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의 동쪽, 과일이 익어가는 계절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은 이렇게 시작한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이 흡입력 강한 문장을 읽으며 정작 궁금한 게 하나 있었다. 그럼 터널로 들어가기 전에는 뭐가 있지? 바로 과일이 익어가는 계절의 군마 현이다.

글/사진 김지은 취재협조 화인존 02-725-8233 www.finejapan.co.kr

아마도 미나카미라는 지명 자체가 생소할 것이다. 인터넷을 찾아봐도 자세한 정보가 거의 없으니. 미나카미를 여행하며 일주일 전에 써놓은 메모를 그대로 옮겨보면 이렇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주인공이 여름방학을 보내는 시골 할머니 댁 같다‘ 막상 그 영화의 제목이 떠오르지 않는 걸 보니 아마도 여러 작품이 뒤섞인 모양이다. 참 무책임하게 써놓은 한 줄이지만 여름방학의 설렘, 시골 마을의 넉넉함, 할머니 댁의 포근함 정도면 대략적인 느낌은 전달되었으리라.

마법이 일어나는, 슈쿠바 거리
역시 여행할 때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머물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감정을 이입했는가’이다. 고작 2시간 정도 머무른 거리일 뿐인데 가장 기억에 남는 걸 보면 말이다. 시작점에 섰을 때 사막이었던 마음을 끝자락에 와서는 햇살 가득한 들판으로 바꾸어 놓았으니. 이것은 다른 말로 감동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는데 사람에게서 받은 그것보다 진한 것은 없는 것 같다. 바로 미나카미 장인마을에 있는 슈쿠바 거리 이야기다.
이곳은 미나카미 장인 마을의 대표적인 길로 양쪽에 집과 상점들, 알록달록 만발한 꽃들, 그리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조화를 이뤄 마치 동화 속 마을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이런 상상을 깨주는 것은 길을 걷다 만나게 되는, 그 시냇물에서 빨래하며 실제 살아가고 있는 마을 주민이다. 하지만 정작 이들과 마주하면 오히려 아름다운 풍경보다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이방인을 보고 먼저 곤니찌와~하며 인사를 하는 아이들과 갑자기 카메라를 들이대도 환하게 웃으며 브이를 해주는 사람들에게서 요즘 세상에 흔하지 않은, 무장 해제된 따뜻한 빈틈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실 미나카미는 일본 내에서 관광지로 통한다. 자연의 축복을 받은 곳이니 별의별 사람들이 몰려드는게 당연할 텐데도 경계심이나 관광지 특유의 가식이 느껴지지 않는다. 미나카미는 군마현에서 가장 넓지만 주민 수가 2만 3천 명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끼리의 친밀감이 매우 깊다. 실제로 일정을 함께했던 하야시 상은 슈쿠바 거리에서 유치원과 고등학교 때 은사님 두 분을 우연히 만나 반갑게 손을 잡고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눴다. 아마도 미나카미 마을 사람들은 관광객에게도 이와 비슷한 마음으로 다가서는 것 같다. 덕분에 슈쿠바 거리를 걸었던 관광객은 누구나 마법에 걸린다. 햇살 가득한 들판이 마음 안에서 넘실거린다는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하게 만드는.

 보석으로 가득 찬, 장인 마을
슈쿠바 거리를 보았으니 이제 시야를 더 넓혀 8.5킬로미터에 이르는 장인마을을 전체적으로 둘러볼 차례다. ‘일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장인정신’이다. 그만큼 일본 곳곳에 장인들이 많이 있는데 실제로 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부담스럽거나 다가가기 어려운 존재는 아닌 것 같다. 적어도 미나카미에서는 말이다. 이곳에는 일반인이 장인의 도움을 받아 전통기술을 체험해 볼 수 있도록 마련한 프로그램들이 운영되고 있다. 혹시 초등학교 앞이라면 대부분 하나씩 있는 뽑기를 기억하는지? 홈에 동전을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 투명한 통 안에서 장난감 반지, 찐드기, 심지어 먹는 엿까지 별의별 물건이 다 나오는 보석상자 같은 것 말이다. 장인마을을 표현하기에 다소 가벼운 예일지는 모르겠지만 아기자기한 다양성을 설명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건 없을 것 같다. 연간 5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미나카미 장인 마을에는 20여 개의 체험 공간이 있는데 목공, 죽세공, 도예, 인형 등 그 종류가 무척 다양하다. 거리를 지나다가 눈과 발걸음이 멈추는 순간, 지체 말고 안으로 들어가 체험해보길 권한다.
식사 때마다 특별히 생각나는 게 없으면 “냉 모밀이나 먹을까?”라고 외쳐 “이제 지겹지도 않냐.”는 소리를 듣곤 하는 필자가 경험한 체험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나 슈쿠바거리 끝자락에 있는 농악관의 ‘소바 만들기’. 미나카미는 주로 밀과 벼로 2모작을 하기 때문에 우동, 국수, 과자 등 밀가루로 만든 음식이 발달했는데 소바 역시 예외는 아니다. 최고의 소바를 만들겠다는 당찬 포부로 3인 1조가 되어 앞치마를 둘러메고 반죽부터 시작했다. 메밀에 물을 붓고 손가락으로 살살 쓸어준 후에 적당히 돌려가며 손바닥으로 눌러주니 어느새 동글동글 연둣빛을 띤 반죽이 완성되었다. 그다음은 반죽을 밀대로 얇게 펼 차례. 그런데 이게 바로 예상치 못했던 난코스였다. 너무 힘차게 밀면 반죽끼리 접히거나 한없이 늘어져 순간적으로 찢어져 버리기 때문. 따라서 적절한 힘 조절이 필수다. 그 후에 반죽을 고이 접어 커다란 칼로 썰어 면발을 만드는데 최대한 얇게 써는 것이 요령이다. 이렇게 완성된 메밀을 옆에 있는 주방에 가져가면 바로 삶아 주는데 새우튀김을 추가로 주문해 함께 시식할 수 있으니 되도록 점심때 방문하기를 권한다. 그리고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 한 가지! 역시 이 세상에는 장인이나 전문가가 꼭 필요하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매일 내가 만든 두툼하고 수제비같이 뚝뚝 끊어진 맛없는 소바를 먹어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새삼 미나카미의 장인마을에 대해 떠올려보면 이름과 어울리는 진중함보다 이상하게도 상큼 새콤한 느낌이 앞선다. 아무래도 마을 곳곳에서 심심치 않게 마주했던, 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과일들 때문인 것 같다. 과일이 익어가는 계절에 미나카미에 다녀왔다는 것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커다란 행운이었다. 미나카미의 과일은 깨끗한 토질과 수질 그리고 공기 속에 성장해 품질이 우수하기로 정평이 나 있기 때문이다. 딸기, 포도, 사과, 복숭아, 블루베리 등 계절에 따라 다양하게 수확되는데 특히 일본에서 최고급이라고 평가받는 앵두를 생산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농가 중에는 과일 따기 체험을 할 수 있는 곳도 있으니 미나카미에 간다면 밑에 있는 홈페이지를 참고해 꼭 한번 방문해 보기를 권한다.

미인이 그곳에 가는 이유
지금까지 소개했던 미나카미의 명소들, 아깝긴 하지만 모두 잊어도 좋다. 극찬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이러냐며 황당해할 수도 있겠지만 이해해 주시길. 미나카미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온천’ 역시 독자들 감정을 자극해서라도 가슴속 깊이 심어주고 싶기 때문이다. 미나카미에는 총 17곳에서 온천수가 샘솟는다. 그리고 그 성분이 조금씩 달라 효능도 천차만별인데 기본적으로 알칼리성 수질을 띠고 있고 온도가 적당해 오랫동안 몸을 담그고 느긋하게 쉴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덕분에 즉각적으로 병을 치료한다거나 하는 마법의 효과는 기대하기 어렵지만 장기간 요양을 할 수 있어 근처에는 온천 병원이 성행 중이다. 특히 미나카미의 온천수는 각질 제거 효과가 있기 때문에 피부에 관심이 많은 여자에게 좋다. 그뿐만 아니라 수분 막을 형성해주는 온천들도 곳곳에 있어 두 종류의 온천에 차례대로 몸을 담그면 반들반들 촉촉한 피부를 가질 수 있다.
호우시 온천도 클렌징 효과가 있는 곳 중의 하나다. 이곳은 순례 중이던 홍법대사가 우연히 발견한 곳인데 150년 전에 세워진 모습 그대로 여전히 사용되고 있으며 건물 몇 채는 유형 문화재로 등록되기도 했다. 호우시 온천으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자연 속으로’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도로 위에 야생 원숭이 가족이 소풍을 나왔는가 하면 토끼와 사슴을 볼 수 있는 것은 예사고 가끔 곰도 출연해 가슴을 덜컹 내려앉게 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핸드폰의 전파가 닿지 않아 벙찌는데 한편으로는 산속의 자연과 어우러져 고즈넉한 일본의 정서를 마음껏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 그래서인지 그동안 호우시 온천에는 요사노 아키코, 와카야마 보쿠수이 등 유난히 많은 문인이 찾기도 했다. 반면 이곳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또 있는데 안타깝게도 변태들이다. 그 이유는 남녀 혼탕인데다가 온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옷을 다 벗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상한 짓(?)을 하는 몇몇 변태들 때문에 여성에게 최고의 온천임에도 기피 대상이 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문인들도 찾는 운치 있는 산천에서의 온천욕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은가. 다행히도 밤 8시부터 10시까지는 여성전용으로 바뀌어 변태 걱정 없이 느긋하게 온천을 즐길 수 있다고 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밖에 일본에서 가장 큰 노천탕으로 알려진 타카라가와 온천도 가볼 만하다. 이곳은 옛날부터 아기를 낳게 해주는 효염 탕으로 유명한데 도네강 최상류에 있어 호우시 온천과 마찬가지로 때 묻지 않은 자연 속에서 온천을 할 수 있다. 이곳은 수건으로 중요한 부위를 가리는 것이 허용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부담을 덜 수 있으며 숙박을 할 수 있는 료칸식 객실도 함께 있는데 인기가 많아 신속한 예약은 필수다.

사실 온천을 즐기는 편이 아니다. 뜨거운 것을 싫어해 찜질방도 한번 안 가봤다. 그런데 온천으로 유명하다는 쿠사츠로 출장을 가게 됐다. 그래서 속으로 생각했다. “기사를 써야 하니 한 번은 물에 들어가자.” 그런데 웬걸, 아침마다 조금이라도 더 잘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겠다며 벽에 대고 말하던 내가 새벽에 일어나 온천을 했다.

병을 낫게 하는 마법의 온천수
가장 큰 원인은 일본에서 20년 이상 살고 있는 통역사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저는 쿠사츠 온천만 가요.” 일본 전역에 3000천여 개의 온천이 있는데 그 중 쿠사츠가 최고라니. 눈이 번쩍 뜨일 만도 했다. 물론 온천마다 성분이 틀리기 때문에 사람마다 선호하는 곳도 다르겠지만 통역사라는 직업의 특성상 수많은 온천에 가보았을 텐데 자신 있게 단언하는 모습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날 밤 10분 동안 조심스럽게 온천을 했고 코 옆에 돋아났던 붉은 알레르기가 사라지는 체험을 한 후 지금은 보다시피 쿠사츠 온천 예찬론자가 되었다.
쿠사츠 온천은 아직 우리나라에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아리마 온천, 게로 온천과 함께 일본의 3대 명 탕 중 하나이다. 이곳의 온천수는 흔하지 않은 강한 산성으로 강력한 살균력 덕분에 병 치료에 효과적이다. 떠도는 말로 ‘마음의 병 이외엔 무엇이든 치유해 준다’라는 소리가 있을 정도. 하지만 넘치면 안 하느니만 못한 법. 오랫동안 몸을 담글 류의 온천수는 아니다. 쇠를 담그면 단기간에 크기가 반이 될 정도로 강한 산성 물이니 입욕 시간을 15분 이상 넘기지 않는 것이 좋다. 또한 피부가 예민한 사람이라면 온천 후 물로 가볍게 헹궈내는 것을 잊지 말 것.
사실 쿠사츠 온천 마을의 첫인상은 강렬했다. 계란 썩는 듯한 유황 냄새도 그랬지만 무엇보다도 마을 가운데 위치한 독특한 풍경의 유바타케 때문이었다. 우리말로 온천 밭을 뜻하는 이곳은 55도의 뜨거운 온천수가 일 분에 5,000리터가량 샘솟아 7개의 나무통으로 흘러들어 마을 여관으로 공급되는데 그 모양이 정말 구획을 나눠 놓은 밭처럼 생겼다. 침전물질인 유노하라 때문에 온천수는 말간 우유빛깔을 띠고 있는데 그 위로 연기가 뿜어져 올라와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 주변에 유카타를 입고 천천히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신선 같기도 하고 혹은 저승사자 같기도 한데 확실한 건 부러울 정도로 느릿느릿 여유로운 모습이라는 거다. 아니, 어쩌면 쿠사츠는 환경론자에게는 천국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마을 밑에 뜨거운 온천수가 흘러 겨울에 눈이 오면 제설 작업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눈이 녹고 수도 파이프가 온천수 안에 있어 따뜻하게 데워진 물이 각 가정에 공급되기 때문에 에너지 절약이 저절로 되기 때문이다. 또한 고지대에 있어 여름에도 27도를 넘지 않아 에어컨을 켤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보폭을 좁게, 유카타 산책
쿠사츠의 메인이라고 할 수 있는 유바타케를 중심으로 여러 갈래의 길들이 뻗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예쁜 곳을 손꼽자면 바로 ‘사이노카와라 공원’과 ‘사이노카와라 공원거리’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두 곳은 공원과 거리라는 타이틀로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지만 그 풍경이 확연히 달라 걷다 보면 두 배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유카타를 입고 보폭을 좁게 걸어도 부담되지 않을 정도의 산책 코스.

PART 1 사이노카와라공원
이 길을 걸으며 어렸을 적 즐겨봤던 만화 ‘란마 1/2’이 생각났다. 원래 주인공인 란마는 남자였는데 어느 온천에 잘못 빠졌다가 그 후로 차가운 물만 맞으면 여자로 변신한다. 또한 고양이, 팬더 등 함께 등장하는 대부분 캐릭터가 이런 식으로 저주에 걸렸다는 설정. 그들이 주로 배틀을 했던 배경은 역시 온천 지역이었는데 실제로 존재한다면 아마도 사이노카와라 공원 같은 곳이 아니었을까 싶다. 운치 있는 오솔길을 따라 걷다 보면 옆으로 동글동글 작은 탕들이 계속 나타나는데 그 안에는 50도 정도 되는 온천수가 끊임없이 끓어오른다. 누군가 소원을 빌며 던졌을 동전들이 가득한 탕이 있는가 하면 못 보고 지나칠 만큼 아주 작은 탕도 있다. 온천가 특유의 풍류를 만끽하며 걸었는데 알고 보니 지금은 공원으로 잘 정비되어 예쁜 산책로가 되었지만 과거에는 귀신이 나오는 신천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두려워했던 곳이라고.

PART 2 사이노카와라 공원거리
관광지에 가면 어디든 메인거리가 있고 상점과 사람들의 이미지가 혼합되어 그 거리 특유의 분위기가 형성된다. 사이노카와라 공원거리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풍성함이다. 바로 마쯔 무라 만주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호빵처럼 생겼는데 안에 달달한 팥이 듬뿍 들어 있어 맛이 풍성하고 온천수의 증기로 쪄서 씹으면 말캉말캉 부드럽다. 그렇게 순식간에 2개를 먹어 치웠는데 가장 놀라운 것은 길을 걷다 보니 어느 순간 내 손에 만주가 들려 있었다는 거다. 상점 사람들이 갓 찐 만주를 사람들에게 시식해보라고 마구 나눠 주기 때문인데 보통 식당에 가면 반찬 하나, 리필 한번에도 돈을 받는 일본이라서 더욱 놀랍다. 거절하지 않고 거리 두 번 정도 걸으며 챙겼으면 만주 한 세트는 거뜬히 얻었을 정도. 그 밖에도 사이노카와라 거리에는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특산품들을 파는 예쁜 건물들이 죽 늘어서 있어 걷는 동안 눈이 즐겁다.

치명적인 아름다움, 시라네산
온천 근처에는 언제나 산이 있다. 산은 온천의 생성과정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쿠사츠 온천도 예외는 아니다. 이곳은 시라네산 동쪽에 흐르는 지하수와 시라네산의 폭발로 생긴 가스가 만나 생긴 온천이다. 만약 시라네산이 아내이고, 지하수가 남편이라면 쿠사츠 온천은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쯤 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시라네산이 진짜 인간이라면 그녀의 남편과 아이들은 항상 긴장해야 할 것이다. 사계절 내내 시리도록 아름다운 매력을 발산하는 그녀를 본다면 누구든지 홀리게 될 것이기 때문. 로프웨이를 타고 2,000미터의 레스트 하우스에 올라 시라네산 꼭대기에 있는 에메랄드빛 칼데라호 유가마를 보기 위해 걷는 동안 그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울긋불긋 단풍이 들어 마치 커다란 정원을 옮겨놓은 듯한 시라네산을 구름과 바람이 가만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라네산 위로 흩뿌려진 구름의 어두운 그림자가 천천히 지나가고 다시 햇빛이 비추기를 반복했다. 때로는 안개가 껴 불과 몇 미터 앞도 볼 수 없었다. 또 겨울에는 눈의 습격을 받아 시라네산 위로 평균 10미터 이상의 눈이 쌓이는데 이 때문에 시라네산의 대나무는 높이가 무릎밖에 안 오고 줄기가 억세처럼 얇다. 하지만 장미꽃에 가시가 있듯, 아름다운 피조물은 독을 숨기고 있는 법. 정작 조심해야 할 것은 바로 시라네산이다. 가끔 화가 나면 주체하지 못하고 유황 속 수소가스를 배출하는데 언젠가 유가마를 보기 위해 길 따라 걷던 사람들이 그걸 맡고 갑자기 쓰러져 죽은 적이 있다. 그 결과 가스 배출 부위인 시라네산의 엉덩이 쪽 길이 폐쇄되었다. 대신 새로운 트레킹 코스가 정비되었는데 유가마까지 가려면 500미터 정도의 길이로 조금 돌아가야 하지만 안전하게 아름다운 풍경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