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inkle Twinkle Kuala Lumpur's Night
별빛과 달빛을 이기는 쿠알라룸푸르의 환한 밤

쿠알라룸푸르의 밤에는 반전이 있다. 음주를 금지하는 이슬람의 율법을 완벽히 뒤집어버리는, 먹고 마시고 즐기는 유쾌한 밤. 도시에 어둠이 찾아오면 사람들은 하나 둘 밖으로 나온다. 에너지 넘치는 이 시끄러운 밤이 아쉬워서인지 사람들은 자꾸만 거리 위를 헤맨다.

글 함희선 기자 사진 김지은 기자 취재협조 버자야타임스퀘어호텔 www.berjayahotel.com 

낯선 쿠알라룸푸르에 밤이 찾아오면 익숙하게 호텔방을 나섰다.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이 도시의 밤과의 충격적인 첫 만남을 이후로 매일 밤을. 452미터의 장엄한 위용을 뽐내는 현대적인 말레이시아의 상징, 세계에서 3번째로 높은 페트로나스 쌍둥이 빌딩에 불이 켜지면 한낮에 흘린 땀을 깨끗이 씻어내고는 기지개를 폈다. 의도하지 않아도 도시 어디에서든 보이는 페트로나스의 은색 불빛은 마치 아침 햇살에 눈을 뜨게 하는 낮의 태양과도 같게 느껴졌다. 까만 밤의 끝에 매달린 가로등과 네온사인의 화려한 궤적을 따라 발걸음이 옮겨진 건 그런 이유에서다. 새로운 곳에 갈 때면 익숙한 것을 만들고 싶어 하는 내 습성과 잘 맞아 떨어진 것도 한몫 했다. 취재는 늘 1분 1초가 새로운 것들로 가득하기 때문에 늦은 밤이야 말로 내가 추구하는 익숙함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매일 밤 같은 길을 산책하고, 같은 가게에서 같은 종업원에게 같은 메뉴를 시키면서 얻는 기쁨이 내게는 이상하리만큼 크다. 그 익숙함에 편안함을 느끼게 되면서 여행에 대한 기억도 선명해지고, 그 장소에 대한 애착도 커진다.

사실 쿠알라룸푸르에서의 밤은 그리 기대할 것이 없었다. 이슬람을 국교로 하는 나라에서는 당연히 캄캄하기 만한 진짜 밤을 예상하기 마련이니까. 음주를 금지하는 이슬람의 율법 탓에 재미없고 우울한 밤일 거라고 말이다. 그러나 쿠알라룸푸르의 밤에는 반전이 있었다. 서울의 밤 못지않게 휘영청 밝은, 먹고 마시고 즐기는 유쾌한 밤. 이들이 종교의 믿음을 저버린다는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관광을 주력사업으로 하는 말레이시아에서 외국인을 위해 오히려 음주가무를 권장하고 있다는 게 실체다. 쿠알라룸푸르의 에너지 넘치는 밤은 오롯이 이방인을 위한 선물인 셈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한들 말레이시아산 술을 찾을 수는 없다. 이슬람을 국교로 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변하지 않으니 태국의 창Chang이나 싱가포르의 타이거Tiger가 대신 술잔을 차지한다. 나는 이 도시가 선사하는 밤의 기운을 고마운 마음으로 매일매일 받아들였다. 별빛과 달빛을 이기는 쿠알라룸푸르의 그 환한 밤을.

쿠알라룸푸르의 밤 하나
부킷 빈탕
쿠알라룸푸르를 어느 정도 아는 이들에게 어쩌면 부킷 빈탕Bukit Bintang은 진부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항상 언급되는 곳이고 또 여행자라면 응당 찾아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킷 빈탕에 가지 않는 것은 어떤 이유라도 의아한 일로 여겨진다. 마치 서울에 온 여행자가 명동이나 홍대를 너무 뻔한 곳이라며 빼놓는 것과 비슷한 상황일 거다. 잘란 출란Jalan Chulan, 잘란 술탄 이스마일Jalan Sultan Ismail, 잘란 암팡Jalan Ampang, 그리고 잘란 임비Jalan Imbi, 잘란 푸두Jalan Pudu 등의 대로를 커버하는 지역을 일컫는 부킷 빈탕은 쿠알라룸푸르의 골든 트라이앵글, 바로 그 심장이다. 말을 하면 할수록 입에 착하고 달라붙는 매력이 있는 부킷 빈탕은 그 발음만큼이나 아름다운 뜻을 품고 있다. 말레이어로 별들의 언덕! 여기서 ‘별’은 여행자 나름대로 정의하면 좋을 것 같다. 도시에서 가장 번화한 곳으로 번쩍번쩍하는 네온사인이 즐비해 그 불빛이 별이라 할 수 있고, 밤이면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모두 이곳으로 향하니 그들의 붉은 후미등이 별이 될 수도 있으며 또 롯트 텐Lot 10과 파빌리온Pavilion, 스타힐 갤러리Starhill 등 7개의 거대한 백화점이 가득하니 패셔니스타와 같은 별이라 할 수도 있는 거다. 굳이 다른 곳에 가지 않고 호텔, 레스토랑, 바, 카페 등이 한곳에 줄줄이 모여 있는 쇼핑과 오락의 중심지 부킷 빈탕에서 온종일 머무를 경우가 많다. 나 역시 잘란 임비에 위치한 버자야 타임스퀘어에서 머물며 부킷 빈탕을 마치 내 집 앞 동네처럼 드나들었다. 

잘란 부킷 빈탕Jalan Bukit Bintang을 따라 1킬로미터 길이의 빈탕 워크Bintang Walk가 이어진다. 이 길을 따라 상점과 카페 등이 늘어서 있지만, 밤이 되면 가장 눈에 띄는 건 어둠 속의 네온사인을 흐리게 하는 몽환적인 물담배 연기다. 아랍의 전통의상으로 차려입은 사내들이 손님을 맞이하고 코끝을 매콤하게 찌르는 향신료 향기가 새어나오는 아랍레스토랑이 많기 때문에 아랍 스트리트라는 별칭을 갖고 있기도 하다.

쿠알라룸푸르의 밤 둘
창킷 부킷 빈탕
시간이 조금 여유롭다면 화려함으로 에워싸인 부킷 빈탕의 중심에서 한걸음 벗어나보자. 잘란 부킷 빈탕의 큰 대로에서 파생된 창캇 부킷 빈탕Changkat Bukit Bintang은 정말 딱 한 걸음 차이에 위치하고 있다. 뒷골목처럼 좁지는 아니지만, 그리 크지도 길지도 않은 골목. 북적거리고 정신없는 부킷 빈탕의 모습과는 천차만별로 스타일리쉬하고 트렌디한 레스토랑과 술집이 얼굴을 드러낸다. 처음 이곳에 들어섰을 때, 여기가 과연 쿠알라룸푸르인지 헷갈리게 할 만한 모습 때문에 한동안 목적지를 찾지 못하고 배회하기도 했다. 아시아인보다는 서양인이 훨씬 더 많아 유럽의 한 거리를 보는듯 했다. 노천 테이블에 앉아 타이거 맥주를 들이키며 바라본 창캇 부킷 빈탕은 방콕 카오산 로드의 활기찬 분위기를 닮았고, 홍콩 --의 세련됨을 닮았으며, 서울로 치면 이태원이라 불러야겠더라. 시크한 와인바, 스포츠 경기를 상영하는 술집, 초록 간판이 전형적인 아이리쉬 펍, 아시안 푸드의 안주가 일품인 아시안 스타일의 바, 일렉트로닉 음악이 흘러나오는 핫한 클럽까지 나이트라이프에서 바라는 모든 선택이 이 작은 거리를 온통 차지하고 있다.

쿠알라룸푸르의 밤 셋
잘란 알로
시끌벅적한 야시장이 들어선 잘란 알로Jalan Alor는 알고 가는 것보다 그저 본능이 이끄는 대로 걷다 보면 만나는 게 다반사다. 시각, 미각, 후각을 총동원하게 되는 이 길은 부킷 빈탕에서 조금만 걸으면 만나는데, 중국식 노점의 빨갛고 노란 등불과 그 아래로 다닥다닥 붙어있는 테이블, 거기를 가득 메운 사람들, 그리고 커다란 프라이팬 안에서 지글지글 끓는 고소한 음식 냄새와 연기로 마치 여느 축제의 중간에 있음을 연상시킨다. 부킷 빈탕이나 창캇 부킷 빈탕이 화려함과 고급스러움을 무기로 내세웠다면 잘란 알로는 포장마차처럼 값싸고 맛있는 거리음식과 운치 있는 분위기로 유혹한다. 우리 갈비탕과 비슷한 바쿠테, 짭짤한 볶음국수인 차 콰이 테오, 고기 꼬치구이 사테, 하이난 치킨라이스 등 다양한 인종이 사는 말레이시아답게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이곳에 있으면 눈이 즐겁고 입이 즐겁고 코가 즐거워서 아무리 배가 불러도 테이블에서 쉽사리 일어나기가 어렵다. 만약 일어나는 순간이 있다면 아마도 옆집으로 옮길 때뿐일까. 한낮에 땡볕에서 걷느라 소진한 에너지와 흘려버린 땀은 매일 밤마다 잘란 알로에서 재충전 되었다. 도시에 머무는 동안 아주 잠깐이라도 잘란 알로에 다녀오지 않은 밤이면 노란 불빛이 환영이 되어 눈앞에 아른거렸다. 코밑에서는 숯불 위에서 매콤하게 구워지는 닭꼬치 냄새가 거짓말처럼 올라왔다. 오늘 밤도 늦은 시간까지 후끈거리는 분위기와 왁자지껄한 소리가 끊이지 않을 그곳이 다시 또 그립다.