保存術(보존술: 남의 것, 옛 것에 연연하지 않고 문화적 가치가 있는 것은 지키고 즐기는 대만의 방식)

한 때 세상에서 가장 가보고 싶지 않은 나라가 대만이었다. 매력을 몰랐다. 남이섬에서 만난 대만 사람들은 촌스러웠다. 그런 작은 나라에 궁금한 것도 신기할 것도 없었으며 대만에서 과연 ‘해외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을지조차 회의적이었다. 늘 속단이 문제다. 사실 대만에는 작은 일본과 작은 한국과 작은 70년대가 시공간을 초월해 아웅다웅 섞여있는데. 어느 나라의 것이든 얼마나 오래된 것이든 쉽게 받아들이고 지켜간다는 사고방식의 발로를 눈으로 확인하는 일은 참 즐거운 것을.

“일제 식민지 때 일본이 지은 건물들이 거의 그대로 있네요?” 타이베이 컬처 파운데이션(Taipei Culture Foundation)의 부감독 하워드 린에게 물었다. “건물들이 튼튼하거든요.” 그 뜻이 아니었는데 조금 당황했다. 지배국의 잔재가 남아있는 게 기분 나쁠 수도 있는데 오래된 것들을 주요 건물로 사용하는 게 신기하다고 부연 설명했다. “음… 그대로 두면 안 되는 이유가 뭐죠?” 긴 사연이 있을 줄 알았건만 조금 당황했다. 멀쩡한 것도 지워 없애버리려는 마당에 낡아서 허물어지면 보수를 해서 지키고 있다는 것이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답했다. “일본이 지은 건물들은 매우 튼튼하고 아름다운데, 그걸 굳이 과거사에 얽매여 전부 부숴버릴 필요가 있을까요? 어차피 이것도 대만의 한 역사이자 문화인 걸요. 그리고 하나 더, 대만에는 아주 오래된 건물들도 굉장히 많아요. 그냥 두죠. 우리는 좀 그렇게 큰 해가 있지 않은 이상 그냥 두는 편이에요. 이해 되죠?”

Ex 1. 금싸라기 땅에 남은 허름한 마을
낡은 건물이 도시 한복판에 있는 것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신 개발지에 옛 공장지대가 있다면 조금 놀랍다. 그리고 그런 일이 새로운 시도가 아니라 아주 당연한 일이라고 여기는 풍토라면 좀 더 놀랍다. 101빌딩 주위는 현재 대만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곳으로 알려져 있다. 명동과 광화문 사이에 오피스텔 한 채를 지으면 수익성이 얼마나 클까 생각해 보면 이 동네의 수익성을 짐작하고 남는다. 실제 차로 한 바퀴만 돌아도 다른 지역에서 보기 힘든 스타일의 최고급 주택과 번쩍번쩍한 빌딩들을 위한 동네임을 쉽게 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한 복판, 주택가의 연결선상 중간 즈음에 갑자기 판자집 무리가 눈에 띈다. 101빌딩과 불과 5분 거리다. 보존을 위해 주위 공원과 팻말 등이 조성된 지는 얼마 안 된 것 같고, 사람이 산 건 오래돼 보인다. 여긴 어딜까?
1949년 장제스(蔣介石)가 대만으로 이주할 때 많은 군인들이 자의 또는 타의로 그를 따라 대만으로 건너왔다. 당시 칭다오에 있던 무기 공장도 타이베이로 옮기게 되면서 공장 주위에 군인과 그의 가족들의 거처가 마련되었다. 즉, 이곳 ‘시시난춘(西西南村)’은 대만 첫 번째의 군사 주거 지역이었던 것이다. 외성인들은 이곳을 임시 거처라 생각하고 1년 안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믿었으나 정치 경제적 상황으로 인해 1999년 시시난춘이 사라질 때까지 머물게 되었다. 사람들은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로 인해 깊은 향수병을 앓았다. 고향을 그리는 노랫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그 때 나온 문학 작품들은 한 때 높은 문학적 가치로 주목 받기도 했다.
타이베이 시는 역사를 보존하기 위해 지난 2003년 10월 집촌 한 지역을 떼어 기념관으로만들었다. 집터와 골목 등을 그대로 두고 몇 군데만 보수하여 과거의 문화를 그대로 보여주는 데 주력했다. 당시 거주자들이 실제 사용하던 집기만을 전시해둔 것도 볼 만하지만 가장 매력적인 공간은 시간 여행을 온 듯한 느낌을 주는 비좁은 골목길이다. 그곳은 마치 앞집으로 터 놓은 또 하나의 창구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문에 기대어 이웃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고 음식을 나누었다. 디렉터 천메이링은 “시시난춘은 당시 외성인들의 삶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소중한 장소입니다.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로도 많이 이용되고 젊은 사람들은 호기심에 사진을 찍으러 많이 와요. 저희는 계속해서 보존해 나갈 생각입니다. 주변 땅값이요? 글쎄, 별 관계 없는데요.” +858-2-723-9777 월요일 휴관

Ex 2. 일제 시대 최초의 영화관이 최고의 문화센터로
대만에는 유독 일본 건물이 많다. 혹자는 이런 추측을 할 지도 모른다. ‘일본이 대만을 평화적으로 지배했나 보지.’ 그런 지배가 있을 수 있나. 일본은 식민 통치력을 높이기로 마음 먹고 대만을 그 시험 무대로 사용했다. 학교에서 일어로 수업하게 하고 독립운동의 기미가 보이면 비밀경찰을 투입해 제거했다. 해외 거주하는 일본군을 위해 남자들을 강제 송환했고 여성들은 위안부로 보냈다. 1895년부터 1945년까지 50년의 식민 기간 동안 일본은 대만의 물자를 국유화하고 동화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역사상 자주 정권이 바뀌어왔던 대만의 눈에 일본은 침략국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지배국이었다. 그리고 긍정적으로 보자면 일본은 대만 경제 성장에 큰 보탬이 된 나라기도 했던 것이다. 여기에 대만인들의 천성인 뛰어난 적응력과 관대함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들은 과거사는 과거사일 뿐, 그들이 남긴 것들이 지금 대만 문화의 한 부분이라고 말한다.
일본의 잔재 중 가장 활발하게 이용되고 있는 것이 ‘시먼홍러우(西門紅樓)’다. 1908년에 지어진 타이베이 최초의 극장인 시먼홍러우는 우리의 명동과 비슷한 번화가인 시먼딩(西門町) 한 중심에 위치해 있다. 2000년 화재로 파손된 십자루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공간이 102년 전 모습 그대로다. 1층은 카페와 전시장으로, 2층은 각종 공연을 위한 무대로 쓰고 있다. 특히 2층은 기둥이 없는 돔 형식으로 지금도 뛰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당시 최고의 서양건축가이자 총통부를 설계한 곤도주로의 실력이 돋보인다. 그러나 무엇보다 시먼홍러우의 장점은 100여 년간 이어온 문화의 향기다. 1950년대에는 경극과 오페라로 매일 밤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졌고 그 문화성이 지금까지 고스란히 이어져 현재도 숱한 공연과 이벤트들이 건물 여기저기에서 진행 중이다. 젊은 층은 이런 즐길거리를 위해 이곳을 찾고, 어르신들은 과거 타이베이 최초의 극장이자 첫 번째 번화가에서 누렸던 즐거움들을 추억하기 위해 이 2층짜리 벽돌 건물로 들어간다. +886-2-2311-9380 www.redhouse.org.tw 월요일 휴관

Ex 3. 염색집의 붉은 벽돌 위로 흐르는 세월
대만의 보존술을 증명하는 또 다른 보물은 싼샤(三峽)에 있다. 싼샤는 타이베이에서 22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도시로, 차로 30분이 채 되지 않으니 꼭 가 보라. 당신이 타이베이 집중 여행자라도 그 정도 융통성은 발휘하기 바란다. 아날로그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낡은 것을 보고 가슴 떨리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싼샤에는 오래된 거리인 라오지에(老街)가 있다. 도시마다 오래된 거리는 한 두 곳쯤 있게 마련이지만 싼샤의 라오지에는 좀 다르다. 정부에서 4억 대만 달러(약 150억)를 투자해 허름한 옛 길을 아름다운 시가로 만들었다. 작은 벤치, 하수구 뚜껑, 문패 등 아주 소소한 곳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 이 시도는 마치 낡은 거리가 여행자에게 얼마나 큰 즐거움을 줄 수 있는지 시험하는 듯하다. 개인적으로 싼샤 라오지에에 대한 정부의 노력은 성공했다고 본다. 투자처가 적당했고 이미지 개선이라는 충분한 수익을 얻었으니 말이다.
싼샤는 청나라 때 여러 강을 통한 물자 집산지로 번영을 누렸기 때문에 천이 많이 들어왔고, 사람들은 이 거리에 염색 작업실을 두고 손으로 염색해 색색의 천을 만들어 냈다. 염색 작업실뿐 아니라 지물포, 약재상 등 여러 점포가 있어 싼샤를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곳을 찾았다. 거리 양쪽에는 바로크식, 일본식, 그리고 대만의 옛 스타일이 섞인 붉은 벽돌 건물이 길게 늘어서 있다. 똑 같은 건물들이 나열된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조금씩 다르고 그 차이는 아주 작은 빈부의 차를 보여준다. 싼샤에서 60여 년을 산 싼샤 터줏대감 李景文 씨의 설명을 들어보자. “비교적 큰 건물을 보면 기둥이 많고 위쪽에 벽돌 장식이 있어요. 그냥 지나치면 모를 정도로 소박하죠. 그게 성황을 이룬 가게라는 표시예요. 화려하게 튀지는 않지만 은근히 티를 낸 거죠. 이런 게 싼샤 사람들의 지혜였어요.” 싼샤 라오지에의 또 다른 매력은 간판이다. 빵집은 빵, 옷 가게는 옷, 그릇 가게는 그릇을 간판에 붙이거나 그려 간판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했다. 간판 쳐다보다 해가 지는 경험도 해 본다. 그렇게 길을 천천히 걸으면 60년대를 살아보지 않아도 아마 이랬을 거라는 실감이 날 것이다. 제대로 보존한 덕에 외국인은 기분 좋은 시간여행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