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NGARIRO ALPINE CROSSING
여전히 꿈틀대는 뜨거운 땅을 오르다

세계적인 등반가 조지 말로니는 산을 오르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곳에 산이 있기 때문에(Because it is there)'라고. 그의 말을 빌려 기자도 말하련다. 4시간이 넘는 길을 달려간 건 오직 그곳에 통가리로 국립공원이 있기 때문이었다고. 천 년을 살아온 원주민 마오리 족의 역사가 숨 쉬고, 대자연의 경이로움이 꿈틀대는, 황량하지만 시리게 아름다운 그 뜨거운 땅을 꼭 한번 걷고 싶었다고.

글을 통해 몇 번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기자는 게으르다. 산과 바다 중 바다를 좋아하게 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바다에서는 산에서처럼 땀 흘려가며 정상을 향해 힘겹게 오를 필요가 없으니까. 이런 기자가 뉴질랜드 일정에 과감히 하루짜리 트레킹 코스를 넣었다. 통가리로 알파인 크로싱(Tongariro Alpine Crossing), 활화산을 걷는 특별한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용기를 냈지만, 막상 오르려니 만만치 않은 코스에 후회가 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트레킹을 마치고 난 뒤(단 한 번의 경험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부끄럽지만), 어렴풋하게나마 등산가들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산에서 내려와 바라본 그곳은 오르기 전 그저 멋있는 풍광쯤으로 여겼던 그 산이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발을 내딛고 살아가는 이 땅 역시 늘 벗어나기를 갈망했던 삭막함만 가득한 곳은 아니었다.

마오리 족의 영산(靈山)을 만나다
오클랜드(Auckland)를 출발해 북섬 남서부를 향해 달린다. 차창 밖으로 드넓은 초원이 펼쳐지고 말과 소, 양이 풀을 뜯는 풍경이 내내 이어진다. 인적도 드문, 그저 평화로운 뉴질랜드 대자연의 모습이다. 그러다가 얼핏 잠이 들었던 것 같다. 4시간 남짓 되었을까, 일행이 내지르는 탄성에 눈을 뜨니 만년설이 쌓인 산봉우리에 구름을 얹은, 장엄한 산의 형상이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바로 세계 최초로 자연유산과 문화유산 두 곳에 등재된 통가리로 국립공원(Tongariro national park)이다. 뜨거운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땅밖으로 솟아오른 용암은 뉴질랜드 곳곳에 명소를 만들어 놓았다. 통가리로 국립공원 역시 그 중 하나로, 이곳에 자리한 루아페후 산(Mt. Ruapehu, 2,979미터), 나우루호에 산(Mt. Ngauruhoe, 2,291미터), 통가리로 산(Mt. Tonggariro, 1,967미터)등 각기 다른 세 개의 화산은 다채롭고 경이로운 화산지대의 묘미를 뽐내며 매년 수만 명의 여행각을 이끈다. 이곳이 더욱 특별한 건 이 세 산이 여전히 활동 중인 활화산이라는 사실이다. 가장 최근의 화산 폭발은 1996년에 있었던 루아페후 산으로, 화산의 폭발로 형성된 용암지대와 증기가 솟아오르는 분화구, 화구호 등을 감상하는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원래 이 땅은 마오리 족이 지배하던 곳이었는데, 1887년 마오리 부족장은 이곳을 뉴질랜드 정부에 기증했고, 이후 뉴질랜드 최초의 국립공원이 조성되었다.
이 황량하면서도 숨 막힐 듯 아름다운 절경 속에서 우리를 태운 차가 멋들어진 건물 앞에 멈춘다. 우리가 묵을 호텔인 베이뷰 샤토 통가리로(Bayview Chateau Tongariro)다. 장엄한 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동화 속에나 나올법한 아름다운 이곳은 1929년 문을 연 통가리로 국립공원 내 유일의 4성급 호텔이다. 고급스러운 객실과 클래식한 뉴질랜드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레스토랑, 구름이 산봉우리를 뒤덮은 나우루호에 산의 장관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라운지 바 등을 갖추고 있으며 웅장한 산을 바라보며 골프도 즐길 수 있다. 이곳 외에도 국립공원 내에 산장이 있으며 주변으로 몇 개의 호텔이 자리하고 있어 통가리로 알파인 크로싱에 도전하기 전 휴식을 취하기에 좋다.

대자연의 경이로움이란 이런 것
다음날 아침, 통가리로 알파인 크로싱의 출발지인 망가테포포(Mangatepopo) 주차장으로 향한다. 그곳에 도착하니, 오늘 우리와 함께할 등반가이드 칼과 영국인 부부가 기다리고 있다. 통가리로 국립공원은 북섬에서 가장 유명한 트레킹 지역으로, 이곳에는 화산지대를 둘러보는 짧은 코스부터 4일에 걸쳐 나우루호에 산의 외곽을 도는 통가리로 노던 서킷(Tongariro Northern Circuit), 루아페후 산 기슭을 일주하는 6일 일정의 라운드 더 마운틴 트랙(Round the Mountain Track) 등 다양한 코스가 마련되어 있다. 그중 우리가 도전할 통가리로 알파인 크로싱은 하루 동안 나우루호에와 통가리로 사이, 총 19.4킬로미터의 화산지대를 횡단하는 코스로,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단거리 코스다.
곳곳에 구름이 끼긴 했어도 다행히 등산에는 무리가 없는 날씨였지만, 산의 기후라는 것이 워낙 변덕이 심한지라 만약을 위한 우비와 따뜻한 재킷, 점심 도시락을 넣은 배낭을 메고 그곳으로 발길을 내딛는다. 푸른 나무 숲 대신 화산 폭발 당시 뿜어져 나온 화산재로 뒤덮인 검붉은 산봉우리가 반기는 거친 땅. 나무 한 그루 조차 자라지 않는, 황량하기 그지없는 이곳에서 이름 모를 꽃과 식물들이 꿋꿋하게 피어나고, 암벽을 타고 솟아나는 샘물이 폭포를 이루며 졸졸 흘러내리는 모습은 여느 자연에서 본 그것보다 몇 배의 감동을 준다. 이곳에는 우리가 산에서 흔히 보던 식당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의자 하나도 없다. 사람의 손길이 닿은 것이라곤 간이 화장실, 몇 개의 산장 그리고 사람들의 발길로 인해 자연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한 보드 워크와 안내판이 전부다. 쉬고 싶으면 그 자리에 주저앉으면 되고, 배고프면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으면 그만이다. 아무것도 갖춰지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이곳은 그래서 완벽한 자연 속에 있는 경이로움을, 그리고 당연한 듯 여겼던 도심 생활의 편리함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아직 식지 않은 그곳을 향해
암벽에서 솟아나는 폭포인 소다 스프링스(Soda Springs)까지의 비교적 평이한 코스를 지나면 본격적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마음을 다잡고 오늘의 목적지를 향해 오르는 길, 시간이 지날수록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숨이 목 끝까지 턱턱 차지만 흘러내리던 용암이 식어서 형성된 용암지대와 사방에 널린 화산암이 만들어낸 놀라운 풍경은 피곤함을 잊게 한다.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용암의 흔적은 나우루호에 산이 폭발했을 당시 흘러 내린 것으로, 1975년, 1954년, 1949년 등 화산 폭발 시기에 따라 검은색, 짙은 갈색, 갈색 등으로 구분되어 해가 쨍하니 비치는 날에는 다양한 빛깔의 요암류를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처음 망가테포포를 출발한지 2시간여, 드디어 완만한 지대가 나타난다. 거대한 화산 분화구인 사우스 크레이터(South Crater)다. 나우루호에 산을 곁에 두고 드넓게 펼쳐진 이곳은 그 크기가 축구경기장 다섯 개에 달한다고 하니, 당시의 화산폭발은 얼마나 큰 규모였던 걸까? 살짝 굳은 진흙땅을 밟듯이, 푸석거리는 느낌의 평지를 걸으며 놀라운 화산의 흔적을 만끽하고 나면,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레드 크레이터(Red Crater)로 가는 길이 시작된다. 해발 1,886미터, 1897년과 1926년에 엄청난 화산재를 뿜어냈다는 레드 크레이터로 가는 길은 워낙 경사가 급하고 미끄러워 상당한 체력이 요구된다. 날씨가 궂은 날에는 사우스 크레이터에서 발길을 돌려야 하지만, 오늘 이 산은 우리에게 그 진귀한 모습을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나보다. 몸이 휘청거릴 만큼 강한 바람이 불긴 하지만, 오전에 가득했던 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내리쬐는 맑은 날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비탈길을 따라 올라간 지 1시간, 드디어 붉은빛의 분화구, 레드 크레이터가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은 증기만을 뿜어내는 시뻘건 빛깔의 분화구가 선사하는 장엄한 풍광. 달걀이 썩는 듯한 유황 냄새와 곳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가 당장에라도 다시 거대한 폭발음을 터트릴 듯이 꿈틀댄다.

자연에 건네받은 선물
레드 크레이터를 넘어가면 또 다른 절경이 기다리고 있다. 이름처럼 환상적인 빛깔을 뽐내는 3개의 화구호인 에메랄드 호수(Emerald Lakes)가 그것으로, 황량한 화산에서 만나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호수는 신비로움마저 전해준다. 푸르른 호수 색깔은 땅속의 광물질에 의한 것이라고. 에메랄드 호수 왼쪽으로는 블루 레이크(Blue Lake)가 반짝이고, 블루 레이크 너머로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폭발이 있었던, 뉴질랜드 최대의 호수인 타우포(Taupo)가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 2시간 정도를 더 투자하면 통가리로 산 정상까지 갈 수 있으며, 계속해서 통가리로 알파인 크로싱의 트랙을 따라가려면 에메랄드 호수 쪽으로 내려가 케테타히(Ketetahi)주차장까지 가면 된다. 기본 트랙을 따라 에메랄드 호수를 가까이서 보고 이후에 이어지는 편안한 내리막 숲길을 걷고 싶었지만, 주차해 둔 차 때문에 우리 일행은 이곳에서 방향을 돌려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 가야 했다. 아쉽지만 되돌아 가는 길에서의 재미 또한 쏠쏠하다. 올라갈 땐 미처 몰랐는데, 오른 길을 다시 내려가려니 내가 이렇게 험한 산을 올라왔나 싶은게 스스로 대견하기도 하고, 한발 한발 힘겹게 내려와 레드 크레이터를 지나 사우스 크레이터로, 다시 솯 스프링스로 가는 동안에는 구름 낀 오전에 보여주지 않았떤 웅장한 풍경이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오전 8시 30분에 시작한 통가리로 알파인 크로싱은 오후 4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다음으로 기다리는 건 노곤해진 몸을 푹신한 호텔 소파에 기댄 채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마시는 여유. 차 별거 아닌 것 같았던 일상에서의 모든 것이 그렇게 소중하게 느껴질 수가 없다. 다음 날 아침, 힘겹게 눈을 떠 바라본 창밖에는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고, 자욱한 안개로 나우루호에 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단순히 날씨 운이 좋았다고 하기엔 너무나 절묘한 타이밍에 생각한다. 어쩌면 지금껏 산의 묘미도 모른 채 살아온 한 게으른 인간에게 신이 자연의 위대함을 보여주고자 날씨를 허락했던 건 아니었을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