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arm embrace
of Europe
찬란한 문명이 숨 쉬는 크레타

부침을 거듭한 그리스 민족의 운명과 그들의 천재성이 발휘된 다양한 예술로 가득 찬 그리스, 그리고 서양문명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섬 크레타. 진한 과거의 흔적과 더불어 유럽 특유의 아기자기한 면면을 고스란히 간직한 신화의 섬, 크레타로 떠나보자.   

여기는 해지는 피레우스 항, 나는 드디어 크레타로 떠난다. 왠지 모를 미묘한 흥분이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일고 있었다. 이제야 미노아 문명의 허망한 폐허를 두 발로 밟게 되는구나 싶었다. 내일 아침 눈을 뜨면 크레타의 수도 헤라클리온에 닿아 있을 것이다.
제주도 면적의 4.5배에 달하는 크레타는 그리스의 최남단에 자리 잡은 화산섬이다. 이는 지중해에서 프랑스령인 코르시카 다음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큰 섬으로, 유럽 최초의 문명이라 일컬어지는 미노아 문명과 함께 에게 문명이 시작된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크레타는 그리스의 위대하고도 위대한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나고 자라 그의 대표작 ‘그리스인 조르바’의 무대가 된 곳으로, 지금까지 그가 소설에서 무한하게 뿜어낸 주옥같은 글귀를 곱씹으러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크레타는 그리스 신화에서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 섬은 제우스가 태어난 섬인 동시에 헤라클레스와 테세우스가 싸워 물리친 황소의 섬이며, 법률과 예술의 고향이다. 또한 해적과 위선자들의 본고장이었으며, 정의의 고향이자 당당하고 격렬한 힘의 고향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올림포스 신들의 제왕인 제우스의 불륜의 사랑 이야기들과 연관되어 있기도, 미노스왕의 그것과도 연관되어 있다. 미노스는 제우스와 에우로파 사이에서 태어난 전설적인 인물이다. 이처럼 그 옛날 전설에서나 존재하는 섬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리둥절한데, 그런 곳에서 현재를 꿋꿋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역시 신비하게 다가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은 신화의 섬이지만, 사람이 사는 섬이다.

여행의 시작, 헤라클리온
헤라클리온(Heraklion)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라클리온은 크레타의 정치, 경제의 중심지이자 가장 큰 항구이기도 하다. 현대적인 모습과 17세기에 건립된 옛 요새가 어울려 조화를 이루고 있고 좁은 골목길, 넓은 광장, 그리고 좁고 구불구불한 산책로들이 섞여 있어 나름대로의 매력을 지닌 도시다. 무엇보다 공항과 항만 시설이 자리 잡고 있어 이곳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는 크레타 여행의 출발점 역할을 하는 곳이 바로 헤라클리온이다.
헤라클리온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도시 이름은 그리스 신화의 ‘헤라클레스’에서 유래했는데,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저주를 받아 미노스 왕국을 파괴하려는 황소를 잠재우기 위해 헤라클레스가 크레타 섬에 첫발을 내디딘 곳이 바로 이곳이다.
에게 해의 중앙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로 무수한 전쟁이 치러진 크레타의 외세 침략을 막아낸 쿨레즈 요새(The Koules Fortress)는 항구에 들어서자마자 한눈에 눈길을 끄는 곳이다. 13세기에 베네치안 공화국 점령 당시 그들이 건설했지만 베네치아가 물러나고 터키가 지배하던 시절에는 반란군들을 수감하는 감옥으로도 쓰였단다. 육중한 바위로 견고하게 만들어진 요새지만, 높은 파도에 의해 건장한 청년 2~3배 높이의 물보라가 거세게 부딪히는 성벽에서는 그 옛날 오스만투르크의 엄청난 병력과 대포를 견뎌낸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듯 했다. 하지만 푸르른 바다와 구름 낀 지중해 의 하늘, 그것들로 왠지 운치까지 느껴지는 어선들로 어우러진 오늘날의 요새에서는 야외 공연이 이루어진다니 누군들 놀랍지 않을 수 있을까. 한가로이 낚시를 하며 안빅낙도의 삶을 즐기고 있는 현재의 크레타 사람들로부터 나는, 그 모든 아픔을 거뜬히 이겨낸 여유로운 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야외 카페가 많고 서점과 신문 가판대 등도 몇몇 자리 잡고 있는 자유의 광장(Platia Eleftherias)과 엘 베니젤루 광장(Platia El Venizelou), 그리고 유명 보석상과 성상화 등을 파는 기념품점과 레스토랑이 밀집되어 있는 데달루 거리(Odos Dedalou) 등을 제외하면 헤라클리온까지 와서 꼭 가보아야 할 곳은 크레타 문명의 역사 전체를 살펴볼 수 있는 크노소스 유적지라 할 수 있다. 이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이어받아 미노아 문명을 꽃피운 유럽 문화의 발상지다.
하지만 크노소스 성에 간다면, 꼭 가이드와 동행할 것을 신신당부하는 바이다(당신이 영어를 못 알아듣는다 할지라도 반드시!). 이는 세계 어느 곳을 가든 마찬가지겠지만 그곳에 깃든 스토리를 듣지 않은 채 유적지를 둘러본다면 개인이 철저히 예습해 오지 않은 이상 그저 돌무더기 보는 것에 지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사라져버린 제국
미노아 문명의 핵심인 미노스 왕의 크노소스 궁전은 기원전 17세기에 세워졌는데, 1900년대에 영국의 아서 에번스(Arthur Evans)가 발굴했으며 복잡한 구조로 인해 미노타우로스와 테세우스의 신화로 우리에게 미궁으로 알려져 있는 궁전이기도 하다.
우리에겐 다소 낯선 문화지만 서양인들이 크레타에서 발견한 유물들에 열광하는 것은, 그것들로부터 실재하는 고대 문화의 이상적이고 친근한 이미지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고고학자들은 크레타에서 사라진 문명, 역사가 되어버린 전설, 땅 속에 묻혀 있던 보물 등 모험 소설에서나 어울릴 만한 경이로운 것들을 속속 발견해냈다. 인류 역사에서 태평성대를 이루며 일상용품도 예술작품이던 세계, 크노소스는 에번스에 의해 부활되어 아르누보가 주창하는 바에 화답하게 된다. 사실 애초에 미노스의 궁에 관심을 갖고 있던 사람은 트로이를 발굴한 독일인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 mann)이었다. 하지만 그가 갑작스럽게 죽는 바람에 크노소스 발굴의 영광은 에번스에게 돌아간 것. 사실 에번스의 크노소스 발굴은 고고학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그는 미지의 세계를 발견하고 그 세계에 대한 역사적 분석을 했다. 그는 크레타의 크노소스와 다른 지역에서 발견된 그림들을 참고로 하여 고고학자들이 그 섬에서 찾아낸 폐허를 되살려냈다.
사실 욕심 많은 에번스가 작위적으로 복원해낸 구조물들도 있다지만 그저 무심하게 서 있는  돌덩이가 수천 년 세월의 풍상을 견디어 낸 돌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남다른 감회가 전해져 오는 것 같기는 했다. 크노소스 궁전은 18세기에 꽃핀 미노아 문명의 화려한 건축물을 증명할 뿐 아니라 20세기 초의 고고한 수준도 동시에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수많은 이유로 유러피언에겐 꿈의 관광지로 여겨지는 크레타. 고대의 신비스러움을 고스란히 간직했지만 그 찬란한 문명에 겸손히 한가로운 낯빛을 내비치는 크레타는 거리에 어스름이 고요히 내리고 나면 아이러니하게도 옷깃 속 깊이 감추어둔 또 하나의 모습을 드러내고 만다. 그것은 자정이 지나서야 시작하는 그리스의 뜨거운 나이트라이프 때문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번 여행 후 나는 크레타를 야누스의 매력을 가진 도시로 여기게 됐다. 외모면 외모, 공부면 공부 그 어느 것 하나 빠질 것이 없어 내심 질투를 불러일으키게 했던 학창 시절의 그 아이, 크레타는 마치 그 완벽했던 내 친구를 떠오르게 하는 도시다.

정오의 태양이 뼈마디까지 즐겁게 했다. 바다 역시 태양 아래서 느긋하게 몸을 덥히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옅은 안개에 싸인 크레타는 바다 위로 불쑥 튀어나와 물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