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azzling Day
조물주의 선물 같은 그곳

실수였다. 이 도시를 고작 뤼세피오르로 가는 관문 정도로만 생각했던 건. 한정된 시간, 흥미를 끄는 많은 볼거리들. 이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잠자는 시간, 밥 먹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뛰어다녀야 했다. 노르웨이 남서부에 자리 잡은 항구도시 스타방에르를 얕잡아 보고 겨우 하루만 이곳에 할애한 오만의 대가였다.

누군가 내게 스타방에르(Starvanger)가 어땠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한 마디로 대답할 수 있다. 그곳은 ‘눈부신 곳’이었다고. 평소와 다르게 30도에 육박하는 강렬한 태양이 눈 부셨고, 뜨거운 태양 아래 반짝이는 피오르의 장관이 눈부셨으며, 컬러풀한 색을 입은 오래된 목조건물이 눈부셨다. 여유를 품고 거리를 누비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눈부셨고 모래를 향해 강(强) 스파이크를 내리꽂는 비치발리볼 선수들의 활약이 눈부셨다. 그리고 그들에 환호하는 이들의 함성은 온 도시에 울려 퍼지며 청각마저 휴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 모든 풍경을 아담한 한 도시에서 마주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고 그곳에서 보낸 짧은 시간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자연에 피오르를 선물 받다
앞서 언급했듯이 스타방에르를 찾은 첫 번째 이유는 피오르를 보기 위해서다. 산 아래 자리 잡은 아담한 목조건물과 그 속에서 평화를 머금고 살아가는 바이킹의 후예들, 여름이면 해가 지지 않는 백야와 겨울이면 하늘을 초록빛으로 물들이는 오로라의 신비로움, 이 모든 것이 전 세계 여행자들을 노르웨이로 이끄는 이유지만, 그들의 발걸음이 이곳으로 향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피오르의 장엄함에 있다.
노르웨이는 피오르의 나라다.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 빙하기 말기에 얼음이 녹으면서 해안을 깎았고, 그렇게 만들어진 골짜기에 바닷물이 차오르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이 ‘자연이 빚은 걸작품’이 노르웨이의 서쪽 해안을 따라 남단에서 북단까지 일직선으로 약 2천 킬로미터에 걸쳐 펼쳐져 있으니, 눈앞에 산과 바다가 보인다면 그곳이 바로 피오르인 셈이다. 스타방에르에서 서쪽으로 5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한 뤼세피오르(Lysefjord)는 그 수많은 피오르 중 4대 피오르에 꼽힐 만큼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곳으로, 수직으로 떨어지는 거대한 바위벽 사이에 끼어 있는 42킬로미터 길이의 피오르가 여행객을 자연의 위대함 속으로 안내한다. 이 뤼세피오르의 장관을 만나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스타방에르 항구에서 뤼세피오르를 따라 운항하는 크루즈를 이용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배와 버스를 이용해 프라이켄스톨 로지(Preikestolhytta)까지 간 후 그곳에서 약 2시간 정도 걸어 뤼세피오르의 하이라이트인 604미터 높이의 가파른 절벽 프레케스톨렌(Preikestolen) 정상에 오르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헬리콥터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사실, 이 세 가지 방법 중 직접 산길을 오르며 피오르를 좀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는 하이킹 코스가 가장 욕심이 났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허락지 않아 하이킹은 다음을 기약하고 크루즈를 이용하기로 했다.

‘빛’의 피오르를 만나는 길
이미 크루즈에는 따가운 햇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 손에 카메라를 든 채 갑판에 자리를 잡고 출발을 기다리는 승객들로 가득하다. 뤼세피오르 크루즈는 여름이면 매일 오전 10시 30분과 2시 30분, 두 차례에 걸쳐 운행하는데 스타방에르 항구를 출발해 프레케스톨렌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코스로, 약 3시간 30분이 걸린다.
드디어 크루즈가 출발신호를 보내자, 승객들의 얼굴에 기대감이 퍼진다. 스타방에르 항구를 벗어난 크루즈는 잠시 후 뤼세피오르에 접어들고, 깊이가 13미터밖에 되지 않는 오아네스(Oanes)와 포르산(Forsand) 지역을 지난다. 크루즈 옆으로는 간간이 요트에서 한낮의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스치고, 어느덧 스타방에르의 마을 대신 양옆으로 들어선, 마치 날카로운 칼로 베어낸 듯한 바위의 절경은 아름다움을 넘어서 자연의 위대함을 느끼게 한다. 사실, 노르웨이의 피오르를 만난 건 이번이 두 번째다. 꼭 1년 전, 역시 취재를 위해 찾는 노르웨이에서 세계에서 가장 길고 깊다는 송네피오르(Sognefjord)를 여행했었다. 송네피오르가 숨 막히는 웅장함과 빼어난 절경, 그리고 그 속에 자리 잡은 아기자기한 마을의 평화로운 모습을 선사했다면, 뤼세피오르는 인적이 거의 드문 황폐한 지역이지만 피오르를 감싼 1천 미터를 넘나드는 아름다운 빛깔의 화강암 바위가 가슴 벅찬 장관을 선사한다. ‘뤼세피오르’라는 이름 역시 ‘빛’이라는 뜻의 ‘뤼세(Lyse)’와 협곡이라는 뜻의 ‘피오르(Fjord)’가 합해진 것이라고.
2시간 가까이 피오르를 가르며 천천히 달리던 크루즈는 어느 순간 방향을 틀어 산 사이에 자리한 판타홀로(Fantah?l?)라는 이름의 동굴에 들어선다. 판타홀로라는 이름은 ‘도둑의 동굴’이라는 뜻으로, 뤼세피오르를 통해 도망가던 도둑이 경찰의 눈을 피해 이곳에 몸을 숨겼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우리의 크루즈도 이곳에 잠시 몸을 숨기고는 입센의 희곡에 곡을 붙인 그리그의 극음악 ‘페르귄트’의 일부를 들려준다. 대자연에 둘러싸인 채 푸른 바다 위에서 듣는 그리그의 음악이라니, 상상만으로도 황홀하지 않은가? 음악감상이 끝나면 여정은 계속된다. 이제 기다리는 곳은 남부 노르웨이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명소 중 하나이자 뤼세피오르 관광의 백미인 프레케스톨렌. ‘설교하는 바위’라는 뜻의 프레케스톨렌은 해발 604미터의 산 정상에 있는 가로, 세로 25미터의 바위를 가리키는 말로, 절벽 위의 평평하고 네모난 바위가 교회의 설교단을 닮았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고개를 있는 힘껏 젖히고 프레케스톨렌을 올려다본다. 누군가가 일부러 깎아냈다고 해도 믿기 어려울 만큼 네모난 바위의 모습이 어찌나 신기한지, 대자연의 선물인 거대한 피오르에 대한 경이로움은 이곳에서 절정을 이룬다. 프레케스톨렌을 지나 크루즈는 눈이 녹아 떨어지면서 자연스레 형성된 폭포 앞에 잠시 멈춘 후 다시 스타방에르로 뱃머리를 돌린다.

하늘을 날다, 황홀경에 빠지다
돌아오는 길, 크루즈의 선원은 조금 전 폭포에서 받은 물을 승객들에게 나눠준다. 그야말로 천연 자연 그대로인 깨끗하고 시원한 물 한잔은 뜨거운 태양 아래서 장시간 앉아 있느라 쌓인 갈증을 말끔히 풀어준다. 그렇게 3시간 30분의 여정을 마치고 처음 출발했던 스타방에르 항구에 도착했지만, 아래에서 올려다본 프레케스톨렌이 못내 아쉽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하이킹을 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온다. 다음 장소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결국, 큰 맘 먹고 헬리콥터를 타기로 했다.
스타방에르 솔라 공항(Stavanger Sola Airport)에서는 하늘에서 뤼세피오르와 스타방에르를 둘러볼 수 있는 헬리콥터를 이용할 수 있다. 프레케스톨렌만 보는 코스는 30분, 프레케스톨렌부터 모나폭포(M?nafossen), 뤼세피오르의 끝 부분에 있는 984미터 높이의 수직절벽인 키예라그(Kjerag) 산, 키예라그 산의 절벽과 절벽 사이에 끼어 있는, 보기만 해도 아찔한 5제곱미터 정도의 돌인 키예라그 볼텐(Kjeragbolten)까지 뤼세피오르의 명소와 스타방에르 시내를 모두 돌아보는 코스는 1시간으로, 우리는 짧은 코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운항 시 주의해야 할 점에 대해 설명한 조종사는 이내 하늘을 향해 헬리콥터를 조종한다. 스타방에르 시내에 모여 있는 사람들, 바다를 끼고 자리한 아름다운 도시의 풍경이 펼쳐지는듯 하더니 헬리콥터는 조금 전 크루즈를 타고 지났던 뤼세피오르로 들어선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경관은 배 위에서 보던 것과는 또 다른 감동을 선사한다. 나도 모르게 ‘아!’하는 감탄사가 터져 나올 만큼 (자꾸 마이크에 대고 소리를 질러서 조종사가 꽤나 시끄러웠을 게다) 환상적이라는 말 외에는 딱히 다른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풍광이다. 프레케스톨렌에는 2시간 남짓 땀 흘리며 올라온 등산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가까이서 그들의 표정을 볼 순 없지만, 그 마음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분명 그들은 조물주가 정성스레 빚은 듯한, 발아래 펼쳐진 황홀한 대자연에 짜릿함과 아찔함을 동시에 느끼며 가슴 벅찬 감동을 누리게 있었을 게다.

오랜 역사의 온기가 담긴 곳, 스타방에르
오슬로에서 비행기로 50분, 베르겐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스타방에르는 뤼세피오르로 가는 길목인 동시에 훌륭한 항만시설을 갖춘 중요한 어업도시이자 8세기에 창건된 고도(古都)이다. 스타방에르 항구 앞 어시장을 중심으로 오른쪽은 구시가지, 왼쪽은 신시가지가 들어선 모습이 자연스레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구시가지에는 18세기에 지어진 173개의 아담한 목조건물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옛 정취를 물씬 풍긴다. 도심에서 유난히 눈길을 끄는 건 누가 봐도 화려한 색상의 목조건물이다. 하얀색, 주황색, 하늘색, 노란색 등 알록달록한 색을 입은 목조건물은 도시를 컬러풀하게 물들이며 보는 이의 마음마저 환하게 한다. 다양한 색깔만큼이나 목조건물도 매우 많은데, 그 수가 유럽에서 가장 많다고.
구시가지를 거닐다 보면 재미있는 박물관을 만나게 된다. 바로 통조림 산업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통조림 박물관(Hermetikkmuseum)으로, 과거에 실제로 운영했던 공장을 박물관으로 재현해 놓은 곳이다. 통조림 산업은 과거 스타방에르의 가장 주요했던 산업이다. 1890년부터 1960년까지 이곳에는 1백여 개의 통조림 공장이 있었고, 생산하는 통조림 수만 해도 1년에 3백50만 캔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점차 물고기 양이 줄어들면서, 1982년을 마지막으로 스타방에르에서는 더 이상 통조림 공장을 볼 수 없게 됐는데, 당시 생선을 잡아서 말리고, 소금에 절인 후 잘라 캔에 넣어 통조림으로 완성되는 모든 과정을 이 통조림 박물관에서 살펴볼 수 있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옛 방식으로 직접 구운 생선도 맛볼 수 있다.
통조림 산업이 위축되면서 스타방에르는 점점 더 가난해져 갔다. 지금이야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로 꼽히는 노르웨이지만, 원래 노르웨이는 유럽 내에서 그리 부자 나라가 아니었다. 척박한 땅과 오랫동안 지속된 스웨덴의 지배가 노르웨이를 더욱 가난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노르웨이 역사에 대반전을 가져다준 사건이 일어났으니, 바로 1961년에 북해에서 석유가 발견된 것이다. 북해유전 발견 이후 노르웨이는 산업 전반에 활기를 띠기 시작했고, 오늘날 유럽의 강대국으로 거듭났다. 이 같은 노르웨이 석유 산업의 전반을 볼 수 있는 곳이 스타방에르에 있는 석유 박물관(Norsk Oljemuseum)이다. 단순히 오일과 가스의 발견 역사만 전시해 놓은 것이 아니라 수만 년 전부터 인간이 이를 개발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부터 반면에 얼마나 빠른 속도로 우리가 자원을 낭비하고 있는지를 도표로 보여줘 많은 생각을 하게 하며, 박물관은 지루하다고 여기는 아이들도 석유산업에 대해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석유개발 기술이나 석유산업의 현재에 대한 시뮬레이션이, 3D 영상 등 다양한 즐길 거리를 마련해 놓고 있다. 단순히 석유개발만으로 노르웨이가 지금의 위치에 오른 것은 아니다. 노르웨이는 세계 5대 산유국이면서 친환경에너지 사용이 세계 2위인 국가로 친환경 에너지 분야의 앞선 기술도 만날 수 있다.
중세의 석조건물인 스타방에르 대성당(Starvanger Cathedral)은 도심 중심에 자리 잡아 중후한 멋을 드러낸다. 1125년에 노르만 양식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1272년 일어난 화재로 상당 부분이 소실돼 본당과 탑 2개 등을 고딕양식으로 다시 건축했는데, 그래서 성당에서는 노르만과 고딕 두 가지 양식을 모두 볼 수 있다. 노르웨이에서도 중세의 양식이 가장 잘 보존된 성당으로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항구를 따라 늘어선 레스토랑 뒤쪽에 서 있는 발베르그 타워(Valbergt?rnet)에도 올라보자. 1850년에서 1853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1945년까지 사람이 거주하며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을 순찰하던 곳으로, 꼭대기에 오르면 스타방에르 도심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모래 위에 강(强) 스파이크를 내리꽂아라
스타방에르를 둘러보는 동안 한쪽에서는 끊이지 않고 함성이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우리가 그곳을 찾기 1주일 전부터 시작된 ‘2009 스와치 비치발리볼 월드 챔피언십(2009 Swatch-Fivb World Championships)’이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일임에도 유난히 거리가 북적이는 것도, 활력 넘치는 사람들의 행렬이 밤늦도록 이어지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큰 인기를 누리고 있지 못하지만, 비치발리볼은 1993년부터 정식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되었을 만큼 유럽은 물론 전 세계에 스포츠 마니아들을 들뜨게 하는 스포츠다. 매년 세계발리비치볼연맹은 전 세계를 돌며 월드투어, 그랜드슬램 등의 경기를 펼치지는데 그중에서도 월드 챔피언십은 가장 큰 상금이 걸린 경기로, 월드 챔피언십이 스타방에르에서 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전 세계에서 총 32개 팀이 출전해 토너먼트 형식으로 진행되는 비치발리볼은 배구와 경기방법이 같지만 한 팀에 6명이 뛰는 배구와 달리 비치발리볼은 단 2명의 선수가 출전한다. 경기장에서는 마침 노르웨이와 네덜란드의 여성팀 경기가 한창이었다. 가로 8미터, 세로 16미터의 모래 코트에서 수영복 차림의 늘씬한 미녀 선수들은 상대편 코트를 향해 스파이크를 내리꽂으며 불꽃 튀는 대결을 벌이고, 객석에서는 공이 바닥에 떨어질 때마다 환호와 아쉬움의 탄성이 번갈아 터져 나온다. 1점을 따면 1점을 내어주는 막상막하의 경기 끝에 1세트는 26대 24로 네덜란드팀의 승리. 2세트를 시작하자마자 노르웨이 선수들이 내리 3점을 따면서 우세를 잡는가 싶더니 결국은 네덜란드 팀의 승리로 경기가 끝이 난다. 특별히 응원하는 팀이 없어도 팔등신의 미녀 선수, 구릿빛 피부의 미남 선수들의 박진감 넘치는 경기와 저마다 자국의 국기를 손에 든 채 열광하는 관객들의 함성, 그리고 거리에 넘쳐나는 축제의 열기는 묘한 흥분과 재미를 준다.
뾰족한 화강암의 ‘빛’을 머금은 뤼세피오르와 ‘역사의 흔적’을 품은 도심의 다양한 볼거리, 그리고 ‘땀과 열정’을 내뿜는 비치발리볼 경기까지, 이곳을 눈부시다 말할 이유, 충분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