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gentina
부유한 영혼들의 레콜레타

군데군데 야자수가 서 있고 초록 잔디가 펼쳐진 야트막한 언덕에는 젊은이들이 동그랗게 모여 앉아 있고, 인근 카페에는 커피 한 잔 시켜놓고 노트북을 들여다보는 젊은이, 바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배낭여행객들이 보인다. 11월, 초여름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어느 상쾌한 토요일 저녁,  레콜레타 묘지공원 주위의 풍경이다.  

1967년에 콜레라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강타한 이후, 1971년에 또한번 황열병이 휩쓸면서 산텔모 지역의 부자들은 좀 더 살기 좋고 깨끗한 주거지를 원했다. 그들이 찾아낸 곳이 바로 도시 북쪽의 레콜레타(Recoleta), 팔레르모(Palerma) 지역이었고, 곧바로 이곳으로 이주했다. 이후 지금까지 번성하고 있는 레콜레타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남미의 파리’라는 애칭을 붙여준 프랑스풍의 옛 저택이 즐비하고, 에비타의 묘가 있어서 유명한 레콜레타 묘지와 국립 도서관,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성 필라르 성당, 부에노스아이레스 최고의 전시장으로 손꼽히는 레콜레타 문화센터와 그 앞 잔디밭에서 일요일 오전 10시부터 해질 때까지 열리는 수공예품 벼룩시장, 쇼핑센터, 세계 고급 브랜드들의 매장, 멀티플렉스 극장과 유명한 식당들까지 모두 모여 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최고의 관광지역인 동시에 부유층이 주거하는 지역이다.
1882년에 만들어진 레콜레타 묘지(Cementerio de la Recol eta)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가장 오래된 묘지로 우리에게 영화로 잘 알려진 에비타(Evita)를 비롯해 전직 대통령 등 아르헨티나의 유명인사들이 가족과 함께 묻혀 있다. 묘지의 주인들은 그 묘지를 자신의 영혼이 살 집으로 생각해 각자 최고의 건축가들에게 설계를 맡겼고, 모든 무덤들은 각각의 개성을 가진 작은 저택처럼 설계되어 있다. 계획적으로 잘 정비된 묘지 사이의 길을 걷다 보면 마치 소인국의 도시를 거니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묘지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역시 에비타의 묘. 입구에서 안내지도를 받아서 찾아도 되지만 에비타의 묘는 굳이 지도를 볼 필요도 없다. 많은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그녀에게로 향하기에, 유난히 꽃이 많거나 사람들이 모여 웅성대는 곳이 있다면 바로 그녀의 묘일 것이다. 외국인들은 익히 알려져 있는 그녀의 선행에 반해 그녀를 찾는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에비타는 아르헨티나 빈민들의 영웅이고 실제 아르헨티나 중산층 중에는 그녀를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녀의 선행(가난한 국민들에게 돈을 나누어주는 등) 때문에 공짜의식에 젖어 사람들이 지금껏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 실제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가장 번화한 거리에 절대 빠지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구걸하는 이들이다. 6개월은 못 씻고, 못 먹은듯한 얼굴로 구걸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간혹 잘 차려입은 사람이나 어린 아이들도 있고, 하나같이들 태도가 아주 당당하다. 마치 내가 당신에게 구걸을 하고, 당신은 나를 도와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전문직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과거에 에비타가 그들의 버릇을 잘못 들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아르헨티나 중산층들 사이에 퍼져 있다.
또한 여기 개성 있는 묘가 하나 있다. 다비드 아셰노(David Alle no), 이 사람은 이탈리아 출신 이민자이자 묘지의 야간 경비원이었다. 처음부터 너무나 이곳에서 일하고 싶어 했고, 그 후에는 자신도 이 묘지에 묻히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 되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한 돈을 모아 이 곳에 자신의 묘지터를 사고는 고향인 이탈리아로 돌아가 근사한 비석을 만들어 줄 사람을 찾았다. 모든 일이 착착 진행되어 더 이상 그가 할 일은 없었고, 그러자 1910년에  돌연히 자살하여 이곳에 묻힌 것 이다. 생전에 가난한 이민자였을 다비드. 유령이 되어서는 가장 부유한 친구들과 함께 생의 다음을 즐기고 있을까? 아니면 저 생에서도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밤새 묘지를 지키는 유령이 되어 있는 것일까? 아, 혹시 누군가 이 묘지에 묻히고 싶은 소원이 생겼다면 당장 접을 것을 권한다. 안타깝게도 당시에 비해 훨씬 비싸진 이곳은 아마 월급을 백년쯤 모은다고 해도 사기 힘들 것이다. 이미 만원이기도 하고.
레콜레타 묘지 관람을 마치면 입구 왼쪽의 필라르 성당과 레콜레타 문화센터를 둘러보거나 그 앞에 펼쳐진 잔디공원의 벼룩시장에 가보자. 그곳에는 타로 점을 보는 사람들, 전위 아티스트들의 크고 작은 공연이나 음악 공연들이 상시로 열린다. 왼쪽으로 더 내려가면 ‘부에노스아이레스 디자인’이라는 이름의 생활용품 및 가구 등을 파는 디자인 쇼핑몰이 있고, 쇼핑몰 앞에 늘어선 식당들의 야외 테라스에서는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선탠을 하기 좋다.
저녁이 되면 묘지를 둘러싼 성벽 바깥에 위치한 수많은 식당들과 바, 극장, 클럽의 불이 환하게 밝는다. 아르헨티노들은 보통 밤 11시쯤에 저녁식사를 하기 때문에 그 무렵에는 근처의 모든 식당들이 가득 차고, 밤새 지치지도 않고 먹고 마시고 이야기한다. 주말 밤에는 정말 자리를 잡기가 힘들고, 예약을 안 해서 자리를 잡지 못했거나 클럽의 오픈시간(보통 자정~2시)을 기다리는 젊은이들은 근처 프란시아 광장의 풀밭에 드러누워 맥주를 마신다.
자, 올해의 연말은 따뜻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레콜레타 잔디에 누워서 보내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