 남아 있는 이곳 한편에는 감을 깎아서 널어두었는데, 볕과 바람 속에서 마른 감이 달콤한 곶감이 될 것을 생각하니 침이 고인다. 근처의 사과밭에서 붉게 익은 사과를 기웃거리고 있자니, 인심 좋은 주인이 하나 따서 건네준다. 그리고 정보도 하나 얻었는데, 붉은 봉지를 씌워 새빨간 사과는 햇빛을 받아 단맛이 덜하다는 것. 내가 받았던 사과는 봉지를 씌우지 않아 붉은 빛은 덜했지만 아삭아삭하고 단 것이, 평소에 사먹던 것보다 훨씬 맛이 좋았다.
사과를 아작아작 깨물어 먹으며 계서당의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선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계서 성이성(溪書 成以性) 선생이 기거하며 문중 자제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과거의 모습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어사 출두를 외치기 직전 읊었던, 그 유명한 ‘금준미주는 천인혈이요, 옥반가효는 만성고(금잔에 담긴 향기로운 술은 천 사람의 피를 뽑아 만들었고, 옥쟁반에 담긴 맛 좋은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을 짜서 만들었다)’라는 내용의 시가 바로 성이성 선생이 지은 시라고 한다. 이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었는데, 1999년에 연세대학교의 설선경 교수가 ‘이몽룡의 러브스토리’라는 연구논문을 발표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그쯤 되니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머나먼 남원과 봉화의 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수수께끼는 성이성의 아버지 성안의를 추적하면 금방 풀린다. 성안의가 선조 40년부터 광해 3년까지 5년간 남원부사로 재직한 것. 덕분에 성이성은 13살부터 17살까지 아버지와 남원에 머물다가 떠난 부분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팔청춘이었던 16살에 춘향을 만나 사랑을 나누던 이몽룡도 이듬해 아버지가 동부승지로 임명되어 눈물의 이별을 겪었다는 부분이다. 물론 이몽룡은 22살에, 성이성은 33세에 과거에 급제했다는 차이점은 있지만 성이성 역시 암행어사가 되었다는 공통점도 있다. 성이성의 묘비에는 그가 남원에서 귀신이 나오는 문제를 해결하는 기록이 있다고 하는데, 일설에 따르면 그의 옛사랑이었던 기생이 처녀로 자결했으며 그 혼백이 심술을 부려 위령문과 살풀이굿으로 달랬다고 한다.
중요민속자료 제 171호인 계서당은 정면 7칸, 측면 6칸의 ㅁ자형 구조다. 재미있는 것은 정자마루 끝에 간이 소변기가 설치된 것.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 높은 계단을 오르내리기 힘든 까닭에, 정자에 서서도 볼일을 볼 수 있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들을 들려준 건 행랑채에서 일하고 계시던 종부(宗婦) 분이셨는데, 이야기를 마칠 무렵 마당의 감나무에서 감을 하나 따서 손에 쥐어주신다. 덕분에 말랑하고 달콤한 홍시를 들고 대문을 나섰다.

부석사의 큰 집, 축서사
그렇지만 아직 부족한 느낌이 든다. 맑은 공기 덕분일까, 아니면 진작부터 풍문으로 접했던 봉화 송이에 대한 기대감 때문일까(결코 내가 먹보라서가 아니다)? 봉화에 왔는데 송이도 먹어보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봉화의 임야 중 절반 이상에서 매년 80톤 가량 생산되는 송이는 맛과 향이 뛰어나 국내 뿐 아니라 일본에까지 그 명성이 드높다. 내가 맛본 송이 돌솥 한정식은 사골국물에 백미와 잡곡을 넣고 밥을 짓다가 송이를 넣고 뜸을 들인 것인데, 돌솥의 뚜껑을 여는 순간 얼굴에 와 닿는 송이의 향에 금방이라도 취할 것 같다. 함께 나오는 산채는 절반 이상이 이름을 모르는 것들이지만, 담백하고 깊은 맛이 입맛을 돋운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한 축서사를 오른다. 소백산과 태백산이 만나 능선을 이루는 곳에 위치한 축서사의 독수리 축(鷲)자, 깃들었다는 뜻의 서(棲)자를 쓴다. 독수리는 지혜를 뜻하며, 이는 큰 지혜를 가진 문수보살을 뜻한다고. 의상대사가 꿈에서 청량산 문수보살을 본 후 지은 절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이곳은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세우기 3년 전에 지어졌는데, 이런 이유로 흔히 축서사를 ‘부석사의 큰집’이라고 부른다.
높다란 계단을 올라 절 안으로 들어서니 제일 먼저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모셔두었다는 탑이 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탑의 옆에 마치 장식처럼 커다란 말벌집이 있다는 것. 너무 자연스러워 얼핏 보면 이상한 것을 느끼지 못하고 지나칠 정도다. 참배객 몇은 벌에 쏘일까 겁을 내는 눈치고, 실제로 우리 일상에서 벌 한 마리만 발견해도 잡으려고 혈안이 되는 것을 감안하면 절 한가운데에 그대로 놓아둔 벌집은 파격적이다. 작은 미물 하나도 죽이지 말고 소중하게 여기라는 부처의 가르침 덕분에 가능한 풍경이 아닐까?
아름다운 단청과 꽃무늬의 창살을 바라보며 정신없이 구경하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춘다. 신라시대에 세워진 절이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너무 밝고 선명한 색채 탓이다. 지나가는 스님께 여쭈니, 이는 조선조 말기 을사보호늑약과 정미7조약 사건 당시의 이야기를 해 주신다. 전국적으로 의병이 무장 봉기하여 항일 투쟁할 때 일제가 의병을 토벌하기 위해 방화했기 때문이란다. 터만 남았던 축서사가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현 축서사 주지인 무여스님 덕분인데, 물려받은 사재를 털어 1999년에 개보수했다. 시간의 흔적을 느낄 수 없음이 안타깝지만, 보광전 앞에 고려시대 초기에 세워진 석등이 아직 남아 있어 적이 위안이 된다.
사실 이외에도 불탄 문화재를 꼽자면 손가락이 모자란다. 가장 가까운 예로 얼마 전 방화에 소실된 숭례문을 들 수 있을텐데 이 숭례문을 포함한 문화재들을 복구할 때 사용하는 것이 금강송이다. 금강소나무의 금강은 다이아몬드를 일컫는 금강석과 같은 말인데, 그만큼 단단하다는 의미다. 금강송은 일반 소나무에 비해 강도가 세고, 송진이 골고루 분포되어 잘 부패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금강송이 목재로 쓸 만큼 자라기 위해서는 150년이나 필요하다. 봉화 서벽리에 이 금강소나무들이 자라는 군락지가 있다고 해서 방문해 보았다. 산으로 들어서자 서늘한 솔향이 가슴을 채운다. 천천히 올라가다보니 소나무를 이용한 기념품을 직접 만들어갈 수 있는 체험장도 마련되어 있다. 거기서부터 50분 정도를 걷는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는데, 산세가 급하지 않고 완만해서 산을 타는 것이 익숙지 않은 사람들도 그리 힘들지 않을 것 같다. 군락지에 조성된 나무들은 한 그루당 수백만 원을 호가한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나무마다 노란 페인트로 번호가 매겨져 있다. 이 나무들이 자라면 언젠가 망가진 문화재들을 고치는 귀한 재료로 쓰이겠지. 단단한 소나무의 껍질을 더듬으며 이것이 언젠가 또 다른 숭례문의 일부가 되길 기원해본다. 물론, 이 나무를 베어 수리할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더 크다.

시간의 결실을 수확하다
청량산에 올라가기 전, 언뜻 산을 보니 “죽겠구나.” 소리가 절로 나온다. 열두 개의 바위 봉우리가 얽히고설킨 산세가 험하게만 느껴져서다. 등산화가 아닌 운동화 차림인 것도 마음에 걸려, 가지 말까 하는 마음이 슬그머니 생긴다. 변명을 하자면, 갑자기 안개가 자욱이 끼고 보슬비도 오락가락하는 날씨라 낙엽이 젖어 미끄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먼저 올라갔다가 내려온 등산객 한 명이 “안 가면 일 년은 후회할 만큼 아름답다”고 말해준 덕분에 마음을 다잡는다. 역시, 초반에는 쉽지 않다. 나무계단을 오르고 나자 경사가 심한 골짜기가 나왔고 그 골짜기 길의 한쪽은 낭떠러지라서 조금만 한눈을 팔아도 큰일 날 것 같다. 하지만 가팔랐던 것은 초반 뿐, 점점 산세가 완만해진다. 골짜기에 어린 안개가 마치 산 사이에 흐르는 부드러운 강 같다. 이러니 청량사에 작은 금강산이라는 뜻의 ‘소금강’이라는 별칭이 있겠지 싶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등산로의 나뭇가지마다 걸려 있는 리본들이다. 각종 산악회의 이름이 적힌 이 리본들은 앞서 가는 이들이 길을 표시하기 위해 걸어두는 것인데, 실은 마지막으로 오는 사람이 수거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부러 그런 것인지, 가지마다 걸린 리본이 풍경 속에 잡음처럼 섞여 있다. 보다 못해 눈에 띄는 것마다 걷어냈을 뿐인데 금방 옷 주머니가 가득 찬다.
슬슬 목이 마르다 싶을 무렵, 먼발치에 민가가 보여 다가가보니 ‘산꾼의 집’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대한민국 달마도 명장 1호라는 이대실 씨가 운영하는 곳으로, 쉬면서 무료로 약차를 마실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쉼터다. 안에 들어서자 이대호 씨와 사람들이 환담을 나누고 있어 아는 사이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그곳에서 처음 만난 사이라고. 따뜻한 차 한 잔과 편안한 의자가 있어 누구나 다 가까워질 수 있는 것 같다. 나 역시 잠시 수다를 즐기며 달마도 몇 개를 구경한 뒤, 내가 마신 찻잔을 씻어놓고 나온다. 이곳에서는 제가 마신 찻잔은 자신이 씻어야하기 때문이다. 물론 찻잔 뿐 아니라 인생이 그렇다. 제가 뿌린 씨는 제가 거두는 것이 순리 아닐까.
산꾼의 집에서 청량사는 별로 멀지 않다. 절 어귀에 도착하니 앞에서 만났던 등산객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알겠다. 일 년을 후회하다니,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을 후회하게 될텐데! 산 속에 숨어서 얼굴을 내민 청량사는 일견 수줍고, 일견 의젓하다. 이곳은 풍수지리로 보았을 때 길지중의 길지인데, 열두 개의 봉우리가 연꽃잎처럼 청량사를 감싸고 있고 절은 꽃의 수술 자리에 위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풍수지리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 없는 나지만 길지라는 말에는 아무런 이견이 없다.
약사여래를 모신 청량사의 유리보전은 나지막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 같은 수줍은 모습이다. 법당 앞이 절벽이라 조금 아슬아슬한 느낌도 들지만, 시야를 막는 것 없이 앞이 훤히 트여 있어 청량산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이곳에서 조금 더 기운을 내 하늘다리까지 올라가본다. 봉화군에서 올해 5월 9일에 완공한 이 다리는 해발 800미터에 위치한 90미터 길이의 다리로, 가장 길고 높다고 한다.
안개에 묻힌 청량산과 멀리 보이는 산자락, 봉화를 여행하면서 보았던 수많은 유적지들을 생각해보니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오랫동안 쌓아온 시간의 결실을 수확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농부들이 땀 흘려 지은 농작물처럼, 오랜 시간 동안 아끼고 가꾼 사람들의 흔적들. 언젠가 태어날 우리의 후손까지 포함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수확물을 함께 나누었으면. 바람을 안고 천천히, 청량산을 내려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