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p to Moravia
모라비아에 새겨진 보헤미안의 흔적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합쳐 체코슬로바키아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에서 살았던 체코는 지금, 엄연히 ‘체코’로 존재한다. 옛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문화와 사람이 한데 섞인 곳에서. 서로 뿌리가 달랐던 두 지역을 체코라는 하나의 이름아래 모이게 한데는 체코인들의 정신적인 줄기가 되는 종교의 힘이 컸다.

종교 얘기는 어렵다. 알게 모르게 믿음과 맹신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할 수도 있기에, 그리고 얕은 지식으로 섣불리 거론했다가는 그 동기와 상관없이 두세 배 큰 철퇴를 맞을 위험 역시 농후하기에, 공개 석상에서는 물론이고 가까운 이들과의 커뮤니티 내에서도 심오한 종교 이야기는 기피 소재 1순위에 빛난다. 그만큼 가시방석에 앉았다는 것이 지금 기자의 입장이다. 곡절 많고 구구절절한 역사를 안은 체코를 이야기 하려면 반드시 언급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 난해한 ‘종교’다. 글줄을 읽는 이들의 머릿속에서 종교를 줄기로 체코의 역사가 자연스레 그려지도록, 그리고 지극히 중립적인 입장에서 이야기 하려면 어느 정도가 적정선인지 무교인 기자에게는 난해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역사가 된 보헤미안  한참을 고심하다 내린 결론은 체코의 국민적 영웅으로 숭배되는 어느 성직자의 이야기에서 출발하자는 것이다. 얀 후스(Jan Hus). 절대적이었던 교황의 권위와 부패한 기독교에 대항하려는 움직임이 유럽 대륙에 꿈틀대던 14세기를 살았던 그는 그야말로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가 정말 불꽃 속에서 최후를 맞은 종교개혁가였다.
약간 길쭉한 나뭇잎, 또는 한쪽이 더 굵은 고구마같이 생긴 체코는 서쪽의 보헤미아(Bohemia)와 동쪽의 모라비아(Moravia)로 문화의 줄기가 나뉘는데, 따지자면 그는 보헤미안이다. 보헤미아의 농가에서 태어나 프라하 대학에 진학한 이후, 영국에서 유학하며 진보적인 종교개혁가였던 존 위클리프를 만난다. 그리고 ‘성경을 상류층과 지식인만의 전유물로 둘 것이 아니라, 각국의 다양한 언어로 번역하여 누구라도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자’라는 존 위클리프의 참신한 주장은 체코 청년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신학공부를 시작했지만, 진정한 신학자로 변모하는 것도 이 무렵부터다.
체코로 돌아온 그는 흔들리는 교회를 바로잡자는 요지의 교회 개혁과 사회윤리를 강조하는 한편, 체코어 철자법을 개량해 성서를 체코어로 번역했다. 일반인들에게도 찬송가를 보급하려던 그의 시도는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으며 체코의 대표적 종교가의 얼굴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교황청의 획기적이고 야심 찬 프로젝트였던 ‘면죄부 판매’에 까지 비난이 미치자 교회의 눈엣가시가 되었다가 결국  화형당하며 불꽃 속에서 삶을 마감했다.

모라비아, 아래서 볼까 옆에서 볼까? 하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가 끝이 아니다. 시대보다 너무 진보했던 이는 허무하게 갔지만, 잔잔한 수면에 그가 던진 돌멩이 하나는 큰 파문이 되어 다시 물가로 돌아온 것이다. 후스의 후계자들과 교회 간의 다툼은 ‘후스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무려 15년간 계속되었고, 결국 유럽 최초로 종교의 자유를 법으로 인정받았다. 그의 파동은 독일로 건너가 또 한 명의 진보적 종교인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는데 불쏘시개 역할을 했고, 서양 문명을 지탱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로만 가톨릭으로부터 체코인이 비교적 자유로운 현재 체코의 모습을 통해서도 교회로 향하는 문턱을 낮추려 노력한 후스의 영향을 배제할 수는 없다. 체코인들의 종교 성향을 보면 로만 가톨릭이 40퍼센트가량, 기독교와 후스파의 비율을 합해도 채 7퍼센트가 넘지 않으니 절반 이상이 무교다. 그럼에도 오늘날까지 후스가 국민적인 영웅으로 추대받는 것은 그가 미친 정신적 영향력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암시한다.
학창시절 사회책에 단골로 등장하던 중세 종교계의 스타, 루터와 에라스무스에 비하면 무명에 가까운 얀 후스의 비중이 이 기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가 체코인이기 때문. 그런데 이야기를 시작하며 그가 보헤미안이라 언급한 걸 기억하시는지. 수도 프라하가 체코에서는 서쪽, 따지자면 보헤미아의 영역에 있으니 체코 역사상 굵직한 사건의 배경이 되는 것은 주로 보헤미아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체코인들이 뽑는 기념비적인 성지는 올로모츠, 벨레라드 등 모라비아 지역에 흩어져 있다.
그중 가장 주목받는 곳은 체코에서 5번째 큰 도시이자 10세기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 모라비아왕국의 수도였던 올로모츠(Olomouc)로 후스전쟁 때 가톨릭군이 점거한 도시였었다. 곡절 많은 체코의 근대사를 지나오며 도시가 거의 황폐해졌었지만, 그래도 체코에서는 프라하 다음으로 많은 역사적 조형물과 건축물이 남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체코의 성지를 찾아 올로모츠로 향하는 이들의 발걸음은 호로니 광장(Horoni Namesti)의 삼위일체 상 앞에서 멈춘다. 모라비아 출신의 예술가들과 장인들이 합심해서 대천사 가브리엘과 후스 전쟁 때 순교한 성인들의 모습을 조각하고 그리고 성서를 토대로 만든 이 석주는 중부와 동부 유럽을 통틀어 가장 웅장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올로모츠에서 그리 멀지 않은 벨레라드(Velehrad)는 슬라브 풍의 평범한 소도시이다. 하지만 체코인들에게, 특히 후스파 사람들에게 벨레라드는 조금 특별하다. 성 시릴(St. Cyril)과 성 메소디우스(St. Methodius) 형제를 모시는 성당이 이곳에 있기 때문. 세계 곳곳에 수많은 교회와 성당이 있고, 그보다 많은 성인의 이야기와 자취가 전설처럼 남아 있지만, 성 시릴과 메소디우스는 후스와 비슷한 맥락의 성인들이다. 후스가 태어나기도 전, 9세기를 살았던 형제는 모라비아의 슬라브 민족을 선교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그저 짐을 챙겨서 떠나고 말았을 것을,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던 시릴은 슬라브어 철자를 만들고, 어렵게 교황의 허가를 받아 성경을 모라비아어로 번역했다. 하지만 모라비아로 떠나기도 전에 그는 죽음을 맞았고, 메소디우스와 그를 따르는 이들이 선교활동을 벌였지만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 했다. 헛된 듯하던 형제의 노력이 결실을 본 것은 엉뚱하게도 이웃나라 불가리아에서였다. 기독교인이었던 불가리아의 군주는 기꺼이 그들을 받아들였고, 선교방법을 개량한 일행은 키릴의 철자를 불가리아어에 적용해 불가리아는 슬라브족 기독교의 중심지로까지 거듭났다. 형제의 노력이 꽃피지는 못했지만, 모라비안을 위한 그들의 노력을 기리고자 세운 성당이 바로 이곳, 벨레라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