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through the Culture & Art
당신에게 건네는 쉼표 한 장

지우펀(九汾)에 올라서니 반가운 바람이 분다. 넘실대는 이국의 붉은 등불 사이로, 객에게 건네는 따뜻한 차 한 잔 위로. 숨 가쁘게 돌아가는 일상을 뒤로하고 찾아간 타이베이현에는 문화와 예술이 녹아든 여유로운 바람이 있었다.

타이베이현과 타이베이시가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우리는 ‘타이베이는 대만의 수도’ 라고 단순하게 인식하고 있지만 타이베이라는 명칭은 시와 현으로 나뉘어 있고 그 모양새는 우리의 서울과 경기도를 꼭 빼닮아 있다. 타이베이현과 경기도는 참 닮은 구석이 많다. 수도를 동그랗게 감싸 안은 모양새부터 수도까지 이어지는 편리한 교통, 조용하고 쾌적한 자연경관을 간직하고 있기에 예술인들의 사랑을 받는 주거지라는 점까지. 그리하여 대만에서 예술가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곳이 타이베이현이고 이는 이곳의 문화, 예술이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옛 거리를 거닐다. 싼샤(三峽) 붉은 벽돌집들이 길게 늘어선 옛 거리를 바라보며, 지나간 것들이 전하는 따스함은 전 세계 누구에게나 통하는 것이라는 진리를 떠올린다. 해가 잘 드는 골목 어귀에서 세월을 태우는 노인의 담뱃대, 느릿느릿 시간을 밟는 자전거. 정부의 투자로 이 오래된 거리는 재건축과 보수공사를 더해 1916년의 모습이 그대로 재현되었고 이제는 명실 공히 타이베이현의 관광명소가 되었다. 허나 알짜는 좀 더 안에 있는 법. 진정한 이 거리의 옛 모습을 느끼고 싶다면 붉은 상점가 사이로 이어진 좁은 골목들을 들여다보자. 촘촘히 이어진 좁은 골목들을 걷다보면 현재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상을 들여다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직접 염색 체험을 할 수 있는 집들을 만날 수 있다. 이 거리는 예로부터 염색집이 유명했다.
싼샤 지역의 염색예술은 중국 푸젠성(福建省) 안시(安溪)에서 유래되었다. 안시의 이민자들이 현지의 환경과 기후 등을 만나 적합한 염색 재료를 기르면서 천을 염색하기 시작했고, 과거 싼샤가 3개의 강을 통해 물자를 운송한 상업도시였다는 점에서 이 거리의 염색 예술 발달이 야기되었다.
체험을 원한다면 염색방법은 간단하다. 먼저 천을 원하는 모양대로 접고, 색이 물들지 않길 바라는 부분에는 나무막대를 대어 고무줄로 단단히 동여맨다. 염색액-말란(馬蘭)이라는 식물을 원료로 하여 푸른색이 물든다.-에 담갔다 빼서 산소와 골고루 접촉시킨다. 최소 3번 반복한다. 천을 펼치고 바람에 건조한다. 끝이다. 이 단순한 작업은 손재주가 좋으면 30분, 그렇지 않더라도 1시간 안에 이루어지고 완성된 푸른 천은 집으로 가져갈 수 있다. (싼샤염색공방 - 화요일에서 금요일까지는 500위안씩 체험료를 받지만 주말은 무료. 월요일은 스무 명 이상의 예약자가 있을 때만 문을 연다.
TEL : +8862-86713108 http://www.sanchiaoyung.org.tw)

자연과 예술의 조화. 주밍 미술관(朱銘美術館) 주밍은 1938년, 가난한 집안의 11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생활이 어렵다는 이유로 어린 주밍을 마을의 목각 기술자에게 보내지만, 본의 아니게 시작한 조각이 그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는 계기가 된다. 남다른 손재주로 이른 나이에 기술자로 성공한 주밍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당시 유명한 조각가 양잉펑(楊英風)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는데, 그로부터 8년 후 열린 데뷔전으로 그의 이름은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진다.
타이베이현 북부 진산(金山)에 이 천재조각가 주밍의 놀이터가 있다. 주밍미술관은 3만2000평 부지 위에 세워진 350여 점의 작품들이 맞이하는 거대한 공원형 미술관으로,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길을 따라 그의 역동적이고 힘찬 작품들을 만나다 보면 미술관이라기보다 어느 소풍길 산책로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입구에 들어서면 어린 시절 본 군인들을 떠올리고 작업했다는 인간시리즈-주밍은 작은 나무 조각에서부터 인간을 조각하기 시작하여 점차 커다란 크기의 다양한 인간들을 조각해 나갔다-중 군인시리즈를 만나게 되는데 인간의 기억만을 의존해서 만들었다 하기에는 손으로 짠 짚신까지 정확히 묘사되어 있어 그의 비상한 통찰력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작업방법 또한 흥미롭다. 그는 커다란 스티로폼을 단번에 칼로 내리쳐 조각을 완성하고, 완성된 원본에 청동을 부어 오브제를 완성시킨다. 아주 얇게 부어 만들기 때문에 오브제에는 재료의 질감이 살게 되는데, 그래서인지 인간시리즈에서 보이는 스티로폼의 단면이나 나무 한 그루를 잘라 만들었다는 태극시리즈의 질감은 보는 이에게 독특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바람이 드나드는 곳. 주펀(九汾)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기억하는지. 평범한 열 한 살짜리 소녀는 우연히 길을 잃고 낡은 터널로 들어서게 되고, 그곳을 지나자 낯설고 신비로운 세상과 만나게 된다. 바람이 빨려 들어가던 붉은 터널. 미야자키 하야오는 주펀에 와서 보고 느낀 모든 것들을 녹여 이 영화를 빚었다.
본래 주펀은 청나라 시대부터 광산으로 유명했다. 한때는 엄청난 양의 금과 은을 생산해 냈지만, 일제시대 이후 광량이 줄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죽어가던 이 지역을 살린 건 관광업이라는 새로운 바람이었다. 좁고 가파른 지형과 옛 광산마을이 어우러진 이색적인 분위기는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았고, 한때 홍등가로 이름이 알려져 있던 오래된 거리에는 밥집과 찻집이 들어서면서 활기를 되찾았다. 지금은 황금박물관지역(黃金博物園區)에서 광산촌의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주펀의 옛 거리에 올라서면 마음을 설레게 하는 바람이 분다. 예로부터 주펀의 사계절은 춘운(春雲-봄 구름), 하해(河海-여름 바다), 추망(秋芒-가을 억새), 동무(冬霧-겨울 안개)를 절경으로 꼽으며 풍류를 즐기는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거리마다 걸려있는 붉은 등과 좁은 골목길, 왁자지껄한 시장통을 뒤로 하고 오래된 건물 사이로 구불구불 펼쳐진 돌계단을 오르다 보면 눈앞으로 펼쳐지는 시원한 바다풍경에 나그네의 심신은 위로받는다. 이렇듯 주펀은 독특한 거리의 풍경 때문에 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배경으로도 유명하여 거리를 지나다 보면 이곳에서 촬영한 작품의 포스터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비전성시’의 배경이 되기도 했으며 우리나라 드라마 ‘온에어’의 촬영장소로도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