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것 마니아 Y, 시간 여행을 떠나다

35살의 컴퓨터 프로그래머 Y는 자칭, 타칭 옛것 마니아다. 특히 자신의 어린 시절이었던 7, 80년대는 Y가 가장 좋아하는 분야. 야근을 밥먹듯이 해야 하는 직업 덕분에 최근 들어 대낮에 돌아다닌 적이 거의 없는 Y는 이대로는 자신의 삶이 너무 무미건조해지겠다 싶어 결심을 했다. 월차를 낸 그가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어린 시절의 추억 더듬기다.

10:00 청계천 판잣집 테마존

6, 70년대 청계천 9가에는 서민들의 수많은 애환이 서려있던 판자촌 마을이 있었다. 판잣집이 빼곡히 들어섰던 그 마을은 70년대 말, 청계천 복개공사가 이뤄지면서 없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옛 시절을 추억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기 마련. 그런 사람들을 위해 서울시설관리공단이 지난해 복원한 ‘판잣집 테마존’이 Y가 가장 처음 선택한 곳이다.
그리 크진 않지만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외관부터 Y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집 옆의 창고에서 연탄을 판매하고 있는 집 안으로 들어가니 장남이 벗어놓았을 법한 교복이 벽에 가지런히 걸려 있다. 장남만이 쓸 수 있는 앉은뱅이책상과 이불장, 싸구려 요강이 세간 살림의 전부. 그리 부유하지 못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이 생각나 마음이 찡해지는 Y다. 연탄 집 안에는 오래된 영화의 포스터와 타자기, 손으로 채널을 돌려야 하는 텔레비전, 안방을 장식하곤 했던 촌스러운 장식품 등이 빼곡히 진열되어 있다. 난로 위에 올려놓고 데워먹었던 양철 도시락은 특히 Y의 눈길을 사로잡은 소품이다. 다시 집 밖으로 나온 Y는 벽보를 하나 발견했다. ‘쌀이 모자라 외국에서 수입하는 양이 많아지고 있으니 무조건 잡곡을 섞은 밥을 먹으라’는, 텔레비전이 많이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의 농림부 장관 담화문이다. 쌀밥만 사용하는 업소는 영업정지를 시키겠다는 협박도 들어있는 것을 보니, 국가에서 먹는 것까지 통제해야만 했던 시절도 있었구나 싶다. 가정집 옆으로 자리 잡은 ‘광명상회’에는 동네에서 살 수 있던 잡화들이 쌓여 있다. 인터넷으로만 보았던 갈색 병에 담긴 환타와 맥콜, 가위로 오려 입히던 종이 인형, 맛땡큐 라면과 일번지 라면, 어머니들이 좋아했던 벌꿀 비누가 눈을 즐겁게 한다. 바로 옆 만화방에 있는 촌스러운 제목의 만화책들은 Y를 가장 설레게 한 것들. 당장이라도 한 두 권 뽑아들고 가게 한 가운데 있는 나무 테이블에 앉고 싶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구경할 수 있도록 Y는 마음을 다스렸다.

위치 성동구 마장동 청계천 문화관 맞은편
시간 AM 10:00~PM 8:00
문의 02-2290-7111 www.sisul.or.kr

12:00 서울 풍물시장

판잣집 테마존을 빠져나온 Y는 늦은 아침을 먹은 탓에 점심을 미루기로 하고 ‘맘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꼭 사야지’하는 생각을 하면서 서울 풍물시장으로 향했다. 입구에 자리 잡은 노랑동과 주황동은 생활 잡화와 의류를 파는 곳이다. 4,50대를 겨냥한 감각의 선글라스와 옷들도 재미있지만 Y의 오늘 목적지는 공예골동품을 파는 초록동이다. Y는 입구에 놓인 예사롭지 않은 불상과 조각들을 보면서부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풍물시장 방문 확인을 받으면 90분까지 무료 주차를 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 시간 동안 구경만이라도 다 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처음 찾아간 가게에서부터 Y는 환호성을 질렀다. 판잣집 테마관에서 만져보고 싶었던 욕구를 꾹 누를 수밖에 없었던 옛날 타자기와 똑같은 모델을 발견한 것이다. ‘없는 게 없는 시장’이라더니, 그 말이 정말 딱이다 싶다. 필름 카메라와 폴라로이드, 너무나 선명한 화질의 옛날 텔레비전들을 보며 시간 가는 줄 몰랐던 Y는 빔 프로젝트와 세련된 디자인의 음식물 쓰레기 처리기를 발견하고는 정말 없는 게 없구나, 하고 혀를 내둘렀다. 아코디언과 첼로 같은 악기는 물론 워크맨, LP플레이어(물론 LP판도 많다), 오디오와 같은 전자기기, 골프채, 낚싯대 등의 스포츠 용품, ‘조각가 누구누구의 작품’이라는 설명이 붙은 조각품까지 있는 시장에서 Y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 삼매경에 빠졌다. 정말 사고 싶은 물건을 발견한 것은 시장을 나오던 길에서다. 옛 냄새 물씬 풍기는 나무 책상을 구입하고 싶었던 Y의 눈에 완벽한 책상이 들어온 것.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다른 사람에게 팔린 책상이었다. 아쉬워하는 Y에게 상점 주인은 더 좋은 것을 하나 구해주겠다며 전화번호를 남기라고 한다. 상점 주인의 마음 씀씀이에 따뜻함을 느낀 Y는 얼른 전화번호를 남기고 발길을 돌렸다.

위치 청계천 8가 황학교 주변
시간 AM 10:00~PM 7:00, 둘째 ? 넷째 화요일 휴무
문의 02-2238-2600 http://pungmul.seoul.go.kr

14:00 소문난집 추어탕

2시가 되니 Y는 슬슬 배가 고파졌다. 기왕지사 옛 시간을 더듬기로 한 Y가 선택한 점심메뉴는 종로 3가 낙원상가 아래에서 팔고 있는 57년 된 국밥집의 우거지 얼큰탕이다. 확실한 위치를 모르는 상태에서 찾아간 것이라 잘 찾을 수 있을지 걱정도 했지만, 낙원상가 허리우드 극장 입구 바로 옆에 위치해 찾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이 국밥집의 이름은 ‘소문난집 추어탕’. 하지만 정작 추어탕을 팔지는 않는다. 메뉴는 오직 1,500원짜리 우거지 얼큰탕 하나다. 요즘 시대에 이 가격이 어찌 가능할까 싶지만, 시어머니에게서 가게를 물려받은 주인 아주머니는 ‘배고픈 사람에게 어찌 비싼 돈 받겠냐’며 아직도 이 가격을 고수하고 있다.
입구에 있는 커다란 솥에서 푸욱 떠주는 국 한 그릇과 밥 한 공기, 깍두기 한 접시가 전부지만 국밥 한 숟가락을 먹는 순간 Y는 57년의 세월만큼이나 진한 그 맛에 반해버리고 말았다. 단골들이 4~50년 동안 끊임없이 이 집을 찾아오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구나 싶다. 한참 밥을 먹고 있으니 아주머니가 술 마신 다음날 속풀이에도 그만이라는 말을 건넨다. 술 좋아하는 Y는 무척 좋은 속풀이용 해장국을 발견했다는 생각에 속 뿐 아니라 마음까지 든든하게 채웠다.

위치 낙원상가 허리우드 극장 입구 옆
시간 AM 04:30~PM 10:00
문의 02-742-1633

15:00 동대문 중고서적거리

배를 든든하게 채운 Y가 향한 곳은 동대문 평화시장 근처에 위치한 중고서적거리다. Y는 시간이 날 때마다 중고서적거리를 찾곤 한다. 최근에 나온 책들을 원가보다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운이 좋으면 국내에서 구하기 어려운 원서들을 구하거나 이미 절판된 책을 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무척 싼 가격에. 
중고서적거리에는 성경과 같은 기독교 관련 서적들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서점도 있고, 철 지난 잡지나 외국 잡지를 판매하는 곳도 있다. 소설책이나 교육용 서적은 물론 전국 방방곡곡의 중, 고등학교나 대학교, 변호사회 등의 회원명부가 쌓인 서점도 있다. 덕분에 꽤 오랜 시간 동안 돌아다니며 구경을 했지만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를 만큼 즐거운 곳이라고 Y는 생각했다.
책을 구경하던 Y는 일반 서점과는 다르게 서점 주인이 앉거나 간신히 돌아다닐 정도의 공간만 제외하고는 책이 산처럼 쌓여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갑자기 서점 주인들이 어디에 어떤 책이 있는지를 모두 기억할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염치불구하고 질문을 던진 것은 원서들이 가득 쌓여 있던 한 서점. “규칙 없이 쌓여져 있는 것 같아도 주인들은 다들 어디에 무슨 책이 있는지 다 알아요. 만약, 손님이 찾는 책이 정말 구석에 들어가 있다고 해도 다 꺼내는 노하우가 있지요.” 전문가다운 대답에 마음이 놓인 Y는 오늘 사려고 했던 컴퓨터 프로그래밍 관련 외국 서적의 제목을 말했다. 규칙에 맞춰 꺼내는 그 노하우를 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책은 눈에 보이는 곳에 있었다.

위치 두산타워 옆 청계천 거리
시간 AM 10:00~PM 8:00(점포마다 다름)

17:30 인사동 토토의 오래된 물건

Y가 오늘 여정의 마지막으로 선택한 곳은 그동안 꼭 가보리라 벼르고 별렀던 인사동 ‘토토의 오래된 물건’이라는 곳이다. 인사동에 자주 가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미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이곳은 상호명 그대로 오래된 물건들을 진열하고 파는 곳이다. 파는 물건도 있지만 주인이 관람 목적으로만 수집해 놓은 물건들도 많아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한다. 입장료는 1,000원. 물건을 팔면서도 입장료를 받기 때문에 기분이 나쁠 수도 있지만 ‘쌀이 떨어져서 입장료를 받는다’는 주인장의 센스 넘치는 안내문과 가게 안에 쌓여 있는 물건들을 보며 향수에 젖다 보면 단돈 1,000원은 전혀 아깝지 않다.
가게 안에는 7, 80년대 모두를 열광케 했던 논두렁이나 쫀드기, 아폴로 같은 불량식품부터 띄어쓰기용 국어 공책, 원더우먼 누나의 세련된 자태가 박힌 책받침, 그 시절 남자 아이들의 영웅이었던 부루스 리 이소룡 아저씨의 딱지까지, 어디로 눈을 돌려도 즐거울 만큼의 물건들이 그득그득 쌓여 있다. 옆집 친구와 코피가 나도록 치고받고 싸우게 만들었던 아톰 인형의 피규어는 Y의 마음을 무척이나 설레게 한다. 그 시절엔 어디서나 살 수 있었지만 지금은 많은 사람들의 향수가 되어버린 물건들을 이렇게 많이 수집해 놓은 주인에게 고마워지기까지 하는 Y다. 그 중에서도 가장 Y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보물섬’이라는 이름의 조립장난감. 해적섬, 감시전망대 등 얼마 안 되던 용돈을 모으고 또 모아 시리즈로 구입했던, 먼지 가득 쌓인 보물섬 상자 앞에서 Y는 잠시 회상에 잠겼다.
주말에는 줄서서 기다려야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을 들었었는데, 평일에도 이렇게 사람이 많은 것을 보니 평일을 선택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나오던 길에 Y는 지금도 초등학교 시절 공책에 많이 찍혀있는 ‘참 잘했어요’ 도장과 무지개 색이 들어 있는 유리구슬 5개를 구입했다. 주머니가 따뜻해지는 느낌이다.

TIP 인사동 가나아트, 학고재 미술관 맞은편
시간 AM 10:00~PM 8:00(주말 9:00)
문의 02-725-1756

시간 관계상 못 가본 Y의 후보지
전자오락관 소년_딱 한판만!
PC방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 부모님을 졸라 100원이 생기면 항상 달려가고는 했던 동네 오락실을 그리워하던 사람들을 위해 기획된 전시회다. 7월 31일부터 8월 16일까지 짧은 기간 동안 밖에 열리지 않아 꼭 가보고 싶었지만 시간 관계상 포기해야 했기 때문에 Y가 가장 아쉬워한 곳이다. 대표적인 슈팅게임을 하나로 조합해 새롭게 선보이는 게임이나 <스트리트 파이터>와 <DDR>을 연계해 직접 몸을 움직이며 체험할 수 있는 게임에도 관심이 갔지만 가장 Y의 귀를 번쩍 뜨이게 한 것은 <퐁>, <너구리>, <방구차> 등 다양한 고전게임도 직접 즐길 수 있다는 것.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꼭 시간 내서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는 Y다. KT&G 상상마당에서 열린다. 02-330-6225 www.sangsangmadang.com

부천 판타스틱 스튜디오
Y가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 중 하나인 부천 판타스틱 스튜디오는 안타깝게도 거리 때문에 포기했다. 하지만 다음 휴일에 가야할 곳 리스트에 1순위로 올라있는 부천 판타스틱 스튜디오는 1930~70년대의 종로, 명동거리를 옛 모습 그대로 재현해 놓은 역사체험의 현장이자 영상촬영장. 드라마 <야인시대>와 <영웅시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등이 모두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주변에 유네스코가 지정한 문화유산을 축소시켜 전시해 놓은 테마파크 아인스월드와 한국 만화 자료를 수집, 보존해 놓은 한국만화박물관이 있어 더욱 좋다. 관람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9시까지. 032-236-2583 www.fantasticstudi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