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in Madrid

4월 21일, 스페인 마드리드
인천 국제공항. 나와 고교시절 친구 C는 함께 마드리드 행 직항 노선에 오르고 있었다. 우리의 목적지는 스페인이고, C는 스페인에서 함께 2박을 한 뒤 영국으로 떠나, 프랑스를 거쳐 바르셀로나에서 출국 3일 전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우리들은 처음 떠나는 유럽 여행에 각자 부푼 꿈을 안은 채 비행기 좌석 등급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앞으로 열 두 시간을 함께 할 좁고 아늑한 이코노미석에 몸을 실었다. 이때가 4월 19일이다.

현재 홍익대학교에서 예술학을 공부하고 있다. 입학 후 학교 수업과 미술관, 공연장 등에서의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돈을 모아 두 번의 해외여행을 떠났다. 현지인들이 즐기는 전시나 공연, 영화, 스포츠 등을 찾아다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며 생각과 행동의 반경을 넓혀가는 중이다. 후에 이런 경험과 추억들을 어떤 형태로든 완성해 이를 경험하지 못한 다른 이들에게 감동을 담아 전달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여러 방면으로 공부하고 있다.
정진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우리의 여행 계획은 한참 전부터 진행되었는데, 돈도 시간도 없는 우리에게 이런 여행을 할 수 있도록 영향을 준 것은 군 입대였다. 사이좋게 신검을 받고 현역 판정을 받은 뒤 ‘입대 전에 한번은 나갔다 와야 하지 않겠냐’며 말뿐이던 계획을 빠르게 진행하기 시작했다. 결국 우리는 모두 대학 2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결정, 3학년 1학기가 개강하던 어느 봄날에 비행기에 올랐다. 사실 나는 미술, C는 영문학을 전공하고 있었고, 여행 또한 전공 공부에 도움이 되는 것을 바랐기 때문에 어떻게 C가 스페인 행에 동행하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가 친해지게 된 계기가 가물가물한 것처럼.
우리가 체류할 수 있는 기간은 대략 3주, 그러니까 21일 정도였다. 처음엔 유럽 투어를 해볼까 하다가 이전 해 여름에 일본으로 홀로 여행을 다녀온 뒤 그런 여행은 겉핥기식이라는 영양가 없는 고집이 생겨 3주간 나라 한 곳만을 집중적으로 여행하기로 했고, 결국 스페인 행이 결정되었다. 사실은 이탈리아나 그리스에 가고 싶었지만 그러기에 21일은 너무 짧았다. 영국은 물가가 비싸고, 프랑스는 안 가본 사람이 없고, 동유럽은 유로화가 통용되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수많은 후보들을 탈락시킨 뒤에야 대안으로 제시된 스페인이었지만, 막상 다녀온 후의 그 만족감은 어디에도 비할 수 없었다. 물론 다른 곳들을 가보지 않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21일이라는 시간 동안의 스페인은 여행의 가장 적당한(?) 느낌인, ‘시원섭섭함’을 딱 알맞게 안겨 준 기분이었다. 마드리드로 들어가 돈키호테의 배경인 카스티야 데 라 만차 지방을 지나왔고, 남부로 향하며 꼬르도바, 세비야, 카디즈를 거쳐 남쪽 끝까지 내려간 뒤 동쪽 해안을 따라 발렌시아와 바르셀로나에서 지내며 그곳의 수많은 사람들과 여행하는 외국인들을 만났다. 건축과 미술, 연극이나 무용 공연을 봤고, 때로는 영화관에 들어가 스페인어로 상영되는 영화를 봤으며, 바다와 맞닿은 곳에서 지중해의 매력을 만끽하기도 했던 기억들이 난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산더미 같지만, 그 중 스페인의 ‘첫인상’을 남겼던 마드리드에서의 하루에 대해 적어보려고 한다.

 루카 지오다노 전시장에서 나와, 우리는 바로 길 건너편의 부엔 레티로 공원으로 향했다. 시간은 벌써 점심때를 넘어서고 있었는데, 여행 초기의 의욕적인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한 우리들은 당연하다는 듯 점심을 먹지 않는 것으로 암묵적인 합의를 마친 상태였는지 아무도 끼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오토바이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이 오토바이를 본 순간부터, 오토바이를 렌트하건 구입하건 한 대 구해서 다니고 싶다는 욕망이 여행 내내 솟구치곤 했다. 하지만 아무리 낮은 cc의 스쿠터를 빌린다고 해도 국제 운전면허증을 요구해서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설마 여행지에서 운전면허증이 필요할까 싶었는데. 일본에서 자전거를 타고 여행했던 것처럼 현지화된 이동수단을 만끽하고 싶었는데, 정말 아쉬웠다.

 가톨릭 신자가 전체 인구의 70퍼센트를 넘는 만큼, 곳곳에서 보이는 조각들은 대부분 기독교의 다양한 관련 인물이나 주제들을 다루고 있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었지만. 
 

넓은 호수를 끼고 있는 부엔 레티로 공원은 우리나라의 올림픽 공원 정도로 매우 넓은 곳이며, 알폰소 12세를 기념하는 동상을 비롯해 공원 곳곳의 조각, 크리스탈 궁전과 같은 볼거리들, 널찍한 산책길 등이 매력적인 장소다. 그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것은 공원 안의 호수를 바라보는 알폰소 12세의 기념 구조물이다. 알폰소 12세는 19세기 중후반, 스페인 혁명 이후 국가 재건을 위한 왕정복고와 함께 1대 왕으로 등극하였는데, 10년 정도의 짧은 재위 기간을 마치고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지만 혁명 이후 황폐해진 스페인을 재건하는데 큰 밑바탕을 만든 인물이다. 이 호수는 무척 넓어서 한 바퀴 죽 돌아볼 마음으로 걷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녹초가 되어 포기하게 될 정도다.

공원 깊이 들어가 미로 같은 장미 정원과 산책로들을 거쳐 우리는 크리스탈 궁전에 도달했다. 식물원 같은 느낌의 이 건물은 국립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의 특별 전시장으로 쓰이고 있었다.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은 주로 현대의 작품과 작가들을 다루고 있는 곳인데, 이 별관 또한 마찬가지로 현대 작가를 다루는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전시는 막달레나 아바카노비치라는 폴란드 여류 작가의 개인전이었는데, 여러 장의 브론즈를 이어 붙인 조각의 재질감과 그 느낌에 어우러지는 초현실적인 형태가 상당히 묘한 느낌을 주는 작품들이었다. 전시 브로슈어를 보니 상당히 저명한 조각가로 뉴욕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잘 알려진 사람이었다. C가 “아는 사람이냐”고 물어보길래 “내가 어떻게 알아. 옆집 사는 것도 아니고”라고 대답했다. 다시 C의 대답이 돌아왔다. “등록금을 어디다 쓴거야?”

 주로 개인 소장품들을 전시해 놓은 티센-보르네미자 미술관은 3대 미술관 중 그나마 작은 편이었지만, 오후 내내 보았음에도 끝내는 다 보지 못했다. 우린 가장 위에서부터 천천히 내려오면서 그림을 보았는데 -오전 내내 공원을 걸어다녔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힘을 덜 써볼 요량이었다- 두어 시간쯤 지나자 C가 칭얼대기 시작했다. 열심히 그를 달래며 나머지 소장품들을 빠르게 관람하고 1층에서 전시 중인 모딜리아니와 오토 딕스의 특별 전시를 보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학생 할인을 받은 입장료가 저렴하게 느껴지는 수많은 종류의 작품들, 양과 질, 디스플레이 하나에도 섬세하고 독창적인 감각이 담긴 특별 전시 등에는 C도 그럭저럭 만족한다는 평을 내렸다. 이럴 떄 아니면 생전 미술관 갈 일이 없을 거라는 C가 이정도로 참아주어 한편으로는 대견하기도 했다.

그렇게 공원을 나서 우리는 다시 마드리드 중심가도 되돌아왔다. 중간에 줄이 너무 길어 들어가지 못한 아쉬움을 남긴 프라도 미술관의 건물을 구경하고 길가의 카페에서 보카디요(바게트 모양의 긴 샌드위치)를 하나 사 생수 한 통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그리고는 마드리드 3대 미술관 중 한 곳인 티센-보르네미자 미술관에 들러 오후를 보냈다.

 우리는 저녁을 굶기로 한 뒤 숙소로 들어갔다가 결국 밤이 깊어서야 주린 배를 부여잡고 다시 나와 맥도날드에 들어가고 말았다. 햄버거는 뭐랄까, ‘이것이 유럽의 맛인가’ 싶은 느낌의 요상한 맛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니 먹을 만 했다. 모든 메뉴에 추가로 베이컨 토핑이나 감자튀김을 통감자로 바꾸는 방식의 옵션은 우리나라와 다른 점이었다. 나중에는 버거킹도 들렀는데, 탄산음료와 함께 맥주를 판매하기도 했다. 방으로 돌아와 텔레비전을 켜 보니 숀 코네리가 유창한 스페인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영화 더 록(현지에서는 La Roca)였다. 우리는 그의 유창한 외국어 실력(?)에 감탄하면서 잠에 빠져들었다. 내일 가게 될 톨레도의 지도와 기차표를 바닥에 흩어 놓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