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York
뉴욕, 태평양만큼의 그리움

여행을 하다 보면 ‘언젠가 꼭 이곳에 다시 오고야 말겠다’는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경치가 좋아서, 혹은 음식이 맛있어서, 아니면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에게 뉴욕은 ‘그저’ 다시 가야 하는 곳이었다. 2006년 가을, 처음 뉴욕 여행을 갔을 때 그곳에 너무 큰 걸 놓고 왔기 때문이다. 2년 반의 시간 동안 태평양을 사이에 둔 그 물리적 거리와 깊이만큼 얼마나 그곳을 그리워했던가.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그곳에서 난 무얼 찾으려고 또 다시 짐을 꾸렸는지 또 한번의 여행을 다녀온 지금에야 그 답을 알 것 같다.

서울은 봄이 한창 깊어 날씨가 조금씩 더워지고 있을 무렵, 뉴욕은 여전히 쌀쌀했다. 옷 가게마다 쇼윈도에는 얇고 가벼운 옷들이 전시되어 있었지만 바람도 많이 불고 간간이 비까지 뿌려대는 덕분에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감기에 걸려 고생을 해야 했다. 하지만 오는 봄을 누가 막겠는가. 맨해튼 곳곳에는 목련과 벚꽃, 튤립까지 봄을 알리는 전령사들이 저마다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맨해튼에는 센트럴 파크는 말 할 것도 없고 브라이언트 파크나 메디슨스퀘어 파크 등 슬슬 걸으며 구경할 수 있는 크고 작은 공원을 자주 만나게 된다. 따뜻한 커피 한잔만 있으면 그저 벤치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하고 떨어지는 꽃잎에 감탄하며 고개 들면 보이는 파란 하늘에 누구나 위로 받을 수 있다. 특히 내가 묵었던 숙소와 가까운 브라이언트 파크 한 켠에는 책과 잡지, 신문이 구비되어 있고 테이블도 따로 마련된 리딩 룸이 마련되어 있어 잔디로 바닥을 깔고 하늘을 천장 삼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도서관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유쾌한 예술가들을 수없이 만날 수 있는 곳도 바로 공원이다. 바이올린이나 색소폰 같은 악기부터 몸을 무기로 나온 아크로바틱 댄스팀까지! 주머니 가벼운 여행자에게도 1달러짜리 지폐를 꺼낼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실력파 예술가들은 공원을 무대 삼아 사람들에게 여유와 즐거움을 나눠주고 있었다.
차도 많고 사람도 많아 눈 감으면 코 베어 갈 것 같은(!) 대도시 뉴욕, 그런 점에선 서울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길이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어 블록을 하나하나 지나며 걷는 산책이 하루 종일 가능하고, 걷다 지칠 즈음이면 다리를 쉬게 하는 공원이 나타나기에 뉴욕은 낯선 여행자를 따뜻하게 보듬어준다. 어퍼이스트사이드의 우아함도, 소호의 시끌벅적함도, 이스트빌리지의 이국적인 분위기도 쉬어갈 수 있는 공원이 있기에 더욱 빛난다는 걸 맨해튼을 걸어본 사람이라면 아마도 동감하리라. 서울에도 이런 공원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여행 내내 부러움 반 아쉬움 반의 마음으로 공원을 걸었다.

비 오는 날의 그림을 좋아하세요?
아무래도 비가 오는 날은 바깥에서 보내는 것보다 안에서 바깥을 구경하는 것이 더 낭만적이다. 그 곁에 아름다운 그림이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순 없겠지! 지난 번 뉴욕 여행 때도 메트로폴리탄 박물관과 뉴욕현대미술관(MOMA)을 비롯, 크고 작은 갤러리를 돌아봤는데 그때 느낀 감동을 잊을 수가 없어 비 오는 날엔 미술관을 찾았다. 우선 뉴요커들이 자랑하고 사랑하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일명 ‘MET'. 메트는 너무나 방대한 컬렉션이라 사실 한두 번 가서는 봤다고 말하는 것도 민망하다. 1층부터 차례대로 모든 작품을 한꺼번에 다 보겠다고 마음 먹는 것도 무리! 작품이 시대별, 지역별, 분야별로 구분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 마음에 드는 컬렉션을 골라 보는 것이 현명하다. 이번에 찾은 메트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르누아르의 그림과 드가의 조각, 로댕의 조각이었다. 분명 지난 번에 왔을 때 봤을 작품들인데 전혀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그때와 지금의 내 마음이 다르기 때문일까? 평면의 캔버스에서 사람의 체온이 느껴지게 하는 르누아르의 그림, 삶의 고뇌가 느껴지는 로댕의 조각. 비록 미술에 문외한이지만 왜 그들의 작품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 사랑을 받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메트는 센트럴 파크 서쪽에 바로 붙어있기 때문에 1층 카페에 앉아있노라면 통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푸른빛을 만끽할 수 있는데 특히 비가 오는 날엔 그 풍경이 더욱 아름답다. 우산을 쓰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방울방울 빗물에 젖은 나뭇잎도, 이상하게 비 오는 날의 풍경은 사진 속에선 흐리지만 기억 속에선 더욱 뚜렷하고 맑게 남아있다.
메트가 고전적이고 방대한 박물관이라면 뉴욕현대미술관, 즉 모마는 이름대로 모던하고 깔끔한 현대미술의 보고다. 이곳에는 재치 넘치는 설치 미술과 사진, 인테리어 작품도 많아 보는 재미가 아주 쏠쏠한데, 역시 마음에 오래 남는 것은 피카소와 프리다 칼로의 그림이었다. 강렬한 색채와 뚜렷한 이미지가 작가의 열정을 보여주는 것 같아 한참을 그 앞에 서서 감상하다 사진으로까지 담아왔으니-뉴욕의 미술관은 플래시만 안 터뜨리면 대부분 사진 촬영이 가능하다- 아마 오래도록 그 느낌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다.

쇼! 쇼! 쇼! 부지런한 자에게 할인 티켓이 있나니
아름다운 그림이 내 마음 속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켰다면, 뉴욕에서 만나는 뮤지컬은 그야말로 원초적인 감각을 깨우는 힘이 되었다. 배우들의 그 몸짓과 그 노래에 한없이 빠져들 수 밖에 없는 두 시간 반의 향연. ‘뉴욕’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가운데 하나는 아마 화려한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타임스퀘어일 것이다. 그 가운데 뮤지컬 홍보 간판만 둘러봐도 얼마나 많은 작품이 공연 중인지 알 수 있는데, 난 이번 뉴욕 여행에서 3편 이상의 뮤지컬을 보는 것이 목표였다. 인기 많은 작품은 보통 100달러가 넘는 돈을 줘야 겨우 표를 구할 수 있지만, 타임스퀘어에 있는 할인 티켓 부스 ‘tkts'에서는 매일 많게는 50%까지 할인된 당일 표가 나오기 때문에 부지런을 떠는 만큼 싼값에 표를 구할 수 있다.
난 tkts 오픈 1시간 전부터 줄을 선 덕에 ‘아가씨와 건달들’ ‘오페라의 유령’ ‘메리포핀스’ 표를 반값에 구입할 수 있었다. 무대와의 거리가 5미터도 채 되지 않는 오케스트라 석 가운데 앉아 배우들의 땀방울과 표정까지 생생하게 감상하는 기분이란! 뿌듯함을 넘어선 감동과 환상 그 자체라고나 할까? (영어 대사라도 걱정 없다. 그냥 봐도 정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 극장 별로 학생 할인(student rush ticket)이나 추첨식 할인(lottery ticket)도 있는데, 같은 숙소에 있던 사람의 학생증으로 최고 인기 작품인 ‘빌리엘리어트’도 저렴한 값에 볼 수 있었다. 이름을 써서 내고 추첨하는 ‘위키드’의 로터리 티켓은 2번 도전했지만 모두 낙방해 아직도 가슴이 쓰리다.
공연도 공연이지만 극장들 역시 1900년대 초에 지어진 것들이 많아 안에 들어서면 왠지 오래된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서울에서야 뮤지컬 공연은 대형 극장에서 하는 게 보통이지만 브로드웨이의 극장들은 서울의 소극장에 비유하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그만큼 무대와 객석이 가까워 집중도 잘 되고 감동도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일. 여행자인 나야 편한 옷차림으로 뮤지컬을 보러 갔지만, 극장에서는 종종 이브닝 드레스를 입은 중년의 여성이나 손을 꼭 잡고 극장에 온 노부부의 모습을 보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 조금은 낯설지만 재미있는 풍경이었다.
브로드웨이를 중심으로 40번가와 55번가 사이에 촘촘히 들어선 극장에서는 매일 밤 뮤지컬이 펼쳐지고 있다. 화려하고 열정적이고 생기 넘치는 뮤지컬은 꼭 ‘뉴욕’의 모습을 닮았다. 오늘 밤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2시간 반의 향연 속에 빠져들고 있을까?

만약에, 뉴욕에서 살 수 있다면
만약에 아주 만약에 내가 뉴욕에서 살 수 있다면 맨해튼이 아닌 브루클린에서 살아보고 싶다. 맨해튼에서 다리 하나를 건너면 되는 곳, 이스트강 건너 맨해튼의 멋진 마천루를 밤낮으로 실컷 구경할 수 있는 곳, 오래된 브라운스톤 아파트가 낭만적인 브루클린 하이츠(Brooklyn Heights)! 이곳은 골목골목 조용한 주택가가 늘어선 지역이다. 시끌벅적하고 화려한 분위기는 없지만 키 큰 나무가 집 앞에 그늘을 만들고 작은 카페와 레스토랑이 조용히 손님을 맞는다. 길을 걷는 내 발걸음 조차도 안단테가 되고 마는 이곳은 유모차를 끌고 마실 나온 할아버지도, 엄마 손을 잡고 유치원에 가는 아이들도 그저 풍경 속에 녹아들어 평화롭게만 보였다. 게다가 주택가 서쪽으로는 이스트강을 따라 벤치가 늘어선 500미터짜리 산책로(Brooklyn Heights Promenade)까지 있으니 여기서야 말로 맨해튼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고나 할까? 브루클린의 매력은 이뿐만이 아니다. 베드포드 애비뉴(Bedford Ave.)를 중심으로 한 윌리엄스버그에서는 맨해튼과는 전혀 다른 뉴욕을 느낄 수 있다. 조금은 으슥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골목, 그래피티와 낙서가 멋대로 그려진 벽이며 공장인지 상점인지 헷갈리는 갤러리들까지. 그야말로 자유로운 영혼들이 삶의 고뇌를 외치는 것 같은 흥미로운 곳이다.
브루클린 브리지 바로 아래에 있는 유명한 피자집 ‘그리말디’에서 피자를 먹고 ‘브루클린 아이스크림 팩토리’에서 아이스크림까지 해치워 든든하게 배를 채운 뒤 맨해튼으로 돌아올 때는 브루클린 브리지를 걸었다. 옛날 초등학교 교실바닥처럼 나무로 짜인 보도는 사람들 발걸음에 삐걱삐걱 소리가 나는데, 맨해튼에서 일하고 퇴근하는 뉴요커들도 자전거를 타고 건너는 사람들도 사진 찍느라 여념이 없는 관광객들도 모두 나무 소리에 발맞춰 움직이는 것 같았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다리 위에서 뒤를 돌아 바라본 브루클린은 소박했고, 불빛이 하나 둘 켜지는 맨해튼은 낮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 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이스트강과 붉은 노을은 사진 한 장에 담기엔 그저 벅찰 뿐이었다.

추억은 드라마보다 진하다
내가 처음 뉴욕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무래도 몇 년 전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를 보면서였던 것 같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뉴욕 여행을 꿈꾸겠지만 여행자의 신분으로 짧은 시간 뉴욕을 경험하는 것은 드라마 속 주인공들의 일상과는 거리가 멀다. (최신 유행의 의식주를 즐기는 것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그러나 ‘첼시 마켓(Chelsea Market)’에서 싱싱한 과일과 채소, 커다란 빵으로 만찬을 즐기고, 비 오는 날엔 ‘하우징 웍스 북스토어(Housing works Bookstore)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에 헌 책과 오래된 중고 음반을 구경하며, 일요일에는 할렘의 수많은 교회에서 ‘신나게’ 노래하고 기도하는 모습(영화 ‘시스터 액트’의 장면을 상상하면 된다)도 볼 수 있는 여유를 누리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2주가 넘도록 부지런히 걸은 덕에 신고 갔던 신발 한 켤레는 바닥이 닳아 버리고 왔지만 첫 번째 뉴욕 여행을 갔을 때 두고 온 ‘내 마음’은 단단히 챙겨왔다. 이제 남은 것은 정리해야 할 사진들과 매일 썼던 일기장뿐이다. 세 번째 뉴욕 여행은 언제가 될지, 아니 가능할지 잘 모르겠다. 그저 한동안 태평양만큼이나 넓고 깊이 난 또 뉴욕을 그리워할 것 같다. (권혜린 서울 광진구 광장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